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갑 찬 아이가 법정에 들어선다. 자인 알 하지(자인 알 라피아). “어떤 나쁜 새끼를 찔렀기 때문에” 복역 중인 소년범인데, 녀석이 오늘 서 있는 곳은 피고석이 아니다. 원고석이다. “제가 부모를 고소했어요.” 판사가 묻는다. “왜 부모를 고소했죠?” 자인의 대답. “저를 낳아줘서요.”
자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만든 죄를 물어 부모를 고소한 소년. 엄마 아빠가 아이의 생년월일도 기억하지 못해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다. 피고석에 불려 나온 부모는 억울하다고 한다. 그때부터 시작되는 아이의 진술. 영화로 재현되는 아이의 열두 살(로 추정되는) 인생. 부모는 과연 유죄일까? 그렇다면 이 영화는 법정영화일까?
모두의 암묵과 외면이 만든 매정한 현실
자인은 학교에 다닌 적이 없다. 일만 했다. 거리에서 푼돈을 벌어 부모에게 바쳤다. 자꾸 늘어나는 동생들을 보살피며 정작 자신은 부모로부터 방치되었다. 매정한 부모 탓에 유난히 아끼던 여동생 사하르와 헤어진 뒤 결국 집을 나온다. 떠돌이 생활이 시작된다. 자인은 과연 어디까지 가게 될까? 그렇다면 이 영화는 로드무비일까?
길에서 라힐(요르다노스 시프로우)을 만난다. 에티오피아에서 온 불법체류 여성이 잘 곳을 내준다. 대신 자인은 그의 한 살배기 아들 요나스를 돌본다. 가난하지만 그래도 매일 웃을 일이 생기던 나날은 짧았다. 라힐과 자인과 요나스의 삶이 다시 벼랑 끝에 내몰린다. 이들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까? 이 영화는 가난한 자들의 신파극일까?
자인을 연기한 아이는 실제로 거리의 난민 소년이었다. 실제로 자신의 정확한 나이를 알지 못해, 다만 열두 살로 추정되는 아이였다. 자신의 이름 그대로 영화에 출연해 본인의 실제 삶을 그대로 재현했다. 라힐을 연기한 배우 역시 실제 아프리카 출신 불법체류자. 촬영 도중 단속에 걸려 잡혀 들어갔다. 과연 어디까지가 꾸며낸 이야기이고 어디까지가 실제 상황일까? 그렇다면 이건… 애초에 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
지난해 칸 국제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작 〈가버나움〉은 그냥 ‘법정영화’가 아니다. 겨우 ‘로드무비’가 아니며, 고작 ‘신파극’도 아니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단순히 ‘영화 한 편’일 수 없다. 우리 모두의 암묵과 외면이 만들어낸 매정한 현실의 단면이다. 레바논 여성 감독 나딘 라바키는, 현실의 자인과 라힐을 향해 ‘품’을 내주기는커녕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우리의 멱살을 잡아 돌려세운다. 그러므로 피고석에 불려온 건 사실 자인의 부모가 아니다. 자신을 배심원이라고 착각했던 관객이다.
슬프고 아픈 영화일 줄은 미리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파워풀한 영화일 줄은 미처 몰랐다. 심장이 터질 듯 벅차오르는 라스트신에 이르러 나는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고작 눈물만 흘리고 있다는 게 미안해서 다시 또 눈물을 흘리고만 있었다. 어디 어디가 좋다고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다 좋은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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