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1949년이었다. 발레리나가 되고 싶어서 집을 나온 열일곱 살 여성이 자신보다 열 살 많은 의대생과 사랑에 빠졌다. 남자가 곧 군에 입대하면서 둘은 멀어졌다. 몇 해 뒤 재회했고 다시 사랑에 빠졌다. 결혼했다. 아들을 낳았다. 싸웠다. 이혼했다. 남자는 폴란드를 탈출한 뒤 독일에서 재혼했고, 여자도 영국 남자와 재혼해 런던에 정착했다. 열네 살짜리 아들과 함께.

몇 해가 흘러 또 마주치게 되었다. 독일과 영국에 떨어져 살던 두 사람이 어떻게 다시 만났는지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지만, 만나자마자 곧 다시 사랑에 빠진 건 이제 별로 놀랄 일도 아니었다. 각자의 파트너를 차버리고 재결합했다. 다시 싸움이 시작되었고, 헤어지기도 몇 번 거듭했다. 그러다가도 결국엔 서로를 잊지 못해 돌아왔다. 그렇게 40년 동안 이어진 ‘전쟁 같은 사랑’을 뒤로한 채 함께 생을 마감했다. 남자 나이 예순일곱, 여자 나이 쉰일곱 살 때였다.

다시 한번 상기시키자면, 둘 사이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엄마 아빠의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아들이 함께했던 시간이 쉽게 잊힐 리 없다. 커서 영화감독이 된 아들에겐 “언젠가 반드시 영화로 만들어야 할 이야기”였다. 다섯 번째 극영화 연출작 〈이다〉(2013)가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받은 뒤, 이제는 때가 왔다고 느꼈다. 그가 하지 않으면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사랑 이야기를 각색해 마침내 영화로 만들었다.

영화 〈콜드 워〉는 1949년 폴란드에서 시작된다. 가수를 꿈꾸는 줄라(요안나 쿨리크)와 성공한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 빅토르(토마시 코트).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숨 막히는 스탈린 시대 폴란드에서 함께 벗어날 방도를 찾는다. 그렇게 찾아낸 절호의 기회. 1952년 베를린의 어느 밤. 약속 장소에서 초조하게 줄라를 기다리는 빅토르. 사랑의 도피는 성공할 수 있을까.그래픽노블 같은 흑백 영상의 질감

줄거리만 보면 흔한 통속 소설의 뻔한 이야기 같지만, 막상 영화를 보니 한 순간도 흔하지 않고 한 장면도 뻔하지 않았다. 4:3 비율의 레트로 무드 화면에 담긴 둘의 사랑이 그저 아름답고 애틋할 뿐이었다. 때론 창백하게 때론 화사하게 느껴지는 흑백 영상의 질감은 마치 우아하고 세련된 그래픽노블 같았다. 그리고 음악. 폴란드 민속음악에서 로큰롤, 재즈, 클래식을 넘나들며 영화 전체를 마치 5막 구성의 오페라처럼 보이게 만든 솜씨 좋은 선곡. 특히 엔딩크레디트 위로 안개처럼 번져나가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중 아리아’가 지금도 귓가를 맴돈다. 가슴에 멍처럼 새겨지고 만 이 영화의 라스트신이, 글렌 굴드의 그 피아노 연주를 따라 점점 더 선명해진다.

영화란 결국, 눈으로 매혹당하고 귀로 사랑에 빠지는 매체라는 걸 입증하는 또 한 편의 마스터피스. 〈콜드 워〉는 올해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이면서 감독상과 촬영상 후보에도 올랐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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