ⓒ시사IN 안희태송기복씨(사진)와 송기준씨는 인터뷰 내내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가슴속 깊이 패인 상처는 살짝만 건드려도 눈물이 되어 줄줄 흘러내렸다. 그들은 사건 이후 수십 년 만에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안기부의 조작은 평온하던 한 일가의 삶을 완전히 망가뜨렸다.
“내가 원래 이 보랏빛 꽃을 참 좋아했어요. 그런데 이젠 싫어··· 거기서 맞을 때 내 얼굴, 내 몸 색깔이 꼭 이랬어요. 두 팔과 다리를 묶고 자기 혁대를 풀어 나를 때리는 거야. 하염없이··· 그 수사관이 마약을 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때릴 수 있을까요. 아! 그 보랏빛!”

기자가 선물한 보랏빛 가을 국화가 화근이었다. 꼭 ‘25년’ 만에야 진실이 밝혀진 것을 축하하고 싶어 준비한 탐스러운 가을 국화 스물다섯 송이가 가슴 깊은 곳의 상처를 들쑤시고 말았다. 갑자기 송기복씨(66)가 왈칵 눈물을 쏟았다. 그러곤 크고 길게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말리지 않으면 몇 시간이고 울기만 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말릴 수도 없고, 말려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지금 그는 처음으로 ‘제3자’에게 평생을 묻어온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는 것이다. 10월24일, 이날 오전에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가 과거의 조작사건 중 하나로 이른바 ‘송씨 일가 간첩단 사건’을 발표한 날이었다. 

전날에도 송기복씨는 전화를 걸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기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느냐고 따져 물었고, 때로 격하게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그는 “세월이 흘렀다 해도 당신들이 지금 우리 사건을 어떻게 다룰지 믿을 수가 없다”라며 목이 메곤 했다.

손가락으로 툭 건드리면 언제든 터져버릴 것 같은 극도의 불안과 긴장. 대체 25년 전에 어떤 사건이 벌어졌기에 그는 그때의 아픔을 지금 이 순간에도 느끼고 있는 걸까.

1982년 9월11일 아침, 한국의 모든 일간지에 대문짝만 한 기사가 실린다. 이른바 ‘송씨 일가 간첩단 사건’. 북한의 대남 공작 부서인 노동당 연락부 송창섭 부부장(당시 62세)이 여덟 차례에 걸쳐 남한에 잠입, 모두 28명의 가족·친지들과 모략해 대규모 간첩 활동을 해왔다고 안기부가 발표한 것이다. 간첩단의 규모에서나 사건의 파장에서나 가히 ‘1980년대 최대의 간첩단 사건’으로 기록될 만한 내용이었다. 전국의 모든 신문과 방송들은 한 달 가까이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이 사건의 파장이 적지 않았던 것은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된 이들이 전직 대학교수, 교사, 회사 중역 등 신분이 뚜렷한 인텔리들이었기 때문이다. 북한 노동당의 고위 간부인 송창섭씨가 형제와 가족, 심지어 대학에 다니는 자녀들까지 포섭해 조직적인 간첩 활동을 벌였다는 발표라서 드라마틱한 면까지 있었다. 실제로 훗날 이 사건을 소재로 한 TV 드라마가 방영되기도 했다.

안기부가 연출하고 언론이 생중계한 이 ‘무시무시한 가족’의 삶은, 그러나 피눈물로 얼룩진 것이었다. 대법원이 이 사건을 두 차례나 무죄 취지 파기환송했음에도 가족들은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뿔뿔이 흩어졌고, 서로를 원망하며 살아야 했다.

끝없는 고문의 후유증

송기복씨는 사건 당시 서울 신광여중 교사였다. 그는 1982년 3월2일 신학기 첫날, 학교로 찾아온 안기부 수사관에 의해 청주로 연행됐다. 그러곤 116일 동안의 불법구금과 1년5개월 간 구속 끝에 이듬해 12월25일,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사건 관련자 중 가장 낮은 형량이었다.

그럼에도 116일 동안 자행된 안기부의 고문으로 송기복씨의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물 먹이기, 잠 안 재우기, 손톱 밑 바늘로 찌르기 따위 수십 가지 고문을 가하며 아버지 송창섭과의 관계를 추궁했다. 수사관들은 한 여성의 ‘성 정체성’도 완전히 짓밟았다.

ⓒ시사IN 안희태송기준씨
“가끔 술 먹이는 고문을 받곤 했어요. 차라리 술 마시고 정신을 잃는 게 낫다 싶어 막 받아먹었죠. 그럼 그때부터 어린 수사관들이 날 능욕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짐승의 성기로 만든 술안주를 내게 주며 먹으라고···. 그러곤 넌 섹스할 때 어떻게 하냐, 어떻게 생겼냐··· 정말 입에 담지도 못할 말들을···.”

석방된 뒤 송기복씨는 한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남성에 대한 공포와 저주’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동성동본임에도 결혼을 감행했을 만큼 깊이 사랑했던 남편 송영섭씨에게도 “왜 나와 이혼해주지 않느냐. 나 같은 빨갱이와 사는 당신은 위선자다”라며 윽박지르기도 했다.

“한 번은 남편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대한민국 국민을 대표해서 당신에게 사죄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내가 속으로 ‘저 인간이 내게 뭔가 잘못한 게 있나 보다’ 하고 생각했어요. 믿지 못한 거죠. 지금 생각하면 그때 왜 내가 그런 생각을 했는지··· 세상에 그런 남편이 어디 있겠어요. 너무나 죄스럽고, 한스러워요.”   

기복씨는 방송작가 김수현씨와 청주여고 동기이기도 하다. 석방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김 작가는 송씨에게 “기복아, 이 모든 일들을 모두 기록해둬라”라고 당부했다. 이 말을 실행에 옮기듯, 송씨는 차곡차곡 기록을 모아뒀다. 그가 기자에게 보여준 분홍색 보자기엔 남편의 면회일지, 그리고 가족들과 주고받은 편지 수백 통이 빼곡히 쌓여 있었다.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남편이 적은 면회일지와 편지들은 곧 송씨가 이제껏 생을 이어올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가족들의 사랑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었다. 사건 이후 송씨는 직업을 잃었다. 교단으로 돌아가지 못한 것은 물론, 교원연금도 받을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공군 중령이었던 남편 송씨마저 이 사건으로 강제 예편당했다.

생계가 막막하고, 세간의 눈치까지 살펴야 하는 한국에 머무를 까닭이 없었다. 남편 송씨는 평소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카이로프랙틱’(척추교정법)을 배우러 아이들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하지만 송씨는 한국에 홀로 머물러야 했다. 안기부 측이 “송기복이 미국에 가서 아버지를 만나려 한다”라며 여권 발급을 불허했기 때문이다. 1년 넘게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닌 끝에 김수환 추기경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미국에 갈 수 있었다. 한국을 떠난 날은 공교롭게도 1987년 6월29일이었다. 

영원히 돌아오고 싶지 않았던 한국에 다시 돌아온 것은 ‘미국의 의대에서 배운 척추교정법을 한국에 전파하며 떳떳이 살고 싶다’는 남편의 뜻 때문이었다. 그러나 남편 송씨는 끝내 아내의 누명이 벗겨지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2002년 세상을 떠났다.
부친에 이어 척추 교정의로 살아가고 있는 아들 송준혁씨(38)는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좋지 않으신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기 전에 모든 일이 명백히 밝혀졌으면 좋겠다”라는 바람뿐이다. 

가족·친척 모두 죽고 망가져

이튿날, 경기도 광주시 도척면의 작은 마을을 찾았다. 송기복씨의 사촌 오빠인 송기준씨(79)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는 마을 어귀에서 한참 더 들어간 곳에 외따로 살고 있다. 마흔이 넘은 아들과 둘이서 손바닥만 한 접착제 공장을 운영하는 ‘거물 간첩’은 이제 걷는 것조차 힘겨운 팔순 노인이 되었다. 
    
송기복씨의 삶도 불행했지만, 송기준씨의 삶은 ‘파탄’ 그 자체였다. 사건 당시 번듯한 화학공장을 운영하며 서울 서초동에 있는 184㎡(55평)짜리 아파트에 살았던 그는 밀입북 혐의 등으로 ‘제2의 주범’에 지목돼 1심에서 사형을 선도받은 뒤 상고 끝에 6년 실형을 살았다. 하지만 출소한 후 그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집과 공장은 소송비용 등으로 남에게 넘어갔고, 아내와는 협의이혼했다. 큰딸은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교사였던 둘째 딸은 권고사직을 당했다. 셋째 아들은 고교를 중퇴했고, 막내는 신문팔이로 입에 풀칠을 하고 있었다. 자식들 앞에 얼굴조차 내밀 수 없었다. 이때 그의 나이 환갑이었다. 

ⓒ시사IN 안희태‘송씨 일가’ 사건을 조사한 국정원 진실위는 10월26일 내곡동 국정원 청사에서 설명회를 열었다.
‘자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순간, 평소 그를 좋게 본 한 지인이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의 우사가 비었다며 아무거나 해보라고 권했다. 고문으로 망가진 몸을 이끌고 환갑의 노인은 소똥 천지였던 우사를 접착제 공장으로 만들었다. 겨우 3년 전까지만 해도 공장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고 잠을 잘 만큼 비참하게 살아야 했다. 송기준씨는 “그나마 밥이라도 먹을 수 있는 지금은 행복해야 마땅한데도, 여전히 내 삶은 지옥 같다”라며 서럽게 울었다.

인터뷰 도중 집 전화벨이 몇 차례 울렸다. 그는 상대방과 국정원 발표 내용에 대해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전화를 건 김 아무개씨는 기준씨의 삶에서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25년 전에 내가 운영하던 회사의 직원이었어요. 그런데 법정에서 나의 밀입북 혐의를 뒤집는 증언을 해줬어요. 그래서 내가 목숨이라도 건진 거야. 하지만 그 친구는 그것 때문에 6개월 실형을 살았어요. 그 뒤 생사도 까맣게 모르다가 지난해에야 다시 만나게 된 거야. 얼마나 반갑던지 껴안고 엉엉 울었어요.”   

수십 년간 생사를 모르고 살아온 게 어디 그들뿐이랴. 충북 음성군 생극면에 터를 잡고 살았던 ‘송씨 일가’는 간첩단 사건으로 완전히 붕괴됐다. 송창섭씨의 모친은 사건의 충격으로 정신을 잃고 떠돌아다니다가 객사했고, 송기복씨의 작은아버지 송오섭씨는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떴다. 그래도 죽은 사람은 죽었다는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었지만 ‘산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 길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지난해 국정원 진실위가 사건 조사에 착수하면서 이들은 25년 만에야 서로 재회하게 된다. 하지만 수십 년 만에 만난 ‘혈육’도 그저 반가울 수만은 없었다. 송기복씨는 “내가 안기부에서 기준 오빠의 이름을 댄 것 때문에 오빠가 잡혀갔을지도 모른다”는 미안함에 사로잡혀 있었고, 송기준씨는 그대로 “동생이 미안해할까 봐 선뜻 연락을 하기 어려웠다”라고 털어놓았다. 다른 형제와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진실위의 노력으로 사건의 실체는 밝혀졌지만, 송씨 일가가 지난 세월 동안 당한 고통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이제 남은 건 국가의 배상 문제다. 과거 안기부 조작으로 고통받은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재심특별법의 제정도 필요하다. 송기복씨와 송기준씨를 비롯한 송씨 가족들은 “간첩단 사건의 실체가 안기부의 조작이었음이 드러난 만큼 국가가 배상해야 하는 것은 물론 당시 무책임하게 사건을 보도했던 언론들도 진실을 알리는 데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요구한다. 얼마 남지 않은 삶, ‘빼앗긴 세월’을 되찾는 유일한 길은 돈이 아니라 훼손된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송기복씨와 만나던 날, 그는 쉴새없이 전화를 해대는 언론사 기자들을 향해 “왜 날 인터뷰합니까, 날 잡아가둔 사람들을 찾아서 혼내는 게 언론이 할 일 아닌가요?”라며 호통을 쳤다. 하지만 25년 전, 이 사건을 1면 톱 기사로 다루며 호들갑을 떨었던 조선·중앙·동아일보 등 주요 신문의 기자들은 그에게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튿날 이들 신문에선 DJ 납치와 KAL기 폭파 등 굵직한 사건에 가려 송씨 일가 사건의 진실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언론을 통해 진실이 알려지고 나면 동네 노인들과 어울려 소주라도 한잔 맘 편히 마시고 싶다”라는 팔순 노인의 바람이 떠올라 신문을 펼쳐든 기자는 내내 씁쓸했다.

 

기자명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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