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비행을 마친 다음 날이었다. 시차 적응에 실패한 박창진 대한항공 전 사무장이 전날 잠을 거의 못 자고 〈시사IN〉 편집국을 찾았다. 사회학자이자 인권운동가인 엄기호 작가를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초면이지만 몇 차례 만난 적이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근황을 나눴다. 박 전 사무장은 최근 엄기호 작가의 신간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를 읽었다. “어떻게 그렇게 잘 파악했는지, 제가 겪었던 상황과 거의 비슷해요.” 그의 첫마디였다. 책은 고통을 ‘마주대하는 것’에 대해 다루고 있다. 특히 고통을 겪는 이들의 주변세계, 즉 ‘고통의 곁’에 주목한다. 엄기호 작가가 보기에 박 전 사무장은 고통의 당사자이면서, 고통의 곁을 지키는 자다.
‘땅콩 회항’ 사건 이후 5년이 지났다. 박 전 사무장은 평승무원으로 근무 중이다. 사건 직후 산업재해를 인정받아 1년6개월 휴직을 했고 공황장애 등에 시달렸다. 3년째 되었을 때 머리의 종양을 제거했다. 그사이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은 경영에 복귀했다가 ‘조현민 물컵 갑질 사건’, 대한항공 일가의 밀수 혐의 등으로 다시 물러났다. 지난해 12월, 그가 대한항공과 조 전 부사장을 상대로 제기한 민사소송 4건의 1심 판결이 나왔다. 일부 승소했지만 회사의 소송비용마저 그가 떠안는 등 사실상의 패배였다. ‘고통에서는 고통이 주체’라는 걸 박 전 사무장의 지난 5년이 증명하고 있었다. 엄기호 작가가 박창진 전 사무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우주에 혼자 떨어진 기분이라는 대목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지만 박 전 사무장은 자주 웃었다. 그에게 웃음은 직업병의 일종이다. 웃지만 웃는 게 아니었다. 이 대화는 ‘박창진의 투쟁’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2014년 12월5일 이후 그를 떠난 적 없는 고통에 대한 이야기다.

ⓒ시사IN 이명익

엄기호:보통 같으면 멘탈이 흔들리고 우울해했을 텐데 박 전 사무장의 경우 씩씩해 보인다는 반응들이 있더라.

박창진:‘서비스맨’으로 20년 넘게 일하다 보니 웃지 않을 수가 없다. 현실은 처참함을 넘어 지옥 같은 상황이다. 어제도 비행기를 타고 오는데 한 승객이 내가 웃지 않는다고 지적을 했다. 텔레비전에 나온 사람인 걸 아는데, 웃지 않고 거만해졌다는 거다. 맥락은 무시됐다. 얼마 전에 서지현 검사를 만났는데, 서 검사가 친구와 케이크를 먹고 난 뒤 인터넷에 바로 ‘그 여자가 멀쩡히 웃고 쇼핑하고 다니더라’는 글이 올라왔다고 한다. 나도 비슷한 상황을 많이 겪는다. 사회적 이슈의 피해자들은 ‘피해자 코스프레’를 해도 안 해도 공격을 받는다.

엄기호:‘피해자다움’은 양극단을 강요한다. 비탄에 젖은 모습을 강요하다가도 그것을 딛고 일어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거다.

박창진:엄청 힘들다. 아예 포기하든지 낙오자로 숨어 살든지 삶을 정리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나도 그런 유혹을 끊임없이 받지만 내 인생이니까 그럴 수는 없다.

엄기호: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웃는 것은 (직업적인 습관일 뿐 아니라) 품위를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커서라고 생각한다. 품위 없는 존재로 취급받고 싶지 않은 주체성이다. 하지만 품위를 지킨다는 것이 모욕스러운 순간도 있다.

박창진:울고 싶은 순간에 웃는 게 인간적으로 괴로울 때가 있다. 사실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컸다. 휴직한 뒤 복귀하니 내 인격, 내 품위가 너무 폄하돼 있었다. 바깥보다 내부에서 당하는 괴롭힘과 냉대가 엄청난 타격이었다. 사회적으로는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많이 평가해주어서 자존감이 커졌는데 회사에 오니 바닥을 지나 마이너스가 됐다. 처음 한두 달은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내 익명 게시판에도 욕이 넘쳐났다. 내가 비행을 한번 하면 화장실 다녀온 횟수까지 세가며 “남들이 일하는데 놀고먹더라, 얼굴이 알려지니 겉치장을 하느라 거울만 보더라” 이런 글이 올라왔다. 예전부터 이런 스타일로 입고 다니고, 이렇게 생겼는데. 인간에 대한 실망이 컸다. 시기해서든 누구의 사주든, 그런 말을 듣는 게 비참했다. 오기가 생겼다. 이런 문화 속에서 다른 존재가 되어봐야겠다 생각이 들었다.

엄기호:한국 사회에서는 밖에 있는 사람들이 ‘곁’이 되어주는 경우가 많다. 정작 안에 있는 사람들은 곁이 되어주지 못한다. 밖에서 아무리 힘을 준다 해도 회사에서 느끼는 모멸감, 배신감을 견디는 건 힘들 것 같다.

ⓒ시사IN 신선영지난해 5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대한항공 직원들은 가면을 쓴 채 촛불집회를 열었다.
박창진:“팀장 달고 싶어서 저러나”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었다. 몸이 힘들어서 그렇지 직책이 낮아졌다고 해서 하는 일이 힘든 건 아니었다. 오히려 24년간 숙련도가 쌓여 매니저 역할보다 일 자체는 훨씬 쉽다. 그보다는 사람들이 조직 논리에 따라 나를 괴롭힐 때가 더 괴로웠다. 비행을 나가면 내가 명품을 샀는지 보고하라고 회사에서 시켰다는 사실을 고백한 이도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은 자발적으로 괴롭혔다. 회사에서 내쳐진 사람, 처벌받아야 될 사람으로 생각해 자진해서 그런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텔레비전에 나오고 유명해졌으니 ‘당신이 희생하는 게 당연하다’는 요구도 있더라. 상처가 된다.

엄기호:회사가 시켜서 그러는 사람도 있고 자발적으로 하는 사람도 있다면, 그걸 막아주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박창진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증인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은 법적인 문제부터 시작해 내부에서 도저히 증인이 나올 수 없는 구조다.

무너짐의 유혹이 제일 어려웠다

박창진:나는 서비스업이 잘 맞았다. 후배들에게도 “네 손길로 사람들의 어려움을 해결한다는 건 성직자 다음으로 좋은 일”이라는 말을 많이 했다. 이 일이 좋았기 때문에 평가도 좋게 받았다. 전체 객실 승무원 7000명 중 0.1%만이라도 저에 대해 좋게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지금도 게시판에 ‘박창진’ 이름을 치면 험담이 수없이 나온다. 안에서 가치를 발현할 수 없다는 인간적 실망감이 있었다. 그래도 희망은 있었다. 신입 승무원, 외국인 승무원, 청소 용역 직원들 이런 분들이 힘이 됐다. 청소 용역 직원들께 편지를 많이 받았다. 신입 승무원들로부터 나로 인해 회사가 변하지 않을까 희망을 갖게 됐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가짜 뉴스와 음해가 많았지만 오랫동안 끈기를 가지고 해오다 보니 지부도 생기고(그는 300여 명 규모의 공공운수노조 대한항공직원연대지부 지부장이기도 하다). 생명력이 지속되는 계기가 됐다.

엄기호:인권운동을 하면서 무대의 불이 다 꺼지고 피해자 혼자 남는 경우를 자주 봤다. 그들과 같이 걷다 보면 제일 많이 듣는 말이 “이게 끝날까요?”다. 결국 마지막에는 외로움과 싸우는 것 같다. 아무리 사회적 의미가 있더라도 내가 이걸 왜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다. 그러면 솔직히 나도 할 말이 없다. 안 끝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박창진:끝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누군가가 내게 끝이 있다고 말해주길 바랐다. 결과적으로 해결책을 말해주는 건 사기꾼이었다(웃음). 끝이 없다는 걸 인정해야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내 일이고 누구 손에 맡겨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도 얻었다. 처음엔 너무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사회적으로 돌팔매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내 삶의 주체를 나로 가져오는 좋은 변수였다. 서지현 검사와도 얘기해보니 비슷한 일을 많이 겪었더라. 안 좋은 일로 유명해졌지만 그걸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생긴다. 웃으며 말하지만 당시에는 정말 힘들었다.

엄기호:가끔 서 검사를 만난다고 했는데 어떤 이야기를 하나? 위로가 안 된다는 걸 알기 때문에 받는 위로가 있을 것 같다.

ⓒ시사IN 신선영박창진 대한항공 전 사무장이 지난해 5월 대한한공 직원들이 개최한 촛불집회에서 사회를 본 뒤 퇴장하고 있다.
박창진:내가 겪는 괴로움은 가족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비행 중 쉬는 공간이 있는데 나는 눕지를 못한다. 눕는 순간 기내에서 있었던 일들이 다 생각나기 때문이다. 암흑 같은 공간이 나를 덮쳐온다. 육체노동을 하기 때문에 휴식 공간이 편안해야 하는데 지금은 차라리 공개된 공간에서 사람을 만나는 게 덜 괴롭다. 가족들과 얘기하는 게 위로는 되지만 내 고통을 전가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힘들기도 하다. 서지현 검사를 만났을 때 제 말의 의미를 충분히 알고 공감해주었다. 저도 마찬가지다. 다른 문제라고 할 수 있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결은 같았다. 끝나지 않음에 대한 명제는 참 슬픈 일이기도 하다. 외국에 사는 교민 중에 의외로 ‘땅콩 회항’ 사건을 아는 이가 많다. 미국 교민 승객은 미국이라면 돈방석에 앉고 책을 몇만 권을 팔았을 거라고 했다. 프랑스 교민 승객은 “프랑스 같았으면 사람들이 당신 이야기를 너무 듣고 싶어 해서 50년 동안 전국을 돌면서 행사를 열어야 할 거다”라고 했다. (그런 걸 바란다는 건 아니지만) 한국 사회에서 내가 짓밟히고 암적인 존재가 되고 있는 것이 슬프다고 했다.

엄기호:서 검사와 박 전 사무장은 좋은 동료가 될 것이다. ‘동감’이 아니라 ‘공감’이라고 한다. 서로를 보면서 자신의 운명을 보았을 것이다. 같은 운명을 짊어지고 가는 존재로, 언어를 넘어 서로 용기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미 발가벗겨진 존재이고, 내가 노출 여부를 결정할 수 없다면 왜 나서야 하는지 목적성을 부여하는 게 운명이라는 점을 서로에게 자각시킨 것 같다.

박창진:‘무너짐의 유혹’이 제일 어려웠다. ‘혐오스럽다’는 이야기를 회사에서 많이 들었다. 처음에는 화가 났고 그다음에는 슬펐다. 그 단계를 겪고 나니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든지 하는 극단적인 생각만 들었다. 이 생각도 넘어서니 공감할 수 있는 누군가가 분명히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길 잃은 누군가가 나를 보고 선례로 생각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컸다. SNS에 ‘선한 영향력’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형이 다니는 성당의 신부님이 해주신 말이다. 휴직하고 하루에 수천 번씩 죽을 방법을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도구까지 구입했는데 어느 날 형님을 따라 성당에 미사를 보러 갔다. 신부님이 나와 꼭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더라. 말씀을 듣고 오니 분명히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살아남지 못하면 그 사람도 똑같이 살아남지 않는 쪽을 택할 것 같았다. 그래서 살아남는 선택을 하기로 했다.

“가장 떨리고 두려운 상대는 동료들”

엄기호:끝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버티는 이유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넘어진다. 회사를 그만두려고 할 때 ‘조현민 물컵 갑질’ 사건이 터지면서 그동안 박 전 사무장을 외면하고 모욕하던 사람들조차 도움을 청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럴 때 “내가 왜 내 이야기를 듣지 않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하나?”라고 생각하기 쉽다.

박창진:심적 갈등을 엄청나게 겪었다. 혹 수술(머리 양성 종양)을 받으면서 회사를 그만둘 생각이었다. 제 혹에 대한 놀림이 굉장히 많았다. “저렇게 하고 다니니 저 꼴이 나지” 하는 이야기를 인터넷 공간에서만이 아니라 직접 듣기도 했다. 모욕감이 들었다. 회사를 그만두려던 시기에 ‘조현민 물컵 갑질’ 사건이 일어났고 직원들이 집회를 열었다. 직원들 ‘단톡방’ 관리자가 저에게 도움을 청했다. 일단 방을 만들었는데 집회가 열리고 언론이 취재하니 겁이 나고 회사가 알게 되면 생존권을 잃을 거라는 공포 같은 게 있었을 거다. 전부 내가 겪은 일이다. 내 의지라기보다, 나는 겪어봤기 때문에 그 처지를 너무 잘 아니까 외면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지나온 길이니까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나는 대한항공 내부로부터 어떤 보호도 받지 못했다. 자주 오해하는 게, 그들에게 뭐라는 게 아니다. 사회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모두가 어쩔 수 없이 방관자가 된다. 아무도 (내 편이) 없다는 삭막함과 차가움은… 우주에 혼자 떨어진 느낌이다.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느꼈던 게 광화문 집회(지난해 5월 대한항공 직원들의 촛불집회)의 사회를 봐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다. 사회를 보는 건 어렵지 않았는데 사람을 대면하는 일이 두려웠다. 여기 모인 사람들 중에 누군가는 나를 믿지 못하고 손가락질할 텐데. 실제 익명으로 ‘박창진이 또 나서냐’는 의견도 많았다. 광장에서 가장 떨리고 두려웠던 상대는 동료들이다. 지금도 회사에 출근할 때 가장 힘든 건 평온함을 유지하는 일이다.
엄기호:인간이 악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용기를 낼 수가 없는 구조다. 제도적으로 어떤 장치가 있어야 할까? 직원들 중에도 분명히 돕고 싶지만 용기를 내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 텐데.

박창진:제도가 바뀌어야만 가능한 일이라는 걸 경험을 통해서 깨달았다.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 등의 법적 구속력이 강해져야 한다. 또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가 필요하다. 미국은 커피 한 잔을 사도 경고문이 넘쳐난다. 우리나라는 아무리 소비자에게 해를 끼쳐도 기업에 별 문제가 없다. 돈을 많이 가진 경제주체들의 입김만 반영되는 현실을 단죄하지 못하면 다음 세대에게 미래는 없을 것 같다. 할 수만 있다면 징벌적 손해배상이 1조원씩 나오는 법을 만들고 싶다.
엄기호:내부고발자를 위해 증언하는 것도 연쇄적인 내부 고발이다. 고발자 한 사람만 보호하는 게 아니라 그를 위해 증언하는 사람들까지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용기를 내서 곁에 있을 수 있다.

박창진:맞는 말이다. 내가 왜 끊임없이 투쟁하고 깨끗한 옷을 입고 바깥에 나가느냐 하면 내가 살아남아야 다음 사람들이 구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용기 냄’이다. 우리는 더 잘 살아남아야 한다. 고통이 없어지지는 않지만 더 당당하게 살아남아서 다음 사람들이 용기를 가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 안은 갈기갈기 찢기고 거죽만 남았지만 그다음 사람들은 안도 겉도 온전히 보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피해자가 보호받고 잘되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엄기호:일본에서 본 사례가 있다. 동네 카페에 매일 오는 게 유일한 소일거리인 독거노인이 있다. 이 카페에 오기 위해 항상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옷을 차려입는다. 카페는 이 노인에게 ‘의례를 수행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렇게 공적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공간, 의례를 수행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사람이 버틸 수 있는 것 같다. 박 전 사무장과 만나고 싶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의례를 수행하면서 버텨내고 있기 때문이다. 과찬이 아니라, ‘현명함’이다. 사익을 추구하려 한다는 의심을 계속 받고 있는데 뒤집어 말하면 한국 사람들이 공적인 가치를 경험해본 적이 별로 없다는 이야기다.

피해자는 ‘이야기’하는 게 유일한 생존법

박창진:우리 사회는 내부고발자를 위태롭다고 생각하고 계속 제거해왔다. 지금도 그렇다. 정이 많아 나를 안타깝게 여기는 분은 많지만 내가 뭔가를 가져가는 순간부터 싫어한다. 사건 직후 회사에서 나를 두고 ‘그는 1억 연봉자다’라고 말했다. 사실이 아니지만 그래야 사람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내가 설사 이익을 추구하는 행동을 했다 하더라도 그건 나쁜 게 아니고 피해를 보았다는 게 중요하지 않나. 갈등을 조장하는 게 잘 먹혀들기 때문에 기득권이 이용하는 것 같다. 내가 더 잘되면 좋겠지만 적어도 더 밑으로는 내려가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사실 내 안은 죽은 거나 매한가지다. “왜 나대느냐”는 비난의 말이 맞는 건지도 모른다. 생명력을 내 안에서 찾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강구해야 한다는 상황 자체가 참 슬프다.

엄기호:내면은 다 무너졌지만 사회적인 부분을 유지함으로써 삶을 유지하고 있다는 말이 지금까지 한 이야기 중 가장 용기 있는 대목인 것 같다. 우리 사회가 이 의례를 계속 수행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그만하면 충분히 이야기하지 않았느냐”라는 이야기를 그만해야 한다. 피해자는 이야기하는 것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래야만 새로운 생명력이 생긴다. 앤드루 솔로몬이라는 학자가 우울증을 오래 앓고 난 상황을 ‘고목나무에 자라는 넝쿨식물’로 비유했다. 고목나무의 형체를 하고 있지만 안은 다 썩어버린 상황이다.

박창진:내 상황도 비슷하다. 많은 사람들은 겉모습만 보고 ‘괜찮네, 멀쩡하네’라 생각하지만 껍데기다. 안은 텅 비었다. 감정적으로는 ‘산송장’이다. 얼마나 처참하고 나쁜 일인지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박창진이란 사람이 원래도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한 권력자에 의해 어떻게 망가졌는지 왜 이렇게밖에 될 수 없었는지 이면을 봐줬으면 좋겠다. 앵무새처럼 같은 얘기를 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내 생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기회가 되면 얘기할 것이고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피해를 보는 약자들이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기득권을 위한 정보는 이미 너무 많다.

엄기호:박창진이 당한 억울한 일을 해결해가는 과정인 동시에 우리 사회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의 노동이 아니라 인격을 산다고 생각한다. 이건 자본주의가 아니라 노예제다. 인격의 개별성을 인정하는 사회로 바뀌어야 한다.

박창진:이야기를 하면 동감해주는 분들도 많지만 “감히 네가 왜? 네가 뭐 잘났다고?” 하는 이야기도 많이 듣는다. 사회가 신분화됐다는 말에 공감한다. 미국의 유명한 장난감 회사 사장이 혼자 비행기 퍼스트클래스에 탄 적이 있다. 자기가 쓴 세면대를 직접 타월로 닦고 있길래 내가 닦겠다고 했더니 저를 쳐다보면서 “내가 사용한 걸 내가 닦는데 왜?”라고 묻더라. 우리 사회가 얼마나 왜곡됐는지를 보여준다.

“한국 사회는 박창진에게 빚지고 있다”

엄기호:경험을 가진 사람이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자격’을 가진 사람이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이미 근대사회가 아니라는 증거다. 우리 사회가 박창진이라는 사람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언론 역시 이들을 ‘문제를 해결해줘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으로 관점을 바꿔 바라봐야 한다.

박창진:내가 ‘관종’이라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고(웃음), 피해자를 통해 사회문제를 보여주고 그들이 방치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박창진이, 서지현이 왜 계속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봐달라. 2차 가해가 계속되고 있는데 이런 인터뷰를 통해 바뀌었으면 좋겠다.
엄기호:어떤 철학자는 박창진 전 사무장 같은 사람을 ‘조명탄’으로 비유한다. 깜깜한 밤하늘에 조명탄 하나가 터지면 세상이 환히 보인다. 많은 사람들은 “왜 네가 조명탄이냐?”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바라봐야 하는 것은 조명탄이 아니라 조명탄이 터지면서 비춰지는 세상이다.


박창진:저도 (조명탄이 되길) 원하지 않았다(웃음). 결코 내가 뛰어나거나 현명해서 이런 일을 하는 게 아니다. 다만 상황에 노출됐고 숙명을 거부하지 않을 뿐이다. 내가 사회적인 활동 속에서 생명력을 유지하는 건 결국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배반당하더라도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제 가치를 찾아간다고 생각한다. 개개인을 비판하는 게 아니라 구조와 체제를 비판하고 싶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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