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은 읽은 책에 대해 샅샅이 말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런 일은 가능하지 않다. 디스코텍 천장에 달려 있는 미러볼(mirror ball)이 무수히 많은 작은 거울 조각으로 이루어진 구체(球體)이듯, 텍스트 역시 여러 주제와 화제로 만들어진 다면적인 의미체다. 하므로 그 어떤 독후감도 그 책의 전체를 말한 것이 아니다. 한 번으로 전모가 파악되는 텍스트는 없으며, 여러 번을 통해서도 전모를 구할 수 없는 것이 텍스트다. 책은 무수하게 되풀이 읽도록 만들어져 있으며 독후감 역시 그렇다. 책은 다시 읽을 때마다 새로운 주제와 화제를 나누어주며, 그때마다 미러볼의 거울 조각과도 같은 새로운 독후감이 쓰일 수 있다. 텍스트에 대한 총체성은 이런 방식으로서만 구할 수 있다. 이번에 소개하는 두 권의 책은 더더욱 그러하다.

김철의 〈우리를 지키는 더러운 것들〉(뿌리와이파리, 2018)은 대한민국을 지키는 숭고한 것들로 ‘빨갱이’와 ‘친일파’를 꼽는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38선과 동해(독도)를 지킨 것은 민주주의도 국력도 아닌 그 실체가 모호한 빨갱이와 친일파라는 끝없이 부유하는 기표다. 이 기표가 누구에게 가서 의미가 고정되는지는 전적으로 우연적이고 비일관적이다. 황교안 전 국무총리가 법무부 장관 시절 자신의 치적이라고 치켜세웠던 통합진보당 해산 과정이며 광복절에 일장기 이모티콘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린 것으로 공적(公敵)이 되고 만 어느 걸그룹 멤버는 부유하는 기표의 괴력을 보여준다. 지은이는 두 괴물 가운데 후자에 더 주목한다.

ⓒ이지영

빨갱이가 우파들 손에 쥐인 전용 칼자루인 데 비해 친일파는 좌·우파가 공용으로 사용하는 칼자루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나이, 신분, 직업, 지역, 정치적 입장 등에 따른 모든 차이와 갈등을 한순간에 해소하면서 ‘한민족’으로서의 집단적 동질성을 확립하는 데에 일본 및 친일파만큼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없다.” 해방 이후 오늘까지 70년이 넘었지만, 한국인은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를 청산하는 것을 오로지 ‘이 사람은 친일파인가, 아닌가’를 둘러싼 개인적 스캔들 수준에 맴돈다. 그렇게 해서 친일파는 뿌리 뽑혔을지 모르지만, 일제가 만든 제도와 의식은 사라지지 않았다. “발화의 위치와 주체를 ‘민족’ 이외에는 허용치 않는 폭력의 구조”야말로 제국 일본의 유산인데도 말이다.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는 동시에 탄생

역사는 객관적인 실체를 규명하는 일이라지만, 실제의 역사 인식은 자민족의 동일성과 정체성을 더욱 편든다. 지은이는 자칫 강퍅하게 흐를 이 논의를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를 예로 들어 설명하면서, 작가의 멜로드라마적 역사 인식을 비판한다. 멜로드라마 이론에 따르면, 욕하면서 본다는 텔레비전 막장 드라마의 특징은 다섯 가지다. 첫째, 강렬한 감정. 둘째, 과장된 감상성. 셋째, 뚜렷한 선악 이분법. 넷째, 행위의 에피소드 연발(인과적이지 못하고 비약이 심하다). 다섯째, 볼거리에 치중(인식보다는 효과에 치중). 멜로드라마식 역사 인식은 ‘나는 선하고, 내가 고난을 받는 원인은 모두 바깥에서 왔다’고 과거를 윤색한다. 히틀러와 그를 지지했던 독일 국민은 그런 역사 인식 끝에 사고하기를 멈추었다.

이분법이 파괴력을 가지려면 선악으로 구획되지 않는 것이 추방되거나 억압되어야 한다. 그래서 정체성의 정치를 동원하는 국민국가는 자신의 순수를 더럽히는 잉여를 비체(卑/非體·abject)로 취급하여 배제한다. 광복회를 비롯한 독립운동 유관단체들이 “독립운동을 폄하시키는 순국선열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며 서울 서대문형무소 자리의 독립공원 안에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난을 보여주는 박물관 설립을 반대했던 이유가 여기 있다. 똑같은 이유로 일제 위안부는 순결한 ‘민족의 딸’이어야지 ‘매춘부’일 수 없다.

조관자의 〈일본 내셔널리즘의 사상사〉(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8)는 1853년 미국의 페리 함대가 일본을 강제로 개국시킨 때부터 2019년 현재까지, 좌우익이 서로 합작해온 일본의 내셔널리즘을 조감한다. 극히 전문적인 주제이지만, “역사 인식의 자기중심성과 적대적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는 지은이의 주장은 김철의 그것과 같다.

일본은 강제 개국의 위협 앞에서 외세에 점령당하지 않고 능동적인 개국을 했는데, 개국은 교역과 시장의 개방만을 뜻하지 않는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의회를 운영하며 민주주의를 실험했다. 그러나 일본은 군국주의로 기울면서 제국주의 국가가 되었다. 지은이는 그 배면에 저항민족주의가 있다고 말한다. 히틀러의 나치 때문에 현대 정치는 늘 민주주의 대 파시즘이라는 구도를 설정해왔으나, 실제의 정치는 민주주의 대 민족주의라는 구도가 더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다. 그러나 이 구도는 생각보다 대립적이지 않다. 나치의 제3제국이 그랬고, 소비에트 해체 이후 동구권에서 생겨난 대다수 권위주의 국가는 물론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트럼프의 미국 역시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상생성을 보여준다. 역사적으로도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는 동시에 탄생했다.

일본 민족주의가 제국주의로 향하게 되는 과정을 침략 야욕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대위법적인 역사를 단순 처리하는 것이다. 일본이 청일전쟁을 통해 조선이 청국의 속방(종속국)이 되는 것을 막아주었고, 러일전쟁을 통해 조선이 러시아에 먹히는 것을 막아주었다고 한다면? 같은 논리로 조선을 집어삼킨 일본이 중국으로 진출하게 된 이유 또한 서양 열강으로부터 아시아를 지키기 위한 방도였다고 한다면? 이런 논리는 일본 극우의 논리를 복사한 것 같지만, 일본 제국의 행태는 서양사에서 되풀이되어왔고 현재도 되풀이되고 있다. 나폴레옹이 그랬고, 미소 냉전 시기의 두 제국이 그랬으며, 전 세계에 가장 많은 군사기지를 둔 현재의 미국이 그렇다. 민족주의는 항상 제국주의로 전화한다(미국 예외주의야말로 미국 민족주의다).

민족주의는 자신의 안전과 번영에 집착할 뿐 아니라, 자신의 가치(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데도 열성이다. 그래서 민족주의는 항상 지역체제(regionalism)를 꾀한다. 그 단적인 예들이 앞서 나온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과 미소 냉전 시기의 지역 분할이었으며, 전 세계를 다원적인 군사동맹으로 비끄러매고 있는 작금의 미국이다. 뒤에 가서 변질되었지만 일본 제국이 꿈꾼 ‘대동아공영권’도 똑같은 발상이다. 지은이가 강조한 것처럼 “일본 제국주의의 원죄는 미화될 수 없다”. 그럼에도 일본 민족주의를 대위법적으로 읽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동아시아 역내의 긴장을 공존으로 이끌고, 민족주의가 제국주의로 향하는 것을 막아낼 지혜를 모으자는 것이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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