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중년의 철도 노동자 세 명이 2015년 여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철도로 시베리아와 대륙을 횡단하여 독일 베를린까지 여행한 이야기다. 그들의 여행 자체도 유쾌하고 발랄하지만, 여행 노정의 중간인 이르쿠츠크까지 구간에서, 우연히 동행한 북한 노동자들과 옌볜 아줌마도 큰 웃음을 준다. 같은 언어를 구사하는 민족이지만, 전혀 다른 정치·사회적 배경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여러 날을 동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한 슬픈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그들만 있었던 건 아니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누빈 민족해방 투쟁의 수많은 전사들, 그리고 그들의 후원자요 가족들이 동승해 있었다. 저자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만주의 동청철도 포함)의 모든 노정에 그들이 뿌린 피눈물을 소환하고 상기시켜주었다. 
거대한 바이칼 호수를 기차 화물칸에서 가축처럼 쭈그려 앉아 바라보던 베를린의 영웅 손기정·남승룡의 사연. 볼셰비키 혁명과 조선민족 해방을 위해 모스크바로 기차를 타고 달려갔던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의 사연. 그리고 일제 간첩이라는 의심을 받아 한밤중에 끌려나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했던 수많은 고려인(카레이스키)들이 그 열차 역마다 병들어 죽은 가족을 묻어야 했던 사연…. 그들 모두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여행한 이야기를 담았다.

〈시베리아 시간여행〉
박흥수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물론 그들의 사연만 있지는 않다. 철도 노동자, 철도 전문가답게 철도 자체, 러시아 철도에 대한 상세한 소개도 덧붙인다. 가령 러시아 기차 명칭에서 번호 앞의 Вл이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에서, IS는 이오시프 스탈린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식이다. 
이들 노동자 세 명을 태운 기차는 국경을 넘어 독일 베를린에 다다른다. 독일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죽임을 당하고 그 시신이 버려진 란트베어 운하의 다리에 도착했다. 책에는 로자의 시신을 던진 지점에 추모 조형물 사진이 나온다. 나는 그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시인 브레히트는 “붉은 로자도 사라졌네/ 그의 몸이 쉬는 곳조차 알 수 없으니/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유를 말했고/ 그 때문에 부자들이 그를 처형했다네”라고 했다. 그리고 책의 전반부, 차가운 바람이 부는 하바롭스크의 우수리 강변에서 죽임을 당한 김 스탄케비츠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를 다시 생각했다.

이 책은 내가 근래 본 최고의 여행기다. 내가 러시아 여행을 하려는 이유가 몽땅 들어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책 앞부분을 읽다가 이번 겨울 시베리아 여행을 바로 포기했다. 위약금도 물었다. 하바롭스크의 겨울이 영하 28℃라니! 동행들에게 얼어죽을 수도 있다고 설득했다. 대신 저자처럼 여름에 가기로 했다. 그때 다시 이 책을 탐독할 것 같다. 

기자명 홍성준 (약탈경제반대행동 사무국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