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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 없는 세상’ 향해 일리 있는 ‘그림 투쟁’

김연희 기자 uni@sisain.co.kr 2019년 03월 06일 수요일 제59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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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이명익
상가임대차 문제에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 공기씨(본명 한소영· 26)는 낯익은 얼굴이다.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여러 번 봤다. 을지면옥이 사라질 위기에 놓여 화제가 됐던 서울 청계천·을지로 일대 재개발부터 멀게는 2010년 두리반 투쟁까지, 그는 임차인과 세입자들이 권리를 찾기 위해 싸우는 현장에 늘 함께했다. 2009년 용산 참사 이후 연대자로서 여러 투쟁에 참여했고 2016년부터는 ‘맘편히 장사하고픈 상인모임(맘상모)’에서 상임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그가 만화를 그렸다. <일리 없는 세상>. 부제는 ‘공간을 빌려 쓰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맘상모 활동을 하면서 보게 된 ‘일리 없는’ 일들, 세입자들이 겪는 부당한 일들을 하나의 우화에 담았다. 주인공 ‘일리’는 임차 상인이자 세입자이다. 빌린 건물 2층에 거주하며 1층에서 꽃집을 운영한다. 그러던 어느 날 꽃집으로 내용증명 한 통이 배달된다. ‘본 건물이 새 주인에게 양도되었음을 알려드린다.’ 이 짧은 문장이 일리의 일상에 미치는 파장은 길고도 익숙하다.

공기씨는 원래 ‘끼적이는 것’을 좋아했다. 지난해 여름 우연한 기회에 본격적으로 만화를 배우게 됐다. 처음 그리는 만화의 소재는 임대차 분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뚜렷하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한국은 자영업자 비율이 높은데 정작 사람들이 감정이입을 하는 대상은 임차인이 아니라 건물주예요. 자기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죠. ‘쫓겨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다. 특수한 경우가 아니다’라는 걸 알리고 싶었어요.” 만화의 배경을 꽃집으로 정한 데에도 이유가 있다. “꽃을 팔기 위해서는 꽃을 키우고 가꾸는 과정이 필요하잖아요. 손님에게는 물건을 사고파는 순간만 보이지만 가게가 자리 잡기까지 보이지 않는 노력이 있다는 걸 표현하고 싶었어요.”

<일리 없는 세상>의 직접적인 모티브가 된 건 서촌 궁중족발 사건이다. ‘서촌’이라 불리는 서울 종로구 체부동 일대가 뜨면서 2016년, 7년간 궁중족발이 장사를 했던 건물의 주인이 바뀐다. 새 건물주는 보증금을 3000만원에서 1억원으로, 월세를 300만원에서 1200만원으로 올린다. 궁중족발 사장 부부는 이 금액을 감당할 수 없었다. 퇴거 명령과 불응, 강제집행 12회. 2년간 이어진 갈등 끝에 ‘궁중족발’ 간판은 내려간다.

현실판 ‘일리’인 궁중족발 사장은 구치소에 수감돼 있다. 족발집에서 간판이 내려진 다음 날 건물주를 찾아가 망치를 휘둘렀다. 1심에서 징역 2년6개월을 선고받았고 현재 2심이 진행 중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지지부진하던 상가임대차보호법 개정 논의가 본격화됐다. 지난해 9월 계약갱신요구권 행사 기간을 5년에서 10년으로 연장하는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공기씨는 종종 궁중족발 사장을 면회하러 간다. “‘궁중족발법’이라 불릴 만한데 정작 사장님 부부는 얻은 것이 없어요. 같은 장소는 아니더라도 다시 장사를 할 수 있도록 도와야죠.”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 텀블벅에서 3월10일까지 <일리 없는 세상> 출판 펀딩이 진행된다(tumblbug.com/airrico _one). 펀딩 금액 가운데 일부는 궁중족발 후원에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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