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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아닌 일본, 류큐 왕국의 수난

탁재형 (팟캐스트 <탁PD의 여행수다> 진행자) webmaster@sisain.co.kr 2019년 02월 14일 목요일 제59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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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A
오키나와 나하의 슈리성에서 열린 류큐 왕조의 전통 새해 의식.
오키나와 나하(那覇) 중심부에 있는 슈리(首里)성에는 200여 년 전, 성에서 열렸던 행사를 재현해놓은 미니어처가 있다. 전통적인 일본 군주 복장이라기보다는, 어딘지 한국이나 중국 복장을 닮은 차림을 한 왕이 궁정 한가운데에 서 있고, 그 앞에 장막이 쳐진 단 위에 중국에서 온 사신 두 명이 앉아 있는 모습이다. 왕의 부하들은 멀찍이 물러선 채 무릎을 꿇고 있다. 오롯이 왕 혼자서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는 풍경이다. 이 모습은 오키나와의 옛 이름인 류큐(琉球) 왕국의 왕이 새로 즉위한 뒤, 명나라 천자로부터 책봉서를 받는 모습을 재현해놓은 것이다. 명나라와 조선, 그리고 일본 사이에서 중계무역으로 번성했던 과거의 영화, 그 틈바구니에서 류큐의 지배층이 감내해야 했던 고충이 그대로 묻어난다.

오키나와 고유어와 일본 표준어는 ‘완전히 다른 언어’


류큐는 17세기 초에 일본 사쓰마 번의 침입을 받은 후 일본의 속령 신세가 되었다. 완전히 일본령으로 편입시키지 않았던 것은, 중국에서 진귀한 물건이 들어오는 류큐의 사신 무역을 유지하는 편이 일본에 이익이었기 때문이다. 류큐는 명나라와 사쓰마, 그리고 에도 막부에 삼중으로 복속된 힘든 나날을 보내게 된다. 이름뿐인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세월도 잠시, 1872년 류큐는 일본 제국에 의해 왕국에서 일개 번으로 떨어졌다. 7년 뒤에는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왕마저 본토로 압송되어 후작으로 강등되었다.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가 다스리는 ‘오키나와 현’으로 일본의 일부가 된 게 이 시기다.

독립국가로 지낸 세월이 훨씬 길었던 오키나와 문화는 일본 본토와 차이가 많다. 언어부터 다르다. 일본 표준어와 오키나와 고유어 사이에는 한국 표준말과 제주어 사이의 간극보다 훨씬 더 큰 차이가 존재한다. 아예 문법 체계가 다른 타국어다. 지금의 젊은 세대야 표준 일본어를 구사하는 데 무리가 없지만, 나이 든 세대가 고유어로 말하면 본토에서 온 사람들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고 한다. 건축양식이나 전통 복식 역시 일본 것이라기보다 중국과 조선, 일본의 것을 두루 합쳐놓은 듯 보인다. 토박이 얼굴 역시, 일본인에 비해 둥그스름한 느낌을 준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향하던 1944년, 오키나와는 태평양을 다스리는 일본 해군의 전진기지로서 미군의 공격 목표가 된다. 1944년 10월10일, 대규모 공습을 시작으로 ‘아이스버그’ 작전이 개시되었고, 이듬해 4월1일 본격적인 상륙이 시작된다. 18만명이 넘는 연합군 병력이 동원된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해안 동굴과 류큐 왕국의 석조 요새를 방패 삼아 저항을 지속했다. 오키나와의 소년·소녀들을 징발해 전선으로 내몰았을 뿐 아니라 민간인에게도 ‘항복할 바에는 자결하라’고 강요하기까지 했다. 그 결과, 전투가 끝난 뒤 일본군 7만7000여 명이 사망한 것에 비해 오키나와 민간인들은 12만명이 넘게 목숨을 잃었다. 이런 비상식적인 저항은 이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투하하기로 결정하는 근거가 되었다.

종전 이후, 오키나와는 미국의 태평양 지배를 굳건히 하는 군사기지로 미국령에 편입되었다가, 1972년 일본 품으로 돌아갔다. 여전히 태평양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미군의 근거지 구실을 한다. 오늘도 민간과 군이 함께 쓰는 나하 공항의 활주로에는 관광객을 실은 여객기와 최신예 전폭기들이 번갈아 뜨고 내린다. 일본 아닌 일본, 류큐 왕국의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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