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졸업한 고등학교 교칙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했다. 양말은 흰색으로 발목을 꼭 두 번 접어야 한다거나, 머리핀은 검정색으로 3개 이상 꽂을 수 없다거나, 한여름에도 브래지어 위에 캐미솔을 챙겨 입어야 하는데 무조건 흰색으로 입어야 한다거나(심지어 검사했다), 걸으면서 음식물을 섭취해서는 안 된다거나…. 물론 나는 ‘성실하게’ 교칙을 어기는 학생 중 한 명이었다.
〈훈의 시대〉를 읽다 말고 졸업한 지 15년 만에 처음으로 모교 홈페이지를 찾았다. 3년간 지겹게 보고 불렀을 교훈과 교가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9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학교여서, 책 속에 나열된 학교들처럼 ‘헛소리’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순결함은 우리의 자랑(춘천여고)” “순결, 검소, 예절 바른 한국 여성(학성여고)” 같은 소리 하고 있으면 어쩌지…. 다행히 교훈은 무난한 ‘근면·성실’이었고 인왕산·무악재·원수봉·홍제원 등 각종 지명이 난무한 교가는 3절에 이르러 ‘언제나 배우는 길’을 강조하고 있었다. 기억이 나지 않을 만한 내용이었다.
저자는 〈훈의 시대〉를 통해 학교와 회사와 아파트라는 공간을 지배하는 ‘훈(訓)’을 폭로한다. 이를 통해 “물리적인 폭력보다도 오히려 규정된 언어의 영향력이 더욱 광범위하게 한 시대를 지배(25쪽)”하고 있음을 증명해나간다. 먼지 냄새 풀풀 나는 낡은 ‘훈’에 물음표를 들이댄다. 시대에 맞지 않는 훈은 폐기하고, 변화를 선행하는 훈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직의 개인은 몸과 말의 통제를 겪는다. 그러나 한 개인이 가진 사유하는 힘은 그 누구도 검열하고 통제할 수 없다. (중략) 우리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편해하고 물음표를 가져야 한다(244쪽).” 저자의 전작인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은행나무, 2015)와 〈대리사회〉(와이즈베리, 2016)의 연장선에 〈훈의 시대〉를 놓아본다. ‘나’는 ‘사회’에서 ‘시대’로 확장된다. 이 세 권을 ‘김민섭 3부작’이라고 불러도 무리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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