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개항한 항구는 부산, 인천 그리고 원산이었어. 지금은 북한 땅인 강원도 원산과 서울을 잇는 경원선 건설에 열강은 침을 흘렸지. 경의선을 탐냈던 프랑스에 이어 독일까지 경원선 부설권을 요구했다고 해. 그러나 대한제국 내장원에 설치된 서북철도국은 1899년 9월, 박기종 등이 설립한 ‘대한국내철도용달회사’에 경원선 부설권을 주었어.
부설권을 얻었지만 이 회사는 자본과 기술 모든 것이 달렸지. 이 점을 파고들어 1903년 실질적인 부설권을 장악한 일본은 경원선을 건설하기 시작했어.

ⓒ시사IN 이명익강원도 철원군 월정리역에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표지판이 서 있다.

러일전쟁이 끝나고 경원선 공사는 한동안 중단되지만 경술국치 후 공사가 재개돼. 1914년 9월6일 총연장 223.7㎞의 경원선이 개통됐어. 험준한 지형 탓에 공사는 만만치 않았단다. 더욱이 경원선이 놓인 길목은 경술국치 뒤 의병 활동이 이어지던 곳이었지. “민간인과 의병들의 저항과 습격이 잦았고 일본인 측량대가 헌병대의 비호 아래에서도 한복으로 위장해서야 측량을 마칠 수 있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어느 철도가 그렇지 않겠느냐마는 경원선 역시 철도변에 사는 이들의 삶을 엄청나게 변화시켰어. 전에 볼 수 없던 새로운 문화 충격을 가져온 거야. ‘신고산 타령’이라는 함경도 민요가 있어. “신고산(新高山)이 우루루 함흥차 가는 소리에 구고산(舊高山) 큰애기 반봇짐만 싸누나”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노래야. 여기서 신고산은 산 이름이 아니라 경원선의 종착역인 원산역 근처에 있던 기차역 이름이야. 고산(高山)이 원래 지명인데 역이 생긴 곳을 신(新)고산이라 부르고, 원래 마을이 있던 곳은 구(舊)고산이라 부르게 된 거지.

그런데 왜 ‘구고산 큰애기’가 반봇짐만 쌌을까? 역이 생기면 마을이 번화해지고 신문물도 직통으로 들어오게 마련이지. 신고산에서 우루루 도시로 가는 기차가 기적을 뿜으면 여전히 부뚜막에서 밥 짓고 길쌈하는 게 일이었을 ‘큰애기’ 마음이 콩닥콩닥하지 않겠니. 이렇듯 신고산 타령은 철도라는 혁명적 신문물 앞에 당황하고 놀랐던 한국 사람들의 속내를 들추는 민요란다.

경원선이 실어 나른 사람들 가운데 ‘VVIP급’ 승객으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있었어. 1917년 순종은 경원선을 타고 함경도로 거둥(임금의 나들이)했거든. 태조 이성계나 함흥에서 태어난 태종 이방원을 제외하면 조선의 어느 왕도 함경도 땅을 밟아본 적이 없다고 알고 있어. 왕조 개창 후 500년이 지나서야 망해버린 왕조의 임금이 조상의 땅을 찾은 셈이지만 함경도 사람들은 망국의 임금을 열렬히 환영했다고 해.
“행차가 출발하자 비가 왔는데 북도의 백성들은 다투어 살고 있는 집의 띠와 울타리의 나무를 뽑아서 진흙길을 포장하여 승여(乘輿)가 다니는 것을 편히 하였다. 기뻐하면서 서로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오셨다’라고 하였다(〈조선왕조실록〉 순종실록).” 조선 왕조의 고향이면서도 500년 내내 차별받았으면서, 나라를 빼앗기자 어느 지역보다 치열하게 항일 투쟁을 전개했던 함경도 사람들. 그들이 순종에게 보냈던 ‘우리 임금 오셨다’라는 환호가 왠지 뭉클하구나.

이광수, 한용운, 정주영이 탔던 기차

경원선은 금강산선과도 연결돼 금강산 가는 열차로 각광받았어. 경원선으로 철원역까지 간 뒤 전철을 타고 금강산으로 가는 것이 서울과 경기 지역 학생들의 주된 수학여행 코스였대. 당대의 문사였던 이광수와 최남선도 경원선을 타고 유려한 금강산 기행문을 남겼고, “만이천 봉! 무양(無恙)하냐, 금강산아. 너는 너의 님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모르지”라고 노래한 만해 한용운도 경원선 단골 승객 중 하나였지. 아버지 몰래 소 판 돈을 훔쳐 달아난 소년 정주영(전 현대그룹 회장)도 경원선에 올랐고, 소설 〈상록수〉의 모델이 된 불굴의 조선 여성 최용신도 경원선을 타고 고향인 원산과 서울을 오갔어.

ⓒ민족문제연구소배우 강동원의 외증조부인 이종만.
경원선에 사연을 얹은 사람들을 꼽다 보니 유난히 큰 이름 하나가 떠오르는구나. 이종만(1885~1977)이라는 사람이야. 그의 고향은 경상도 남쪽 바닷가 울산이지만 갖가지 사업을 하느라 식민지 조선 곳곳을 누볐지. 하는 일마다 실패하고 뒤통수 맞고 탈탈 털리던 그에게 대박을 안겨준 건 함경남도 ‘영평금광’이었어. 대한제국 시절 운용되긴 했지만 이미 폐광이던 함경남도 정평군 영평금광을 재개발해 노다지를 캤던 거야. 정평은 경원선과 연결된 함경선 라인에 있는 도시였으니 이종만은 ‘사업 허가를 받는다, 투자자를 끌어들인다’ 하며 경원선을 수십 번 왔다 갔다 했을 거야.

그는 여타의 일확천금 부자들과는 달랐어. 영평금광을 막대한 이문을 남기고 매각한 뒤 그 돈을 아주 화끈하게 쏘았지. “이상(理想) 농촌을 건설할 목적으로 50만원의 거금을 던져서 재단법인 대동농촌사를 창립한 이종만씨 (중략) 또 대동농촌사의 토지 경작자에게 수확량의 3할만을 농촌 건설 의무금으로 징수한다는 계획은 조선 사회에 큰 충격을 일으켰다(〈동아일보〉 1937년 9월16일자).” 일제강점기에 소작 행태는 명목상 지주와 소작인이 수확량을 반씩 나눠 갖는 5대 5 비율이었지만 각종 세금을 소작인에게 전가해 지주와 소작인 몫의 비율이 6대 4 또는 7대 3인 경우가 지천이었어. 이종만은 자신이 세운 농촌 공동체에서 생산량의 3할만 받는다고 선언한 거야.

〈동아일보〉는 1937년 9월17일 사설에서 “이런 갸륵한 독지가의 토지가 불행히 157만 평에 불과하여 혜택을 입는 소작인이 겨우 연천, 평강, 영흥 3군의 153호에 그치는 것은 매우 섭섭한 일”이라고 격찬을 했어. 연천과 평강은 경원선이 지나고 영흥은 원산에서 출발하는 함경선이 거쳐가는 곳이야.

“영평금광을 155만원에 팔고 그중에서 50만원의 거액을 조선 농촌 구제 사업에 던진 이종만씨는, 금상첨화로 12만원의 큰돈을 그 금광 광부, 직원 등의 위로금으로 또는 학교의 기부금, 부근 빈민의 구제금 등으로 한꺼번에 던졌다(〈조선일보〉 1937년 5월16일자).” 통도 크고 차원부터 다른 기업가 이종만. 일제 말기 친일 기부 행위 등으로 〈친일인명사전〉에도 올라간 그는 해방 후 북한으로 가서 광업상 고문을 지냈단다. 당연히 남녘에서는 그에 대한 기억이 시나브로 사라졌지. 얼마 전 영화배우 강동원의 외증조부가 친일파라고 하여 시끄러웠던 것 기억나니? 그가 바로 이종만이었단다.

경원선은 해방된 조선의 철도 가운데 처음으로 분단의 쓰라림을 맛보기도 했지. 38선까지 바짝 남하한 소련군이 1945년 8월24일 경원선 통행을 차단하면서 한반도의 분단이 시작됐으니까. 그로부터 경원선은 반쪽짜리 철도, ‘철마는 달리고 싶은’ 길로 남아 있어. 농촌 공동체에 50만원을 쏟아부은 뒤 “이게 나 혼자 번 돈인가”라고 외치며 광부들에게 엄청난 돈을 쾌척해 광산촌 전체를 환호의 바다에 빠뜨린 호쾌한 기업가 이종만은 이렇게 말하면서 혀를 차지 않을까. “언제까지 그러고 살 건가. 경원선 타고 원산 가서 함경선 갈아타고 두만강까지 가면 볼 것이 얼마나 많고 할 일이 또 얼만데.”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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