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 국경 지대에 아주 멋진 장벽을 건설하겠다. 나보다 장벽을 더 잘 짓는 사람은 없다. 그것도 아주 값싸게!”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016년 대선 유세 당시 기자들에게 한 이야기다. “멕시코 국경을 통해 마약과 범죄는 물론 성폭행범까지 들어온다”라며 반(反)이민 구호를 내걸어 보수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어냈던 트럼프 대통령이 2020년 대선을 앞두고 다시 한번 정치적 도박에 나섰다. 불법 이민자들을 막기 위한 미국-멕시코 국경장벽(3145㎞) 건설 경비 57억 달러가 예산에 반영되지 않으면, 지난해 12월22일 이후 1월10일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연방정부 셧다운’을 방관하겠다는 것이다.

ⓒAP Photo지난해 12월11일 트럼프 대통령, 펜스 부통령, 민주당의 낸시 펠로시 하원 의장(오른쪽부터)이 국경장벽 건설을 놓고 설전을 벌이고 있다.
셧다운은 미국 의회에서 연방정부 예산이 통과되지 못하는 바람에 일부 정부기관의 업무가 중단되는 현상이다. 미국 연방정부는 1976년 이래 최근까지 공화·민주 양측의 극한 대치로 22회 셧다운을 경험했다. 2017년 1월 출범한 트럼프 행정부 역시 지난해 셧다운을 경험한 바 있다. 당시는 셧다운이 며칠 만에 끝나 별 피해가 없었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다르다. 트럼프 행정부는 물론 민주당도 국경장벽 이슈에서는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민주당이 장벽 건설에 필요한 예산을 승인하지 않으면 셧다운이 “몇 달, 몇 년까지 지속될 수 있다”라고 선언한 상태다. 지난해 11월 중간선거에서 하원을 장악한 민주당도 “장벽 예산은 한 푼도 줄 수 없다. 국민을 볼모로 한 정쟁을 즉각 중단하라”고 맞섰다.
트럼프 대통령은 민주당과 타협하기는 사실상 어렵다고 보고 여론전을 폈다. 1월8일 백악관 집무실에서 전국으로 9분간 생중계된 특별 연설에서, 그는 미국-멕시코 국경을 통한 불법 이민자들의 유입을 “인도주의적 위기이자 안보 위기”라고 규정했다. 이런 중대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국경장벽 건설에 예산 배당을 거부하는 민주당이 ‘셧다운의 유일한 원인 제공자’라는 의미다.

“트럼프, 일부 보수 논객에게 휘둘린다”

트럼프 대통령은 민주당을 상대하기보다는 자신의 핵심 지지층인 보수 성향 유권자들에 대한 여론전으로 현재의 위기를 돌파하려는 듯하다. 반이민주의의 상징으로 떠오른 국경장벽은 보수 유권자들에게 전폭적 지지를 받는다. 지난해 12월 공영방송 NPR 여론조사에 따르면, 공화당 지지자 중 63%가 ‘장벽 건설이 당면 국정의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민주당 지지자 가운데서는 단 7%만이 장벽 건설에 호의적이었다. 재선을 노리는 트럼프 대통령이 국경장벽 건설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정국 돌파를 위한 합리적 계산보다 일부 보수 논객들에게 휘둘린다는 분석도 나온다. 지난해 12월 미국 하원은 국경장벽 경비를 반영하지 않은 예산안을 통과시켰다. 상원도 이를 승인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대통령도 예산안에 서명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런 흐름에 제동을 건 사람은 극우 라디오 방송의 토크쇼 진행자인 러시 림보다. 림보가 당시의 예산안(국경장벽 경비가 반영되지 않은)에 대한 격렬한 비판으로 엄청난 호응을 받으며 트럼프 대통령을 뒤흔들어놓았다는 것이다. 플로리다 주 팜비치를 근거지로 림보가 매일 내보내는 〈러시 림보 쇼〉는 고정 청취자 1300만여 명을 확보할 정도로 영향력이 막강하다. 그는 1월7일 방송에서도 ‘불법 이민을 문제로 보지 않는 미국 성인이 고작 7%’라는 여론조사를 인용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을 적극 편들었다. “트럼프는 국경장벽 건설을 위해 민주당에 당당히 맞서야 한다. 그가 굴복하지 않아 정말 다행이다.” 일부 언론이 ‘지금의 셧다운은 림보 셧다운이지 트럼프 셧다운이 아니다’라고 비꼬는 이유다.

ⓒAFP PHOTO멕시코 북부 티후아나에서 온두라스 사람들이 미국으로 밀입국하기 위해 국경을 넘는 모습.
이처럼 장벽 건설 문제로 인한 극한 대치가 지속되면서, 연방정부 기관 15개 가운데 국토안보부, 농무부 등 9개 부처가 셧다운의 직접 영향권 내에 들어가 있다. 210만여 명에 달하는 연방 공무원 가운데 80만여 명이 셧다운의 직격탄을 맞아 보수를 받지 못하고 있다. 80만명 가운데 38만명은 무급휴가로 처리되었다. 나머지 42만명은 ‘필수 인원’으로 규정되어서 소속 부처에 출근하고 있지만 셧다운이 끝날 때까지 보수를 한 푼도 받지 못한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인구통계국 소속 공무원 테니샤 켈러는 은행 잔고가 마이너스로 떨어지면서 1768달러에 달하는 아파트 월세를 내지 못했다. 교정직 공무원 호세 로저스는 월 2000달러인 집세를 마련하기 위해 우버 운전기사로 뛰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국립공원과 박물관 등 국민 편의시설들도 문을 닫으면서 시민 불편이 가중되었다.

‘불법 이민=안보 위기’라 할 수 있나

‘국경장벽 전쟁’으로 빚어진 셧다운은 언제쯤 풀릴 수 있을까? 트럼프 대통령은 여론조사 결과로 확인된 보수 유권자들의 지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지금의 주장을 고수할 것으로 보인다. 야당인 민주당 역시 핵심 지지층인 히스패닉 유권자들을 감안할 때 국경장벽 이슈에 관한 한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이끄는 실무그룹을 통해 민주당과 타협을 계속 시도한다는 계획이지만 전망은 밝지 않다. 그는 1월9일 낸시 펠로시 하원 의장과 막판 타협을 시도했다. 하지만 민주당의 장벽 예산 불가 원칙을 확인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장을 박차고 나온 뒤  트위터에 ‘완전 시간낭비’라고 썼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금 같은 대치 상황이 지속될 경우 극단적인 카드를 꺼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가 텔레비전 연설에서 언급한 ‘안보 위기’를 근거로 남부 국경 지대의 불법 입국을 ‘국가 비상사태’로 선포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되면 국경장벽 건설에 미국 군대를 동원할 수 있다. 의회 승인 없이 국방부 가용 예산을 끌어와 국경장벽 건설에 사용해도 된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텔레비전 연설을 한 다음 날, “의회가 장벽 예산을 마련할 수 없다면 다른 방도를 취할 것이다. 나에겐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할 수 있는) ‘절대적 권한’이 있다”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국가 비상사태 선포의 법적 근거는 1976년 발효된 ‘국가비상령’이다. 이 법령에 따르면, 대통령이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려면 미국이 ‘안보 위기’ 상황에 놓여 있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연설에서 불법 이민자들을 안보 위기로 규정한 이유다. 문제는 ‘과연 지금의 불법 이민 문제를 안보 위기로까지 규정할 수 있느냐’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면 야당의 반발은 물론 법적 공방에 휩쓸릴 위험이 있다. 이처럼 국경장벽 문제가 뜨거운 대선 이슈로 변질된 이상 양측이 양보해서 극적으로 타협하지 않는 한 셧다운은 장기화할 가능성이 크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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