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로 50대 여성이 찾아왔다. 그는 두툼한 서류 가방에서 소송기록을 여러 묶음 꺼냈다. 첫 번째 묶음은 가해자가 강간을 시도하던 중 팔꿈치로 피해자의 가슴을 눌러 가슴뼈라고 불리는 복장뼈에 금이 가 고소한 기록이었다. 상해 부위, 당사자들이 새벽에 헤어진 후 피해자가 병원에 가서 진단받은 정황, 여타 기록 등을 보니 기소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였다. 하지만 검찰은 가해자에게 불기소처분을 내렸다.

두 번째 묶음과 세 번째 묶음은 피해자가 불기소처분에 대해 이의 제기를 했던 항고와 재정신청 기록이었다. 네 번째 묶음이 무엇인지 물으니, 가해자가 피해자를 무고라고 고소해서 피해자가 피의자로 수사받은 기록이라고 했다. ‘미투’가 거셌던 만큼이나 ‘역투’라고 할 정도로 가해자들의 백래시가 심한 와중이니, 그런 경우구나 싶었다. 그런데 기록 묶음이 더 있었다. 다섯 번째 기록은 민사소송 중인 기록이었다. 피해자가 너무 억울해서 손해배상을 청구했구나 싶었다. 실상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먼저 민사소송을 제기한 기록이었다. 멀리서부터 변호사를 찾아온 그는 4~5년간을 송사로 얼룩진 억울하고 황망한 시간을 살고 있었다. 서울에서 거리가 꽤 되는 지역이라 선뜻 사건을 맡을지 망설여졌다. 멀리서 온 피해자는 간절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받은 검찰의 기재 내용 달라

 

ⓒ정켈

그런데 사건의 시작은 피해자의 ‘반소’(소송을 당한 피고가 원고를 상대로 제기하는 맞소송)였다. 기각되고 끝날 가능성이 높았지만, 피해자는 법정에서 원 없이 피해 사실을 다퉈보고 싶었다. 이렇게 시작한 민사소송 과정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오고 간 맞고소 사건에 대한 수사 기록이 공개됐다. 이를 검토하는 중에 가해자가 제출했던 강간치상 사건에서의 불기소이유서에 중요한 내용이 빠진 걸 발견했다. 검사가 고소 사건을 불기소하며 고소인(피해자)이 무고를 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한 부분이었다. 고소인이 받은 불기소이유서에 있던 내용이 가해자가 제출한 불기소이유서에는 없었다. 같은 사건, 같은 불기소이유서인데 피해자와 가해자가 받은 검찰의 기재 내용이 달랐던 것이다.

가해자가 해당 부분을 삭제하고 사본을 증거로 제출한 게 아닌지 의심됐다. 그래서 고소를 추가로 진행했다. 얼마 전 경찰서에서 하는 고소인 조사 배석을 갔다가,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검찰이 무고에 대해 판단한 내용을 고소인(피해자)에게만 알려줬다는 이야기였다. 이상한 건 이 사건에서는 피해자가 강간치상 사건의 고소인이었다가 무고 사건의 피의자가 되었는데, 피해자가 받은 불기소이유서에는 모두 가해자에 대한 피해자의 무고 여부에 대해 기재되어 있었다. 가해자가 고소를 했던 피해자를 무고라고 고소할 우려가 있어서 그런 혐의가 없다고 검사가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검찰이나 또는 그 중간에서 발급하는 검찰공무원 누군가가 임의로 가해자에게는 이것을 알려주지 않은 것이다. 경찰에 이 부분에 대한 정확한 상황 파악을 요구했다. 기소권이 없고 검찰의 수사 지휘를 받는 경찰이 어느 정도 그 수사를 해내고 처리를 할지 모를 일이다.


2018년은 미투로 뜨거웠던 한 해이지만, 우리 사회가 피해자의 처지에서 볼 때 얼마나 둔감하고 모자랐는지 확인한 해이기도 했다. ‘갈 길이 멀구나’ 새삼 확인한다.

기자명 이은의 (변호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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