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나온 책 가운데 이해영의 〈안익태 케이스〉(삼인, 2019)만큼 언론에 많이 소개된 책은 없다. 이 책은 〈조선일보〉를 뺀 중앙의 모든 일간지가 큰 비중으로 기사를 쓰거나 지은이와의 대담을 실었다. 그런 끝에 이 책과 저자는 공중파 텔레비전의 간판 뉴스 프로그램에까지 진출했다. ‘국가 상징에 대한 한 연구’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이 주목받게 된 이유는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기 좋은 폭발력 있는 화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한 줄로 요약하면 ‘애국가를 만든 사람에게 애국심이 없었다!’ 바로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이야기다.

〈안익태 케이스〉를 소개하는 허다한 기사와 인터뷰를 대하면서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이 책의 지은이는 단지 두 문단으로 된 간략한 책머리의 첫 번째 문단에 분명히 이렇게 썼다. ‘안익태의 행적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이제 겨우 10여 년인지라 앞선 좋은 연구들이 있음에도 여전히 빈 곳이 많았다.’ 그렇다면 제대로 훈련받은 기자가 해야 할 첫 번째 질문도 이런 것이어야 한다. “앞선 연구들의 부족한 점은 무엇이고, 이번에 나온 책이 앞선 책들과 다른 점은 무엇이죠?” 이런 질문은 없어서도 안 되고, 기사에서 누락되어서도 안 된다.

ⓒ이지영

마치 짜기나 한 것처럼 어느 기자도 이 질문을 하지 않는 바람에 세 가지 문제가 생겼다. 첫째, 독자들이 다른 책을 비교할 기회를 잃게 됨으로써 기사에서 정보를 얻어야 할 독자의 권리가 사라졌다. 둘째, 앞선 저자들의 책이 거론되지 않음으로써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던 이들에게 돌아가야 할 응분의 영예가 박탈되었다. 셋째, 앞선 저자의 업적과 자신의 책을 비교하면서 저자(이해영)가 자신을 자랑할 기회, 혹은 10여 년이나 뒤에 나왔으면서도 선행 연구를 뛰어넘지 못하고 똑같은 책을 쓰고 만 것에 대해 저자가 변명할 기회를 빼앗았다. 지은이는 ‘앞선 연구들’이라고 했지만, 사실 안익태의 일제강점기 행적과 그의 교향시 ‘코리아 판타지’에 대한 연구로 손꼽을 책은 이경분의 〈잃어버린 시간 1938~1944〉 (휴머니스트, 2007)뿐이다.

이경분은 안익태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독일 체류 시절을 연구하게 되었는데, 전혀 뜻하지 않게도 ‘안익태가 일제에 협력한 사실을 밝히는 작업’이 되고 말았다. 〈잃어버린 시간 1938~1944〉은 독일 현지의 각종 문서보관소와 음악 관련 기록을 하나씩 발굴하면서 떳떳지 못해서 숨기고자 했던 안익태의 일독협회(日獨協會·일본과 독일의 문화 친선 단체) 시절을 자세히 추적한 책이다.

1907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난 안익태는 숭실학교 2학년이던 1919년 3·1운동에 가담해 퇴교를 당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국립음악학교에서 첼로를 전공하고 잠시 독주 연주자 생활을 하다가 다시 미국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애국가’를 작곡했던 그는 1938년 돌연 미국을 떠나 전운이 감도는 유럽으로 거처를 옮긴다. 1938~1941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학생이자 직업 음악가라는 어정쩡한 신분을 유지하던 그는 1941년과 1942년 사이에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안착하게 된다. 일반적인 시각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안익태의 동선을 이경분은 이렇게 설명한다. ‘안익태는 독일에서 음악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데에는 전쟁이라는 상황이 큰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것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우리가 클래식이라고 말하는 서양 고전음악은, 좀 과장하면 ‘독일 민족 음악’이다. 독일 민족음악이 서양 고전음악의 본령일 때,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 여러 유럽 국가의 고전음악이란 한낱 독일 민족음악의 ‘변두리 음악’일 뿐이다. 그러므로 클래식 음악계에서 성공하려면 독일에서 성공해야 한다. 마침 나치 독일은 고전음악계에서 유대인 지휘자들을 추방했고, 안익태는 그 빈틈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가 1943년 8월18일, 나치의 인종차별주의 아래서는 지휘대를 유색인에게 절대로 허용하지 않을 베를린 필하모니를 지휘하게 된 영광은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성과가 아니었다.

안익태는 스파이가 맞다, 하지만···

안익태의 독일 체류와 눈부신 음악 활동은 일독협회 베를린 본부와 일본 괴뢰국인 만주국의 베를린 주재 공사관 에하라 고이치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일독협회는 안익태가 독일 제국음악협회의 회원증을 교부받도록 보증을 섰으며 독일의 동맹국과 점령국에서 연주회를 펼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또 에하라 고이치는 만주국 건립 10주년을 기념하는 ‘만주국 축전곡’을 안익태에게 의뢰하고 베를린에서 초연케 했다. 안익태는 일본과 독일의 원활한 문화 교류가 자신에게도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의 야망을 위해 두 전범국의 선전일꾼(propagandist)이 되었다.

이해영 지음, 삼인 펴냄
1938년 2월20일, 아일랜드에서 자작곡 ‘코리아 판타지’를 초연하고 나서 아일랜드 신문과 했던 인터뷰에서 조선의 독립을 염원했던 안익태는 부다페스트 음악원의 학적부에도 출생지를 ‘평양, 조선’으로 적었다. 하지만 베를린으로 활동지를 옮기면서 이름과 출생지를 에키타이 안(Ekytai Ahn·Ekitai Ahn)과 ‘동경, 일본’으로 바꾼다. 이와 함께 ‘코리아 판타지’도 제목과 내용도 여러 차례 변조했다. 이경분은 아일랜드 초연 때의 악보가 남아 있지 않은 ‘코리아 판타지’를 안익태가 ‘교쿠토’나 ‘만주 축전곡’으로 개작하거나 활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반대로 이해영은 ‘만주국 축전곡’의 일부가 1954년판 ‘코리아 판타지’에 재사용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안익태 케이스〉의 차별점은 일독협회를 나치의 위장된 국가 조직이라고 애써 강조하면서 베를린 주재 만주국 공사관 에하라 고이치를 특수 공작원이었다고 새삼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전체주의 국가에서 국가 밖의 조직이나, 특수 공작 임무를 병행하지 않는 외교관은 오히려 상상하기 힘들다. 전체주의 국가의 국민은 ‘스파이’가 되도록 교육받지만, 그들이 ‘직업 스파이’가 된다는 것은 별개다. 그런 뜻에서 안익태는 스파이가 맞고, 직업 스파이는 아니다. 국가(國歌)는 ‘가사의 우월성이나 높은 미학적 수준’을 따지기보다 “만든 이가 최소한 ‘애국적’이어야 한다”라는 지은이의 주장은 수긍되지만, 공모를 통해 국가를 새로 정하자는 제언과는 마찰을 일으킨다. 가사와 곡을 출품하는 시민은 먼저 ‘애국적인가, 아닌가’부터 심사받아야 하기 때문이다(그가 훗날 이민을 가도 큰일이다). 애국이라는 시민종교가 국가(國歌)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새 국가는 춤출 수 있으면 좋겠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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