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11일 미증유의 테러가 미국을 때렸다.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이란·이라크·북한을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꼽았다. 2년 후,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선제공격 전쟁이 시작되었다. 2003년 3월 이라크 전쟁이다. 전쟁은 금방 승리했지만 미국은 전후 안정화에 실패했다. 이라크 전쟁의 피로감이 극에 달한 2008년 정권은 민주당으로 바뀌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이라크 철군을 공약했고 2011년 대규모 전투 병력을 철수했다.

이른바 ‘악의 축’ 중 북한과 이란 두 나라가 남았다. 이 둘의 핵문제는 계속 다루어야 했다. 이라크 지상전에 지친 미국은 군사 옵션 대신 제재와 압박을 구사했다. 그러나 두 나라의 상황은 퍽 다르게 전개되었다. 제재를 강화한 결과 이란에서는 2013년 대선 때 미국과의 대화를 약속한 하산 로하니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여전히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 안에 있고 무기를 완성하지 않았던 이란과 국제사회는 핵 합의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AP Photo트럼프 대통령(왼쪽)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제2차 정상회담 첫날인 2월27일
베트남 하노이 메트로폴 호텔에 도착해 악수를 하고 있다.


북한에 대해서도 제재를 강화했지만 파격적 협상이나 군사적 압박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이른바 ‘전략적 인내’다. 당시 워싱턴 조야에서는 제재를 강화하면 북한 정권이 붕괴할 것이라는 다소 비현실적인 기대가 있었다. 북한은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친위 세력을 강화해가면서 권력을 다졌다. 북한은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실험으로 한반도와 세계를 위협했다. 이즈음 이란은 유럽과 경제협력을 가시화하고 있었다. 이란은 꽃길을, 북한은 험로를 걷는 듯 보였다. 반전이 일어난다.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면서부터다. 2018년 미국은 이란과의 합의를 파기했고, 북한과는 정상회담을 열었다. 개방을 준비하던 이란은 지금 반미 분위기로 가득하고, 북한은 미국과의 새로운 관계를 추구하고 있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북한에 대한 언급은 이례적이다. 김정은 위원장을 자주 상찬한다. 훌륭하고 스마트하다는 칭찬을 넘어서서 급기야 ‘사랑에 빠졌다’는 표현까지 나왔다. 연이은 북·미 정상회담을 보면 보통 공들이는 게 아니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의 눈에 북한은 잔학하고 못 믿을 정권 아니었던가? 자국 본토를 대륙간 탄도미사일로 공격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던 악의 축 아니었던가? 반면 트럼프 대통령은 오바마 정부가 협상을 통해 국제무대로 불러들인 이란을 다시 코너로 몰아붙인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 등 중동의 동맹 국가들과 함께 이란 압박에 몰두한다. 최근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중동평화안보회의와 독일 뮌헨에서 열린 안보대화에서 미국은 이란 비판 수위를 한껏 높이며 파상공세를 퍼부었다.

오바마의 주요 업적 하나씩 뒤집기

이상하지 않은가?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과 이란을 다루는 방식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여전히 핵무기를 갖고 있고, 미사일 기술을 고도화해왔으며, NPT 체제 밖에 있는 북한은 칭찬하고 대화를 한다. 국제사회의 주요 국가들과 합의하고 핵 프로그램을 중단한 이란에게는 가혹한 반(反)이란 노선으로 압박한다. 이란 역시 권위주의 국가이지만 북한과 달리 선거제도가 작동하며, 북한에 비해 국제사회와 훨씬 교류협력이 많은 나라인데 말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트럼프 대통령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의 대북·대이란 전략 이해를 위해 세 가지 키워드를 잡아보았다. ‘파격과 불가측성’ ‘오바마 지우기’ 그리고 ‘재선’이다. 각각의 키워드에 행태·쟁점·목표가 담겨 있다.

트럼프 외교를 읽는 첫 번째 키워드는 ‘파격과 불가측성’이다. 미국은 스스로 자유주의 국제 질서의 선도자를 자처해왔다. 이에 맞춘 주도적 대외 전략을 천명해왔다. 행정부별로 국가안보 전략 보고서에 주요 전략 방향을 담아왔다. 4년마다 국방 전략 보고서를 낸다. 오바마 정부부터는 외교, 개발 전략 보고서도 발간하기 시작했다. 연설을 통해 대통령의 독트린을 내놓는다. 위험한 세력을 적시하고 향후 대응정책을 알리기도 했다. 이런 나라는 미국 외에는 거의 없다. 국가 전략을 적나라하게 밝히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런데도 미국은 비교적 선명하고 자세하게 속내를 밝혀왔다. 이것은 ‘예측 가능성’이라는 공공재를 국제사회에 제공한다는 의미였다. 동맹국은 미국과 공조하고, 적대국은 미국의 의지를 읽으라는 메시지였다. 예측 가능성을 제공할 테니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를 따르라는, 초강대국만이 가질 수 있는 태도다.

 

ⓒAP Photo2015년 7월 이란 핵협상을 타결한 뒤 오스트리아 빈에서 각국 장관과 이란 협상 대표가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달랐다. 외교의 핵심 자산인 동맹을 별로 중시하지 않았다. 심지어 동맹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징후도 눈에 띈다. 설마 했던 일들을 실행한다. 고립주의를 표방하며 변화를 예고했지만 흔드는 폭이 예상보다 더 크다. 미국의 독자 행보로 인해 국제사회가 체감하는 혼란도 그만큼 높아졌다. 그는 체질적으로 게임을 즐기는 협상가다. 유리한 거래를 위해 현란하게 판을 흔들곤 한다. 트럼프 외교에서는 ‘파격’이 상식이고, ‘불가측성’만 예측 가능하다는 우스개가 나온다.

파격과 불가측성은 트럼프 대통령의 사업가적 속성이 반영된 협상의 행태다. 판을 세게 흔들고, 다들 혼란에 빠졌을 때 재빨리 이익을 챙기는 모습이다. 주(駐)이스라엘 대사관 이전 실행, 관계가 틀어진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에 동시 무기 판매, 유럽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란 핵합의 전격 파기 등 일련의 행보에서 드러난다. 북·미 정상회담도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북·미 회담과 이란 핵합의 파기는 이와 같은 협상 행태가 반영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게임을 통해 얻어지는 구체적 이익을 가장 중시하는 그에게 일관성이나 논리적 정합성 또는 투명성보다 중요한 것은 결과다. 역대 미국 외교와 달리, 파격과 불가측성이 그에겐 협상의 자산이다.

두 번째 키워드는 ‘오바마 지우기’다. 파격과 불가측성이 행태를 나타낸다면, 오바마 지우기는 그 동기다. 트럼프 대통령은 오바마 정부의 주요 업적을 하나씩 뒤집었다. 파리 기후변화협정, 쿠바와의 관계 개선, 난민·이민 문제 등에서 전임 정부의 행적과 거꾸로 가고 있다. 특히 이란 핵합의는 오바마 정부의 최대 치적이자 성과였다. 2015년 7월 빈에서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과 독일이 이란과 마주앉아 18일간의 마라톤협상 끝에 맺은 이 합의는 중동의 안정적 세력균형을 위한 장기 포석이었다. 국제사회의 주요 국가들이 오랜만에 합의를 이루어냈다는 자부심도 컸다. 트럼프 대통령은 오바마 정부의 자산인 이 합의를 파기했다. 유럽 동맹과의 신뢰를 해친다는 이유로 당시 국방장관 제임스 매티스 등 전략가들이 반대했음에도 그는 가차 없이 합의 파기와 함께 제재를 복원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공을 들이는 북·미 대화도 오바마 지우기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오바마 정부가 이란과 쓸데없이 잘못된 협상에 덜컥 합의한 것을 자신이 바로잡았다고 믿는 트럼프 대통령이다. 반면 그는 북한에 대해선 오바마 정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하는 듯하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을 수수방관했던 오바마 전 대통령과 자신은 다르다고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홀로 모든 책임을 지는 개발 사업가 출신이다. 그는 권위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별로 없어 보인다. 자유민주주주의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부담을 상대적으로 덜 느끼는 건 아닐까? 오히려 ‘스트롱맨’들에 대한 감정이입이 더 커 보일 때도 있다. 동맹에 대한 애정은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영국·프랑스·독일 등 대서양 유럽 동맹 국가들이 한사코 이란 핵합의 파기 결정을 반대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일본 등의 우려도 그다지 괘념치 않는 분위기다.

 

ⓒAP Photo2017년 12월 이란 테헤란에서 시위대가 구호를 외치고 있다.
시위대는 2015년 핵 합의에도 경제적으로 상황이 개선되지 않고 있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오바마 지우기로만 트럼프 대통령의 이란, 북한 정책을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아무리 개인적 동기가 작동한다고 해도 나름의 계산과 목표는 있기 마련이다. 이란과 북한을 다루는 트럼프 대통령의 셈법은 무엇일까? 바로 2020년 재선 승리라는 목표와 연결된다. 이것이 세 번째 키워드다. 트럼프 대통령은 가장 난제라 할 수 있는 이란, 북한 문제의 성과를 들고 대선에 임하고픈 의지가 강해 보인다. 러시아 스캔들이나 정부 셧다운 등의 쟁점으로 의회·언론과 싸우며 국내 정치에서 어려움을 겪는 그에게 대외 정책의 극적 성과는 꽤 매력적일 것이다.

현 시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 정권의 교체나 민주화를 추진한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란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나라가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도 잘 안다. 그는 일단 이란이 미국에 대폭 양보하는 모습을 국제사회에 보여주고 싶을 것이다. 즉 오바마 정부가 조급하게 맺은 합의를 자신이 당당히 파기하고 이란을 굴복시켜 훨씬 나은 트럼프판 새 합의를 세상에 내놓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란 핵합의 파기를 선언하면서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재협상 조건 12개를 내걸었다. 일부는 주권 문제에 걸리는 사안이므로 이란은 거세게 반발했다. 이란은 역으로 6개의 재협상 조건을 던졌다. 액면만 보면 강대강 국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미국이 판을 깨고 나가면서도 재협상 여지를 남겨놓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는 서두를 이유가 없다

이란의 현 상황은 녹록지 않다. 아야톨라 하메네이 최고지도자와 하산 로하니 대통령은 2015년 핵합의 이전의 저항경제로 돌아가 항전하자며 독려하지만 경제 상황은 악화 일로다. 체제를 지지했던 빈곤층마저 경제난으로 시위에 나서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빈자들의 민심 이반은 체제 위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이란은 현 상황을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면밀히 검토할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 등 우회로를 모색하고 있지만 한계는 분명하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임계점에 가까워지면 미국과의 재협상을 추진할 여지가 있는 셈이다.

북한 역시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도전적이지만 꽤 매력적인 사안이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핵실험과 미사일 실험을 지속하며 국제 정세의 불안을 고조시키던 국면을 자신이 반전시켰다고 믿기 때문이다. 만일 비핵화 성과를 얻고 국제사회에서 가장 다루기 힘든 음험한 공화국을 정상국가로 변화시킨다고 상상해보라. 평양에 트럼프타워라도 세워지며 개혁과 개방이 시작된다면? 어떤 대통령도 이룩하지 못했던 외교적 업적이다.

물론 현시점에서 북한의 속내를 정확히 가늠하기는 어렵다. 어렵게 획득한 핵 자산을 쉽게 포기할 리는 없다. 북한의 경제 상황이나 권력층의 인적 변동 등 여러 변수가 이전과는 다른 양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이 지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승부욕이 작동하는 것 같다. 기존 행태를 생각하면 북한을 절대 믿을 수 없다는 숱한 전문가들의 의심과 반대를 무릅쓰고 그가 북·미 협상에 나선 이유는 가장 어려운 딜을 성사시키고 싶은 협상가로서의 DNA 때문일 것이다.

이는 당연히 재선의 자산이 된다는 계산과도 연결된다. 핵 문제로 세상의 이목을 끄는 이란과 북한 두 나라에서의 성과를 내세우고 싶은 것이다. 만일 이란이 미국의 재협상 조건을 어느 정도 받아들여 새 협상을 수용한다면, 그리고 북한 비핵화의 가시적 성과를 얻는다면 대단한 일임에 틀림없다. 하나는 강고한 압박으로, 하나는 끈질긴 협상으로 이전 정부와는 완연히 다른 트럼프 대통령 자신만의 업적을 쌓는 것이다. 악의 축 세 나라 중 이란과 북한을 자기 계산대로 이끌어낼 수 있다면 21세기 최대 치적이라고 홍보하고도 남는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대선 캠페인 열기가 고조되는 앞으로의 1년 반이 중요하다. 짧지 않은 시간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서두를 이유가 없다. 자기 호흡으로 이란 압박, 북·미 대화의 구도를 다뤄나갈 가능성이 높다. 차기 대통령 선거 캠페인 절정기에 승부를 보려 할 것이다. 조금씩 상황을 고조시키다가 1년여가 지날 무렵, 내년 중반 즈음 극적 타결의 현장을 미국 유권자들에게 보여주려 하지 않을까?

물론 트럼프 대통령의 기대대로 진행되지 않을 가능성도 분명히 있다. 이 경우에도 그에게 이란과 북한은 다르다. 이란 문제는 그로서는 크게 잃을 것이 없다. 이란이 한층 양보한 새 협상에 나선다면 그것으로 좋다. 이란이 끝까지 항거에 나서면? 그때는 그 위험한 나라를 응징하는 자신의 이미지를 더욱 강조할 것이다. 이란 경제 상황 붕괴로 정치 변동 가능성이 높아지면 이란 체제 교체 압박을 자신의 치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북한 비핵화 협상이 지지부진하거나 중단되는 경우에는 타격이 있다. 애초부터 믿지 못할 정권과 대화를 했다는 비판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자신은 미국의 안전을 위해 협상가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는 이미지를 내세우겠지만, 그 후폭풍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한반도 위기로 이어질 수도 있다.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보다 북한에 더 공을 들이려 할 것이다. 우리 정부가 최선을 다해 북·미를 중재하고 평화 국면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선과 악의 구도 혹은 동맹과 적대 관계를 뛰어넘어, 이익 추구에 진력하는 미국 대통령의 모습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다. 그가 구사하는 파격과 불가측성의 외교 행태가 과연 오랜 분쟁의 땅 한반도와 중동에서 평화의 길을 열어낼 수 있을까? 자칫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위기와 갈등의 시간이 다시 도래하지는 않을까? 두려움 속에서도 기대를 부여잡게 되는 2019년이다.

기자명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