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벌을 피하려면 정숙과 순결을 국가에 증명해야 한다. 모자보건법 제14조 1항이 인정하는 임신중지 예외조항 다섯 가지에 속하는 경우에만 합법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강간으로 인해 임신했거나, 우생학·유전학적으로 신체적·정신적 장애가 있는 등 ‘불쌍한’ 여성만이 법의 이해와 허락을 구할 수 있다. 여기에 때로는 남성의 ‘동의’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처럼 낙태죄는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국가가 정한 규범과 정상성 안에서만 승인하겠다는 선언과 다르지 않다.
한국은 1953년 형법 제정과 동시에 인공임신중지를 법으로 금지해왔다. 하지만 1961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부로 ‘가족계획사업’이 포함되며 1996년 사업이 종료되기 전까지 낙태를 적극적으로 묵인해온 역사를 갖고 있다. 방송시설과 의료진이 갖춰진 차량(‘낙태버스’)을 전국 방방곡곡 보급했고 ‘짐승’과 ‘벌레’의 삶을 벗어나 ‘인간’답게 살려면 35세에는 단산하고, 둘만 낳아 잘 기르고, 종내 하나만 낳으라고 종용했다(〈가족과 통치〉, 창비, 2018).
이 때문에 낙태죄가 ‘사실상 사문화됐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2010년 프로라이프 의사회가 낙태 고발 정국을 주도했다. 법은 법전에 있는 한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칼’이었다. 이들의 등장은 저출생 문제 해결에 골몰한 국가의 이해관계와도 맞닿아 있었다. 2009년 이명박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는 저출생 원인으로 인공임신중지를 지목하며 오랜 기간 내팽개쳤던 낙태죄를 재발견했다. 불과 수십 년 사이에 가족계획사업과 저출생 대책이라는 상반된 방식으로 국가의 필요에 의해 여성의 몸이 ‘도구’로 활용된 셈이다.
낙태죄 폐지 요구는 2016년 10월 불법 낙태수술 의사에 대한 처벌 강화를 골자로 한 ‘보건복지부의 의료관계 행정처분규칙 일부개정안’ 입법 예고를 계기로 한국판 ‘검은 시위’가 시작되며 불붙었다. 그해 말 정부는 가임기 여성 수에 따라 지역에 순위를 매긴 ‘대한민국 출산지도’를 공개하면서 논란에 기름을 붓기도 했다.
여성들은 낙태죄 이슈를 끊임없이 제기했다. 2017년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 합법화 및 도입’을 주제로 한 국민청원에는 23만5372명이 서명했다. 그해 11월25일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국민청원에 답하면서 현행법의 문제를 지적했다. 낙태죄에 국가와 남성의 책임이 빠져 있으며 여성의 자기결정권, 생명권 및 건강권 침해 가능성을 함께 논의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보건복지부 의뢰로 2011년 이후 7년 만에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를 실시했다. 조사는 온라인으로 2018년 9~10월 진행됐으며, 만 15~44세 여성 1만명을 대상으로 했다. 지난 2월14일 발표된 주요 결과를 보면 ‘낙태죄를 규정하고 있는 형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응답한 여성이 74.5%에 달했다. 임신중절 허용 사유를 규정하고 있는 모자보건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응답도 절반(48.9%)에 가까웠다.
2012년 합헌 선고를 받았던 낙태죄가 7년 만에 다시 헌법재판소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헌법재판소의 정기 선고는 매달 마지막 주 목요일에 진행된다. 3월과 4월 정기 선고는 4월18일 임기가 끝나는 서기석·조용호 재판관의 퇴임을 고려해 한번에 진행될 예정이다. 애초 4월11일이 유력했지만, 정부가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이날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할 수도 있어서 변동될 여지가 있다. 헌법재판소는 심리 중인 사건의 선고 여부를 통상 사흘 전 고지하지만, 법원 안팎에 따르면 이번 특별 기일에 낙태죄 선고 여부가 포함될 가능성이 높다. 이미 지난해 5월24일 공개변론을 마친 데다, 이번에 선고하지 못할 경우 후임 재판관의 기록 검토 등을 이유로 다시 수개월 혹은 수년 이상 선고가 지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낙태죄가 헌법재판소 재판관 전원일치 합헌 또는 위헌으로 ‘깔끔하게’ 결론 날 가능성은 높지 않다. 2012년 선고(2010헌바402) 당시에도 8명의 재판관이 4(합헌) 대 4(위헌)로 팽팽하게 맞섰다(재판관 1명 공석). 결과적으로 ‘법률 조항의 위헌 선고에는 재판관 6명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규정에 따라 합헌 판정이 났다. 그래서 다시 헌법 소원이 제기된다면 ‘한정 위헌’ 혹은 ‘헌법 불합치’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한정 위헌은 법 적용 범위를 축소시켜 위헌성을 제거하는 결정이다. 이번 선고에서 한정 위헌을 점치는 쪽은 2012년 당시 위헌 의견 중 하나로 제시된 ‘3분기설’에 근거를 둔다. 임신을 세 개의 기간으로 나눌 때, 초기(1~12주)는 중기(13~24주)나 후기(24주 이후)에 비해 태아가 독자적으로 생존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임신중지를 허용해줄 여지가 있다는 논리다. 헌법재판소가 이를 받아들일 경우 임신 12주 이내 임신중지가 전면 허용된다.
대상 법의 위헌성만 확인하는 헌법 불합치로 결정될 경우 좀 더 복잡해진다. 헌법 불합치는 위헌이기는 하지만 이를 당장 적용하는 게 아닌, 추후 해당 조항을 개정하라고 입법부에 요구하는 형식을 취한다. 이번 헌법소원은 형법 조항에 대한 판단을 구했지만, 헌법재판소가 직권으로 모자보건법까지 검토할 수도 있다. 형법인 낙태죄는 위헌이 아니지만, 임신중지 허용 사유를 지나치게 좁게 허용한 모자보건법을 위헌으로 판단할 가능성 역시 제기된다(〈배틀그라운드〉, 후마니타스, 2018).
이유림 성과재생산포럼 활동가는 헌법재판소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판결문 한 줄 한 줄이 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정 위헌이든 헌법 불합치든 혹은 합헌이든 상관없이 이를 결정한 근거로 어떤 기본권이 언급되는지를 주요하게 봐야 한다. 추후 입법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 활동가의 말처럼 인공임신중지가 불법인가 합법인가를 겨루는 현재의 싸움도 분명 의미 있지만, 문제는 ‘앞으로’다. 임신한 기간이나 사유를 이유로 여성의 몸을 국가가 통제할 수 있다는 발상이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흔히 절충안처럼 이야기되는 ‘사회경제적 사유’나 주수 제한은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여성을 처벌하겠다는 프레임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좁은 프레임을 통해서는 재생산 권리를 보장할 수 없다.”
임신·출산의 여부, 시기, 빈도를 당사자가 자율적으로 결정할 권리뿐만 아니라 이를 위해 의료 서비스에 접근할 권리를 포함하는 ‘재생산권’은 건강권의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건강권은 임신중지가 불법인 상황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침해받는 권리이기도 하다. 윤정원 녹색병원 산부인과 과장은 “임신중지가 불법화되어 있는 동안 이를 둘러싼 의료체계, 의사와 환자의 관계, 환자의 권리, 임신중지에 대한 여성 스스로의 감정 모두가 왜곡되었다”라고 지적한다.
이 때문에 통합적이고 포괄적인 성교육과 피임, 산부인과 이용 접근권은 물론 임신을 선택한다고 했을 때 필요한 재생산 건강 관련 서비스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안전한 낙태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통해 인공임신중지를 하나의 의료 서비스로 보고 접근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임신과 출산은 여성의 몸에서 시작하지만 여성의 몸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유림 활동가는 재생산을 ‘인간이 다음 인간을 이 세계에 데리고 오는 일’이라고 표현했다. 한 사회의 제도·문화·가치를 생산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넓은 개념일 수밖에 없다. 임신중지를 합법화한 나라에서도 재생산권은 완성된 권리가 아니라 여전히 만들어지는 중이다. 네덜란드·미국·아일랜드 등에서도 공적부조(건강보험)로 임신중지 지원을 금지한다든가, 국가가 승인한 특정 진료소만을 이용해야 한다든가 하는 방식으로 의료 접근권을 낮추는 방향과 방법이 꾸준히 논의된다.
당장 한국이 직면하게 될 문제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보인다. 태아의 생명권이냐 여성의 선택권이냐 하는 이분법적 구도로 협소화해서는 풀 수 없는 문제들이다. 낙태죄 비범죄화를 넘어 재생산권을 보장하라는 이야기는 임신중지가 생명과 선택의 문제가 아닌, 차별을 ‘삭제’하라는 말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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