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림에 소질이 없다. 뭔가 그릴 수 있을 것만 같은 순간에도 막상 필기구를 들면 머릿속에서 그럴싸한 생각만 많아질 뿐이다. 그런 생각들은 도무지 손으로 옮겨지지 않는다. 머릿속 가득한 말들로는 은하수를 그리지만 정작 손은 실개천 하나 이어내지 못한다.
소질이 없는 자가 논평할 일은 아니겠지만 화가는 원시적인 직업임에 틀림없다. 인간이 언어를 배열해 말하기 전부터 농부는 열매를 수확하고 어부가 물고기를 채집했듯 누군가는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날아가는 새와 그 위로 솟은 태양을, 누군가는 부지런히 손으로 옮겼을 것이다. ‘그릴 수밖에 없는’ 순간들은 분명 그때도 있었을 테니까. 말과 생각에 시간을 양보할 새 없이 손이 먼저 움직였던 인류가 있었을 테니 말이다.
모드의 그림들은 바로 그 ‘그림의 시작’에 충실하다. 모드 루이스의 전기라 할 수 있는 〈내 사랑 모드〉를 다 읽어도 그녀의 그림이 예술사적으로 어떤 가치가 있는지, 그 완성도가 어땠는지 알 길은 없다. 다만 이 책은 그녀의 인생을 담담히 들려주며 적재적소에 그림을 함께 보여주는 것에만 최선을 다한다. 친구의 오래된 사진첩을 꺼내 넘기듯 랜스 울러버는 우리에게 모드의 그림집을 펼쳐 보여준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예술가의 전기에서 쉽게 보이는 과도한 찬사나 이해할 수 없는 논평은 없다. 다만 이 책을 읽고 나면, 앨범 속의 사진들이 그렇듯 그녀의 그림들도 그려질 수밖에 없었음을 알게 된다.
모드가 그린 것이라곤 일하는 소, 쉬는 소, 창가의 고양이, 앉아 있는 고양이 그리고 새와 나무와 바다가 거의 전부다. 이따금 인간이 등장하지만 인간을 그리는 데는 영 정성을 기울이지 않는다. 우리가 숲속에 있을 때 실제로 그러하듯, 그녀의 그림 속에서도 나무는 늘 인간보다 울창하다. 모드의 단순한 상상력이 더해지면 그 울창한 녹음 위로 함박눈이 내린다. 사실 책을 읽지 않고 그녀의 그림만 접했다면 쉽게 이해하는 척했을지도 모른다. 풍광 좋은 캐나다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한 화가의 ‘부박한 미학’ 같은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내 사랑 모드〉에서 작가는 모드의 어린 시절이 그녀 스스로 꺼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하고 아름다운 시간이었음을 알려준다.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었다가 친오빠에게서도 버림받은 모드에겐 선명한 비극의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가족과 함께 보낸 짧지만 진한 행복의 시간을 용기 있게 기억하고 있던 이도 모드 자신이었다. 장애가 있던 한 손에 붓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그 아래를 받쳐 무거운 유년의 기억을 쉼 없이 밝은 색으로 풀어내는 그녀의 모습은 ‘그림의 시작’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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