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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버에게 나무늘보처럼 움직이라니…

왈츠를 출 때는 ‘황산을 실은 배’처럼 부드럽게 움직이고, ‘남자보다 천천히’ 스텝을 밟아야 한다. ‘직진순재’ 스타일인 나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영미 (대중문화 평론가) webmaster@sisain.co.kr 2019년 02월 28일 목요일 제59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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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에서는 세자빈이나 중전으로 간택되어 처음 입궁한 여자들에게 걸음걸이를 가르치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양 어깨에 사기그릇을 올려놓고 떨어뜨리지 않고 걷도록 훈련시키는 장면 말이다. 진짜 궁에서 그렇게 가르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튼 인간이 몸을 출렁거리지 않고 걷기가 참으로 힘든 것만은 확실하다.

그런데 왈츠가 꼭 그렇다. 선생님은 왈츠를 출 때 ‘황산을 실은 배’처럼 움직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좌우로 걷고 몸을 위로 세웠다가 아래로 내리는 동작을 하면서도 상체의 모양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출렁거리지 않도록 부드럽게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엄청나게 멋진 말이긴 하다. 그게 얼마나 긴장되고 힘든 일이면 이런 비유가 나왔겠는가.


나한테는 또 하나의 조언이 아주 힘들었다. 왈츠 추기는 ‘나무늘보 되기’란다. 나무늘보는, 나무에 매달려서 하루에 18시간쯤 자고 아주 게으르게 천천히 움직이는 동물이다. 참고로 내 직장 상사가 나에게 붙여준 별명은 비버였다. 어디서든 부지런히 나뭇가지를 자르고 댐을 만들고 집 짓고, 힘들면 숨을 헐떡이면서 나무 위에서 조금 쉬고서는 또 바로 일하는 동물이다. 연구실 이사 때 다른 사람은 짐 풀고 책꽂이 정리에 어수선한데, 나는 이미 중요한 몇 박스를 다 풀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글을 쓰고 있었더니 그런 별명을 붙여주었다. 비버에게 나무늘보처럼 움직이라니, 이건 정말 ‘미션 임파서블’이다. 그냥 동작을 느리게 하는 건 연습하면 할 수 있다. 문제의 핵심은 그냥 ‘느리게’가 아니라, ‘남자보다 천천히’이다.

ⓒ이우일 그림

모든 커플댄스는 남자가 움직임의 사인을 내리면 여자가 그 사인을 받아 움직인다. 그래서 프리댄스가 가능해진다. 순서를 정해놓지 않아도, 남자가 어떤 동작을 할 것인지 여자에게 알려줌으로써 둘이 함께 합을 맞춰 움직이는 게 가능해지는 것이다. 라틴댄스에서는 그 사인이 눈으로 보이거나 손으로 느껴질 정도로 분명하다. 자이브에서 남자가 머리 위로 손을 뻗어 올리고 나면 ‘스톱 앤드 고’ 동작을 하라는 것이고, 남자가 자기 허리에 손을 대면서 돌면 ‘토 힐 스위블’을 하라는 것이다. 룸바와 차차차에서는 여자가 움직일 방향을 남자의 손가락이 미리 알려준다. 손을 꽉 잡은 상태에서 여자가 방향을 바꾸면 손이 꼬이므로, 남자가 손잡는 형태를 미리 바꾸어줌으로써 여자의 방향 전환을 쉽게 해주는 것이다. 방향이란 오른쪽 아니면 왼쪽이니, 손가락의 움직임만으로 남자가 요구하는 방향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왈츠는 전혀 다르다. 눈이나 손으로 미리 명확하게 사인을 내리지 못한다. 남녀가 배를 밀착시킨 채,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함께 움직이려면, 도대체 사인을 어떻게 주고받을까? 놀랍게도 서로 밀착한 배이다. 남자가 살짝 몸통의 방향을 바꾸는 것을 순간적으로 여자가 밀착한 배의 느낌으로 알아채고 눈치 빠르게 거기에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맙소사! 이게 가능해?

밀착한 배의 느낌으로 순식간에 남자의 신호 알아채야


이게 가능하려면 여자는 남자의 움직임을 순간적으로 재빨리 알아채야 한다. 0.1초 만에 알아채야 한다는 게 과장이 아니다. 눈치는 엄청 빨라야 하지만 남자보다 먼저 움직일 수는 없다. 늘 0.1초 늦게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우아하고 천천히 왈츠 음악에 몸을 실어야 한다.

나는 남 눈치 보는 것, 남 따라가는 것, 그러면서도 남과 호흡을 맞춰 느릿느릿 움직이는 것, 그 모든 게 다 안 되는 사람이다. 나는 원래 눈치가 없다. 거의 빵점 수준이다. 그냥 눈치 보지 않고, 가야 하는 방향이 정해지면 직진한다. <꽃보다 할배>에 나오는 ‘직진순재’ 스타일이 바로 나다. 남보다 먼저 빨리 결정내리고 먼저 움직이는 스타일이다. 리더가 결정하는 것을 따라가야 하는 위치에 있을 때에도 “리더가 결정을 내리셔야 저희가 움직입니다”라는 재촉의 말을 먼저 입으로 뱉어버린다(굼뜬 사람이 나 같은 사람과 함께 일하면 정말 피곤할 거다. 나도 안다).

루틴(기본춤)을 배울 때에는 눈치 없이 여자가 먼저 움직이는 게 그렇게 치명적이지는 않다. 동작의 순서가 다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남자가 사인을 주지 않아도 음악에 맞춰 그다음 동작으로 움직이면 틀리지 않는다. 문제는 프리댄스이다. 남자가 다음 동작을 결정하고 움직이는데 그걸 미리 여자가 알 도리가 없지 않은가. 아주 살짝 몸을 틀거나, 살짝 몸을 업(up)하는 것을 여자가 순간적으로 빨리 알아차려야 한다. 그리고 그걸 알아챌 때까지는 먼저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왈츠 연습도 일단 루틴을 A 코스부터 E 코스까지 배우는 것이었다. 라틴댄스에서처럼 그게 끝인 줄 알았다. 그런데 시작이었다. 루틴을 다 배운 다음부터 남자가 무작위로 주는 사인을 받는 연습을 한다. 눈치껏 알아채는 훈련이다.

처음에는 사인을 매번 알아채지 못해 두 동작을 이어가지 못했다. 자세가 올바르지 못하니 사인 받는 것이 더욱 힘들었다. 무조건 내 몸통을 남자의 몸통에 붙여야 했다. 그러면서 남자의 손과 팔을 잡은 내 오른팔과 왼팔에 적당한 긴장을 주어야 한다. 몸과 두 팔로 팽팽하게 삼각형을 유지할 때 비로소 남자의 사인을 제대로 알아챌 수 있다. 프리댄스 훈련을 하니 다시 기본자세의 중요성을 알게 됐다.

중요한 또 한 가지. 섣불리 짐작하고 먼저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음악이 흘러가도 남자가 조금 느리게 움직일 수도 있다. 나는 음악이 흘러가면 그것에 맞춰 그냥 먼저 발을 내딛기가 일쑤였다. 마치 “왜 안 가는 거야?”라며 상대방을 재촉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 춤은 깨진다.

남자의 훈련은, 빠르게 상황을 판단하고 사인을 주는 연습 과정이다. 홀에서 다른 커플이나 벽 같은 장애물과 부딪치지 않게 상황을 파악하며 동작 사인을 주어야 한다. 어영부영 사인을 주거나 타이밍을 놓치면 여자가 알아채지 못하므로 정확하게 사인을 주는 훈련을 반복한다. 아마 엄청 힘들 거다. 게다가 파트너가 초보이거나 기운 없이 남자에게 몸을 의존하면 여자를 떠메고 다니는 꼴이다. 이럴 때 남자들은 이렇게 말한단다. “어우, 리어카 끄느라 혼났어.”

두 동작을 이어가지 못하고 계속 틀릴 때에는 “정말 이게 가능하긴 한 거야?” 싶었다. 희한하게도 몇 주일, 몇 달이 지나면서 두 동작에서 세 동작으로, 다시 너덧 동작으로 연결하며 춤추는 것이 가능해졌다. 남자의 몸통 움직임을 조금씩 알아채고 내 몸도 그렇게 움직였다. 나중에는 3분 정도의 곡을 거의 틀리지 않고 추게 되었다. 왈츠를 시작한 지 1년 반 정도가 지나고야 가능해진 일이다.

하지만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지금도 나는 “어디로 갈지는 남자 맘이에요. 왜 미리 움직여요?”라는 주의를 자꾸 받는다. 나는 “제가 지나치게 주체적이어서요. 남 따라 움직이는 걸 해보질 않았거든요”라며 웃어넘긴다. 비버와 함께 일하는 주위의 나무늘보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춤을 추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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