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ck 3d gpu
바로가기
메뉴로 이동
본문으로 이동

체육계 최고 실세 전무, 견제 수단은 ‘전무’

한국 체육계에선 협회나 연맹의 전무이사에게 권한이 집중된다. 예산 편성부터 국가대표 선발까지 도맡지만, 감시와 견제가 작동하지 않는다. 개인에게 휘둘리지 않는 시스템이 절실하다.

김연희 기자 uni@sisain.co.kr 2019년 02월 25일 월요일 제597호
댓글 0
스포츠계 미투가 스포츠 개혁 움직임으로 이어지고 있다. 정부는 1월25일 ‘(성)폭력 등 체육계 비리 근절대책’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스포츠 인권침해 실태를 조사할 ‘스포츠인권특별조사단’이 국가인권위원회에 설치돼 2월25일부터 1년간 운영된다. 또 민간위원을 중심으로 체육계 구조 개혁을 추진할 ‘스포츠혁신위원회’도 활동을 시작했다.

방점은 ‘근본적인 대책 마련’에 찍힌다. 익숙한 절망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체육계 성폭력은 11년 전에도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다. 당시 여자 프로농구 팀 성폭력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르며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이어졌고, 정부와 대한체육회는 재발방지책을 쏟아냈다. 하지만 적폐를 뿌리 뽑지도, 추가 피해를 막지도 못했다.

심석희 선수의 고발 이후 조재범 전 쇼트트랙 국가대표 코치와 함께 전명규 한국체대(한체대) 교수의 이름이 언급되는 건 상징적이다. 1월21일 ‘젊은빙상인연대’는 ‘빙상계 성폭력, 누가 침묵을 강요했는가’라는 기자회견에서 그 책임자로 전 교수를 지목했다. 직접적인 가해자는 조재범 전 코치이지만 구타와 성폭력이 은폐되는 구조를 전명규 교수가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수년간 그는 ‘빙상계 대부’로 불리며 시스템을 무력화하는 은밀한 권력을 대표하는 이름이 됐다.
ⓒ시사IN 이명익
전명규 한국체대 교수가 1월21일 빙상계 성폭력 사태와 관련해 입장을 밝히고 있다.

승부 조작, 짬짜미, 훈련 특혜 등 빙상계의 기형적인 문제가 지적될 때마다 ‘전명규 체제’는 오히려 강화됐다. 전 교수는 논란이 생기면 잠시 직책을 내려놓았다가 다시 돌아왔다. 대한빙상경기연맹 전무에서 부회장으로 급을 높이는 식이었다. 반면 반기를 든 이들은 영원히 퇴출당했다. 전 교수뿐만 아니라 그가 챙기는 ‘전명규 사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재범 전 코치의 성폭력 의혹이 폭로된 이후 한체대 소속 선수와 강습생 학부모 사이에 조 전 코치를 두둔하는 취지의 문자메시지가 퍼졌다. 심석희 선수의 주장은 거짓말이며 젊은빙상인연대 대표를 맡은 여준형 전 코치는 쇼트트랙계의 낙오자라는 내용이었다. 이 문자가 돌기 시작한 건 전명규 교수가 반박 기자회견을 연 바로 다음 날이었다.

‘2008년 개혁’은 이러한 전횡을 끊어내지 못했다. 독점 권력은 감시와 견제의 무풍지대에 놓인다. 종목 내 비리를 고발해도 은폐되는 일이 반복되면서 권력은 더 비대해지고, 개혁을 모색하려는 시도는 싹을 감춘다. 이 권력은 전명규 교수만의 것이 아니다. 쇼트트랙은 한국 체육계의 전형을 보여주는 예시일 뿐이다. 종목을 불문하고 체육단체를 특정 인물이 독점하는 조직 사유화는 만성질환에 가깝다.

열악한 재정 탓에 개인에게 권력 집중


2016년 문화체육관광부가 발간한 <스포츠 비리 사례집>에 따르면 2014년부터 2016년 6월까지 스포츠 비리센터에 접수된 비리 가운데 ‘조직 사유화’ 관련 신고가 가장 많았다. 총 580건 가운데 조직 사유화가 35%(205건)를 차지했으며 승부 조작(12%), 성폭력을 포함한 폭력(4%), 입시 비리(3%)가 뒤를 이었다(기타 46%).
ⓒ연합뉴스
1월10일 열린 ‘스포츠계 성폭력 문제 재발 방지 촉구’ 기자회견 모습.

대한수영연맹은 또 다른 예시이다. 15년간 전무이사로 재직하며 수영연맹을 좌지우지했던 정일청 전 전무는 2016년 구속 기소돼 실형을 선고받았다. 국가대표 선수 선발과 수영연맹 임원 선임 과정에서 3억원가량의 뒷돈을 챙긴 혐의였다. 수영연맹은 2013년 전국수영대회에서 여자 탈의실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한 고등학교 수구 선수들을 영구 제명했으나 고작 6개월 뒤 징계를 풀어주기도 했다.

스포츠 심리 전문가로 스포츠 현장에서 선수들과 지도자들을 코치해온 정용철 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는 조직 사유화가 되풀이되는 근본 이유를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타고난 악당이라서 전횡을 휘두르는 게 아니다. 그런 접근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특정 1인에게 권력이 쏠리고, 그를 괴물로 진화시키는 체육계의 구조가 있다.” 정 교수는 지난해 12월 여자 국가대표 컬링팀 ‘팀 킴’의 폭로로 김경두 전 대한컬링경기연맹 부회장과 그 가족의 전횡이 드러났을 때도 이는 한국 체육계에서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이 구조란 무엇일까? 한국 체육계에서는 종목별 협회나 연맹의 전무이사 혹은 실무 부회장(이하 전무이사로 통칭)에게 거의 모든 권한이 집중된다. 대부분의 체육단체에서 전무는 예산 편성 등 협회 운영뿐만 아니라 코치·감독 선임, 국가대표 선발까지 도맡고 있다. 4년 전까지는 징계를 결정하는 상벌위원회에도 전무이사가 들어갔다. 2014년 상벌위원회가 스포츠공정위원회로 바뀌면서 위원 전원을 협회 외부 인사로 채우도록 규정이 만들어졌지만 이 위원들을 선임하는 업무는 여전히 전무이사의 몫이다.

오랫동안 스포츠 개혁에 뜻을 같이해온 ㄱ씨는 얼마 전 한 체육단체의 전무이사가 됐다. 그는 자신이 가지게 된 권력의 크기에 스스로 놀랐다고 말했다. “내가 권력을 악용하면 고등학교 감독 하나 옷 벗기는 건 일도 아니다. 5년 이상 전무를 하면 말이 전무이지 실질적으로 그 종목의 왕이 된다.”

ㄱ씨는 그 원인으로 매우 현실적인 지점을 지적했다. 바로 ‘돈’이다. “대한체육회나 시도 체육회 아래에 있는 협회와 연맹 가운데 극소수를 빼면 모두 재정이 열악하다.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한두 사람이 단체를 운영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전무이사이다. 그 자리에 앉으면 협회 내 거의 모든 사안의 결정 권한을 가진다.”

체육계 인사들은 이 같은 전횡에서 거의 유일하게 자유로운 단체로 대한양궁협회를 꼽는다. 양궁계에도 전명규 교수 못지않게 뛰어난 성적을 낸 지도자가 있지만 협회를 장악하지 못한다. 허정훈 중앙대 체육과 교수는 “양궁은 다른 종목이라면 1인이 쥐고 있을 권력이 분산돼 있다”라고 말했다. 대표적인 예가 국가대표 선발 시스템이다. 양궁은 금메달리스트이든 고등학생이든 상관없이 총 4000여 발을 쏴서 그 성적에 따라 국가대표가 정해진다. 특정인의 영향력이 개입될 가능성을 제도적으로 차단한 것이다. 스폰서인 현대자동차가 제공하는 안정적인 지원도 양궁협회가 공정한 제도를 정착시키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한 체육계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체육단체가 건강한 조직을 만드는 데 (양궁처럼) 기업의 호의에만 기대는 건 복권에 당첨되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이번에 출범한 ‘스포츠인권특별조사단’과 ‘스포츠혁신위원회’는 11년 전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개인에게 휘둘리지 않는 튼튼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은 스포츠 개혁의 필수 과제다.
<저작권자 ⓒ 시사IN (http://www.sisai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