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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이 떠난 지 60년, 딸의 간절한 염원

올해는 이승만 정권의 사법 살인 피해자인 죽산 조봉암 선생이 서거한 지 60년이 되는 해이다. 조봉암 선생의 신원(伸冤)과 재평가를 위해 평생을 바친 맏딸 조호정 여사(사진)를 만났다.

정희상 기자 minju518@sisain.co.kr 2019년 01월 25일 금요일 제5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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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은 일제강점기하에서 독립운동가로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였고, 광복 이후 조선공산당을 탈당하고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여 (중략)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농지개혁의 기틀을 마련해 우리나라 경제체제의 기반을 다진 정치인이었다. 그런데 그 후 진보당 창당과 관련한 이 사건 재심 대상 판결로 사형이 집행되기에 이르렀는바, 이 사건 재심에서 피고인에 대한 공소사실 대부분이 무죄로 밝혀졌으므로 이제 뒤늦게나마 재심 판결로써 그 잘못을 바로잡고, (중략) 이상과 같은 이유로 관여 법관의 의견이 일치되어 주문과 같이 (간첩죄 무죄) 판결한다(2011년 1월2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문).”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올해는 이승만 정권의 사법 살인 피해자 죽산 조봉암 선생이 서거한 지 60년 되는 해이기도 하다. 죽산은 생전에 1남3녀를 두었다. 그중 3·1운동 과정에서 인연을 맺은 첫사랑 김이옥과의 사이에서 얻은 맏딸이 조호정 여사(91)다. 조호정 여사는 아버지의 신원(伸冤)과 재평가를 위해 평생을 바쳤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 인왕산자락 아담한 주택에서 기자를 맞은 조호정 여사는 처음에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시사IN 신선영
죽산, 일제의 고문으로 손가락 7개 잃어

1899년 강화도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조봉암은 스무 살 때 3·1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때 그의 첫사랑을 만났다. 강화 부농의 딸인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경기여고 전신) 출신 김이옥이다. 둘은 3·1운동 유인물을 등사하고 군중에 돌릴 태극기를 만들었다. 조봉암은 고향 강화에서 3·1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아버지가 형무소에 수감되자 어머니가 자주 면회를 다니면서 장래를 약속하는 사이가 됐다. 그러나 어머니 집안에서 가난한 청년에게 시집보낼 수 없다며 극구 반대했다. 아버지는 하는 수 없이 첫사랑을 뒤로하고 1921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셨다.”

조봉암은 일본에서 엿장수를 하며 주오대학(中央大學) 정경부에 입학한 뒤 박열·김약수 등과 함께 아나키스트 단체 ‘흑도회’를 조직했다. 관념적 운동에 염증을 느낀 그는 조직력을 갖춘 독립운동의 길을 찾아 나섰다. 1925년 경성에서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여하고 박헌영·김단야 등과 함께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했다. 이 무렵 죽산은 혁명 동지 김조이를 만나 결혼한다.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건너간 조봉암은 여운형·홍남표 등과 중국공산당 장쑤성위원회 한인 지부를 결성해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조봉암은 1927년 상하이에서 첫사랑 김이옥과 재회한다. “어머니는 당시 이화여전 음악과에 재학 중이었는데 폐결핵에 걸리자 죽기 전에 첫사랑을 만나겠다고 여비를 꾸려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고 한다. 그토록 보고 싶은 이를 생전 마지막으로 보겠다는 어머니의 뜻을 가엽게 여겨 주변에서 도와줬다고 하더라.”
상하이에서 극적으로 상봉한 두 사람. 이듬해 딸 조호정이 태어났다. 두 사람의 행복은 짧았다. “1932년에 아버지가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신의주형무소로 압송되자 어머니는 어린 나를 안고 강화도로 돌아왔다. 어머니의 폐결핵이 급격히 악화해 1934년 세상을 뜨셨다. 그 뒤 나는 큰어머니(김조이 여사) 손에서 자랐다.”

ⓒ연합뉴스
1959년 2월 조봉암 선생은 간첩죄로 사형 확정판결을 받았다. 사진은 1958년 10월 ‘진보당 사건’ 재판정의 조봉암 선생(맨 왼쪽).
조봉암은 신의주형무소에서 일제의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때 손가락 7개를 잃었다. 7년 동안 복역하다 1939년 출소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태평양전쟁 막바지 수세에 몰린 일제는 1945년 초부터 조봉암과 같은 독립운동 전력자들을 예비검속해 헌병대 감옥에 가뒀다. 딸 조호정은 아버지가 석방되던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해 1월 끌려간 아버지는 해방된 다음 날인 8월16일 풀려났다. 그날 몽양 여운형 선생이 몸소 찾아와 출소하는 아버지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광복 직후 조봉암은 인천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는 과거 조선공산당 활동을 함께한 동지 박헌영이 이끄는 남로당과 결별을 선언한다. 조봉암은 1948년 인천 을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제헌 의원에 당선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를 초대 내각 농림부 장관으로 발탁했다. 당시 남한 인구의 70%가 농민이었고, 이 가운데 80%가 소작농이었다. 소작농은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의 농지개혁을 주창한 남로당계에 동조했다. 조봉암의 평소 지론은, 농사짓는 사람이 땅을 소유해야 한다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이었다. 조봉암 농림부 장관은 전문가 30여 명으로 ‘농정심의위원회’를 만들어 농지개혁법 기초를 마련했다. 지주에게 불리하고 소작농에게 유리한 농지개혁법이 현실로 다가오자, 지주계급이 주축이던 한민당의 반감이 극심했다. “농지개혁법 초안을 마련한 뒤 아버지는 한민당계가 장악한 감찰위원회로부터 보복을 당했다. 장관 관사 수리비에 공금을 사용한 것을 비위 행위라고 몰아세웠다. 결국 6개월 만에 농림부 장관직에서 물러나셨다.”
조봉암은 1950년 5월 2대 국회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재선한 뒤 장택상과 함께 국회부의장에 선출됐다. 이 무렵 대학을 졸업한 조호정은 아버지 선거를 도운 뒤 국회부의장실에 비서로 들어갔다. “장택상 부의장 비서가 김영삼 전 대통령이어서 비서끼리 만난 적도 있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말끔하게 차려입고 다니던 청년이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아버지 문제가 해결될 수 있으리라 기대했으나 소용없었다.”

조봉암은 1952년 무소속으로 제2대 대통령 선거에 도전했다. 당시 이승만 후보는 500만 표를, 조봉암 후보는 80만 표를 얻었다. 이때부터 그는 이승만 대통령 세력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1956년 제3대 대선에서는 진보당 창당준비위원장 자격으로 출마했다. 딸 조호정도 아버지 대선 유세를 적극 도왔다. 노골적인 부정 행위가 판친 선거였지만 조봉암은 득표율 24%에 216만 표를 얻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3선에 도전해 개표 부정까지 일삼던 이승만 후보는 504만 표를 얻었다. 대선 패배 후 조봉암은 수탈 없는 경제, 책임정치, 평화통일 등 3대 정강정책을 내걸고 진보당 창당에 매진했다.
북진통일 대신 평화통일을 내건 조봉암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은 격노했다. 이 대통령은 1956년 8월28일 국무회의에서 “조봉암은 아직도 공산당원임이 틀림없다. 이런 위험분자는 제거돼야 할 것이다”라고 훈시했다. 이때부터 이승만 정권의 정치 공작이 시작됐다.

징역 5년 선고한 1심 재판관 재임용에서 탈락

1958년 1월 초 이승만 정권은 조봉암과 진보당 관계자 전원에 대해 검거령을 내렸다. 조봉암은 자진 출두하던 도중 경찰에 연행되었다. 조봉암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인 그해 2월 이승만은 진보당에 해산명령을 내렸다. 이승만 정권은 평화통일론만으로는 형사처벌이 어렵자, 공작에 나선다. 육군첩보부대(HID) 소속 공작원 양명산을 내세워 죽산에게 접근했다. 양명산이 남북을 오가며 김일성과 조봉암을 연결했다는 것이다. “키가 크고 눈이 부리부리한 양명산 아저씨는 아버지가 상하이에서 독립운동하던 때부터 재정 후원을 하던 사업가”로 조호정은 기억한다.

조봉암 사건 1심 재판의 재판장이었던 유병진 판사는 “조봉암 등이 북의 지령을 받고 이에 호응했다거나 간첩과 밀회했다는 등의 공소사실은 인정되지 않는다”라며 간첩 혐의에 대해서 무죄를 선고했다. 유 판사는 국가보안법 위반 등만 인정해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유 판사는 이 판결로 미운털이 박혀 그해 말 재임용에서 탈락해 법복을 벗었다. 2심 재판에서는 핵심 증인 양명산이 법정에서 양심선언을 했다. 그는 “특무대에 불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맞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조사관들이 시키는 대로 조봉암이 간첩 행위를 했다고 허위 진술했다”라고 법정에서 증언했다. 2심 재판부는 양명산의 진술 번복을 이유 없다며 배척했다. 대법원도 마찬가지였다. 1959년 2월 간첩죄로 사형 확정판결이 났다.

같은 해 7월31일 조봉암은 서울 서대문형무소 교수대 앞에서 유언을 남겼다. “나는 공산당도 아니고 간첩도 아니오. 책임정치, 수탈 없는 경제, 평화통일 이 세 가지를 주장한 죄밖에 없소. 그저 이승만과의 선거에서 져서 정치적 이유로 죽는 것이오. 나는 이렇게 사라지지만 앞으로 이런 비극은 없어야 할 것이오. 이 세상에서 골고루 잘 살고자 한 일인데 이렇게 가니 미안할 뿐이오. 가족들은 알아서 잘 살기를 바랍니다(이원규, <조봉암 평전>).”

죽산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이승만 정권은 4·19혁명으로 붕괴됐다. “4·19혁명이 일어나자 한탄밖에 안 나오더라. 아버지 재판이 조금만 더 길었더라면….” 조호정은 순리대로 죽산에 대한 명예회복이 이뤄질 줄로 믿었다.

하지만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죽산 가족을 연좌제의 고리에 얽어맸다. 유가족에겐 항상 정보과 형사가 따라붙었다. 특히 조호정 여사의 남편 이봉래 영화감독에 대한 당국의 감시는 극심했다. 이씨는 군사정권의 탄압과 감시를 받으면서도 한국예총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유가족에 대한 감시가 느슨해진 때는 1987년 6월항쟁 이후부터였다. 노태우 정권 시절, 처음으로 조봉암에 대한 복권 여론도 일었다. 김대중 정부 때는 조비오 신부, 조아라 광주YWCA 명예회장, 강원룡 목사, 이수성 전 총리 등이 나서서 조봉암 사면 복권을 청원했다. 그러나 매번 재심의 문턱에 걸렸다. 유가족과 죽산을 추모하는 이들은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를 꾸렸다. 2005년 진실화해위원회(진화위)에 재조사 신청서를 접수했다. 진화위는 2007년 9월 결과를 발표했다. “진보당 사건은 1956년 대선에서 200만 표 이상을 얻어 이승만 정권에 위협적 정치인으로 부상한 조봉암을 제거하려는 정권의 의도가 작용해 처형에 이르게 한 비인도적 반인권적 인권유린이자 정치 탄압이었다.”

진화위는 국가의 사과와 적절한 조처 외에 조봉암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할 것을 권고했다. 2011년 재심에서 대법원이 무죄판결을 확정하면서 50여 년 만에 사법적 명예회복이 이뤄진 셈이다. 하지만 진화위가 권고한 적절한 명예회복 조처(건국훈장 추서)와 독립유공자 인정 등은 아직 요원하다. 죽산의 유가족이 바라는 온전한 명예회복도 바로 이것이다. 무죄판결 이후에도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이 권고를 철저히 외면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7월31일 죽산 기일에 역대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추모 화환을 보냈다. 2018년 59주기에도 대통령 추모 화환이 놓였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서훈에 ‘난색’

하지만 서훈심사 주무 부서인 국가보훈처는 죽산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 ‘일제 말기 국방헌금 납부 등 행적 불분명’이라는 이유였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 1941년 12월23일자의 “인천 서경정에 사는 조봉암씨가 국방헌금 150원을 냈다”라는 기사가 근거였다. 유가족은 펄쩍 뛴다. “7년형을 살고 나온 아버지에겐 당시 그런 큰돈이 없었다. 주소도 다르다. 아버지는 당시 일제에 골치 아프고 유명한 독립운동가였다. 정말 그런 돈을 냈으면 총독부에서 대서특필하고 죽산을 크게 이용했을 거다.”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죽산의 독립운동 공적을 보완하는 자료를 추가 제출하면 서훈 심사를 다시 할 수 있다”라고 여지를 남겼다.


올해 아흔한 살, 평생 아버지의 신원을 위해 뛰어온 조호정 여사는 죽산 서거 60주년을 맞아 간절한 염원을 내비치면서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살다 보면 그런 날이 올까. 아버지의 명예가 온전하게 회복되지 않은 채 이대로는 편히 눈을 감을 수 없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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