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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가 있는 날’, 별 볼 일 있네

‘문화가 있는 날’은 매달 마지막 수요일과 그 주간에 다양한 문화 혜택을 제공한다. 문화예술 공급자보다 수요자에게 초점을 맞춘 사업이다. 지역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했다.

고재열 기자 scoop@sisain.co.kr 2019년 01월 04일 금요일 제5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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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가 있는 날’ 하면 떠오르는 것은? 아마 대부분 매달 마지막 수요일에 멀티플렉스 극장이 시행하는 영화 관람료 반값 할인을 생각할 것이다. 사실 영화 반값 할인이 ‘문화가 있는 날’을 알리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했지만, 이것이 대표 사업은 아니다. 이 사업의 주된 목적은 ‘문화가 없는 날’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문화를 배달하는 것이다.

지난 12월26일 오후 경기도 양주시의 정우금속공업 강당에 문화배달부 11명이 찾아들었다. 밴드 ‘더플레이’ 멤버들은 김소월의 시 ‘개여울’을 모티브로 70분짜리 뮤직 드라마를 구성해 연주하고 샌드아티스트 신미리씨는 모래 그림으로 이를 풀어냈다. 잔업과 특근이 많아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실현할 수 없었던 이 회사 직원들이 모처럼 문화생활을 만끽했다.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정우금속공업 직원인 이회성씨가 밴드와 영화 <국가대표>의 삽입곡 ‘버터플라이’를 협연할 때였다. 취미로 드럼을 연주하는 이씨는 사전에 밴드와 만나 이 무대를 준비했다. 정우금속공업은 종업원 250여 명 규모의 회사로 직원은 대부분 생산직이다. 더플레이 밴드는 회사 강당의 천장이 낮아 울림이 심하다는 것까지 감안해 공연을 꼼꼼히 준비했다.
ⓒ지역문화진흥원 제공
아트브릿지 팀은 서울 창신동 봉제골목 미싱사들이 자신이 디자인한 옷으로 패션쇼를 열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었다.

더플레이 밴드는 2014년 창단해 수도권에서 공연 배달 활동을 하는 팀이다. 세월호 참사 추모곡 ‘별처럼 멀어진 너에게’를 디지털 음원으로 발표해 주목받았다. 콘서트를 뮤직 드라마처럼 만든 이들의 퍼포먼스는 ‘2018 방방곡곡 문화공감 사업 민간예술단체 우수공연 프로그램’으로도 선정되었다. 이들이 정우금속공업에서 공연할 수 있었던 것은 매달 마지막 수요일에 진행하는 ‘문화가 있는 날’ 사업의 ‘직장 문화 배달’ 프로그램의 공연자로 선정되었기 때문이다(2017년 7월부터는 매달 마지막 주말에도 진행한다). 회사나 공장의 직원 혹은 소방관·경찰관·군인 등 특수직 종사자들에게 ‘문화예술 밥상’을 차리는 ‘직장 문화 배달’ 사업을 통해 41개 단체가 연간 200여 회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문화가 있는 날’ 사업 전체로는 연간 2000여 개에 이르는 문화예술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문화가 있는 날’은 2014년 시작되었다. 박근혜 정부 시절 만들어진 문화융성위원회에서 기획한 대표적인 사업으로 그해 1월 제정된 지역문화진흥법 등이 근간이 되었다. 박근혜 정부의 문화정책은 ‘문화 민주주의’와 ‘문화가 있는 삶’ 등의 구호로 요약되는데 ‘문화가 있는 날’은 이를 구현해내는 수단이었다.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등으로 ‘문화를 망친 정부’로 꼽히는 박근혜 정부의 문화정책 중 이 사업은 드물게 살아남아 문재인 정부로 이어졌다. 
ⓒ시사IN 조남진
지난 12월26일 경기도 양주시 정우금속공업 직원들이 공연을 보며 즐거워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 정책, 문재인 정부가 더 키워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정부의 문화정책을 면밀히 재검토한 결과 ‘문화가 있는 날’ 사업은 오히려 예산을 늘리고 규모를 키웠다. 이 사업을 통해 연간 100억원 이상을 현장 문화예술인들에게 지원한다. 정권이 바뀌었지만 ‘문화가 있는 날’이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문화예술 정책 트렌드와 맞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대체로 문화예술 정책은 공급자 중심에서 수요자 중심으로, 중앙 중심에서 지방분권화로, 하드웨어 중심에서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다.

‘문화가 있는 날’ 사업이 살아남았던 중요한 비결 중 하나는 지역문화 활성화다. 지방의 문화 행정은 그동안 하드웨어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얼마나 큰 문화센터를 지역에 짓느냐가 관건이었다. 문제는 그런 하드웨어를 채울 소프트웨어가 부족했다. 문화공간 활성화 스타트업인 ‘열정에 기름 붓기’ 표시형 공동대표는 “우리도 그렇고 청년 문화기획 단체 중에는 공간 사용료를 내지 못해 행사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지방에는 공간은 있는데 그곳을 사용하려는 기획자와 프로그램이 없어서 활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라고 말했다.

‘문화가 있는 날’ 사업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 바로 적재적소에서 역할을 할 프로그램을 뽑아내는 능력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나 한국콘텐츠진흥원 등 문화예술 콘텐츠 지원 기관도 있고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나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같은 예술인 지원 기관도 있다. 이런 기관과 ‘문화가 있는 날’ 사업단이 차별화되는 지점이 바로 좋은 프로그램을 선정해서 적절하게 배치하는 역량이다. 문화예술 콘텐츠 활성화를 할 때 가장 중요한 능력이 바로 프로그램을 적절한 수요자에게 연결해주는 ‘코디네이팅’ 능력이다. 

2018년 ‘문화가 있는 날’ 사업 중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 프로그램은 성남시에서 진행된 ‘숯골 에코밸리커튼’이었다. ‘지역문화 콘텐츠 특성화 사업’에 지원한 작가 집단 ‘오픈스페이스 블록스’는 인근 가천대학교 미대생과 함께 지역의 아이들을 데리고 그림 수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직접 그린 그림으로 차광막을 만들어 동네에 설치했다. 이 프로그램이 실시된 성남시 원도심은 다가구주택 밀집 지역으로 좁은 골목길에 변변한 가로수도 없던 곳이었다. 작가들은 이 작업을 통해 아이들이 자신의 예술 행위로 뭔가 가치 있는 일을 이뤄낼 수 있음을 경험하게 해주었다.
ⓒ지역문화진흥원 제공
경기도 성남시 태평동 일대에서 진행된 ‘숯골 에코밸리커튼’ 행사.

국내 대표적인 문화예술 기획사인 쥬스컴퍼니가 광주 양림동에서 꾸리는 ‘양림쌀롱’은 2016년부터 지원을 받고 있는 사업으로 지역문화 콘텐츠가 연속 지원을 통해 어떻게 원숙해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양림쌀롱’ 프로젝트는 1930년대 광주에서 살던 청춘의 모습을 재현했다. 재현 배우를 통해 1930년대 사랑을 복원했는데 SNS를 통해 알려지면서 광주를 여행하는 새로운 방식이 되었다.

아트브릿지 팀이 서울 창신동 봉제골목에서 진행한 ‘창신 문화밥상’은 지역 주민과의 협업이 돋보였던 사업이다. 매달 마지막 수요일은 이제 마을잔치 여는 날로 자리를 잡았다. ‘문화가 있는 날’에 맞춰 결혼식을 한 마을 주민도 있다. 아트브릿지 팀은 이곳 봉제골목에서 평생을 보낸 미싱사들이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옷으로 패션쇼를 열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었다. 문화 향유권의 핵심은 관객을 주체로 세우는 것인데 ‘창신 문화밥상’은 이를 성공적으로 구현해냈다.

‘문화가 있는 날’과 같은 프로그램 지원사업은 숙명적으로 나눠먹기가 될 수밖에 없는 위험이 있다. ‘문화가 있는 날’ 사업단은 이를 ‘완전 경쟁 오디션’으로 극복한다. 이 사업에 참여하려면 높은 경쟁률을 뚫어야 한다. 2018년 경쟁률을 보면, 27개 단체를 선정한 지역문화 콘텐츠 특성화 사업의 경쟁률이 11.6대 1, 37개 단체를 선정한 동동동 문화놀이터는 6대 1, 41개 단체를 선정한 직장 문화배달은 7.9대 1에 달했다. 이처럼 경쟁률도 높고 전국을 동일한 기준으로 선발하는 방식이라 참여 팀의 수준도 전체적으로 균질하다.

지난 12월26일 대한상공회의소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2019 문화가 있는 날 공모사업 설명회’에는 전국의 문화기획자 500여 명이 몰려들었다. 문화기획자들에게 이 사업이 매력적인 이유 중 하나는, 성과를 내면 연속 지원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지역문화 콘텐츠 특성화 사업의 경우 진행 단체로 선정되면 첫해에 2000만~5000만원을 지원받고 이듬해 재선정되면 5000만~1억원을 지원받는다. 3년째는 5000만~1억5000만원 중 신청액의 70%까지, 4년째는 5000만~1억5000만원 중 신청액의 50%까지 지원받을 수 있다. 이런 연속 지원 제도가 있기 때문에 프로그램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

오직 오디션만으로 프로그램 진행 팀 선정

‘문화가 있는 날’ 사업은 특히 청년 문화예술인에게 큰 도움이 된다. 신청자의 학력이나 경력, 수상 실적과 관계없이 오직 오디션으로만 평가해서 프로그램 진행 팀을 선정하기 때문이다. 2019년에는 ‘청춘 마이크’ 사업에 37억원, ‘청년 문화이음’ 사업에 24억5800만원이 배정되어 있다. 이 중 ‘청년 문화이음’은 청년 기획자들의 네트워킹을 지원하고 그룹 프로젝트를 후원하는 사업이다.
‘청춘 마이크’ 사업은 훗날 스타가 되는 문화예술인들의 인큐베이터 구실도 한다. 미국 NPR 방송의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에 출연해 화제가 되고 유튜브를 통해 알려진 퓨전국악 밴드 씽씽의 이희문 대표는 자신도 청춘 마이크 사업의 수혜를 입었다고 말한다. “청춘 마이크 사업은 청년 예술가들에게 기회를 제공해 다음 스텝을 밟을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문화가 있는 날’ 사업은 청년 예술가들이 예술가로서 자존감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우리 예술계는 다소 보수적이다. 전통 장르에 속한 것이 아니면 예술로 인정하려 하지 않는 속성이 있다. 일반적인 예술 장르에 포함되지 않는 새로운 예술을 하는 젊은 작가들은 자신이 하는 작업이 예술인지 아닌지 확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동시대 또래들이 공감하지만 ‘이것은 예술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한다. 그런 그들에게 이런 지원사업은 예술가임을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된다.
ⓒ(주)쥬스컴퍼니 제공
‘양림쌀롱’ 프로젝트는 1930년대 광주에서 살던 청춘의 모습을 재현했다.

문화예술위원회의 기존 지원사업과 ‘문화가 있는 날’ 지원사업의 차이는 특정 장르에 치우치지 않고 경계가 없다는 점이다. 우리 국민의 문화생활은 편중이 심하다. 영화와 뮤지컬에만 집중되어 있어 다른 장르는 대부분 침체되었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부분은 융복합이 활발하다는 점이다. 수요자 중심이다 보니 관객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할 수 있는 융복합 시도를 높이 쳐준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가장 등한시되어온 것이 바로 예술과 기술의 융복합이다. 이런 시도를 주도한 그룹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들이었는데 전 정부는 이곳을 ‘좌파 문화예술인 집합소’로 보았다. 이들이 주축인 융복합을 외면했다. 예술과 기술의 융복합과 ‘독립 예술’은 뒷전으로 밀리고 ‘다양성’이라는 단어가 이를 대체했다. 정권이 바뀌면서 융복합을 바라보는 시선도 바뀌고 이런 시도를 하는 예술가들에 대한 지원도 강화되었다. ‘문화가 있는 날’ 사업은 이런 활발한 융복합 시도를 통해 더욱 다양해졌다. 

시행 6년차에 접어들면서 ‘문화가 있는 날’ 사업은 제법 원숙해졌다. 이 사업에 대한 국민 인지도는 시행 첫해인 2014년 34.5%에서 2018년 68.9%로 꾸준히 상승했다. 같은 기간 ‘문화가 있는 날’ 이용 경험도 28.4%에서 59.8%로 올랐다. 사업단이 직접 지원하는 ‘지역문화 콘텐츠 특성화’ ‘청춘 마이크’ ‘동동동 문화놀이터’ ‘직장 문화 배달’은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문화가 있는 날’ 사업단은 2019년 ‘동네책방 문화사랑방’ 사업을 새로 시작한다. 옹진군, 영양군, 울릉군, 청송군, 봉화군, 신안군, 의령군 등 서점 소멸 지역이 늘고 있다는 얘기에 지역의 독립서점을 커뮤니티센터로 활용하는 사업을 기획했다. 이런 사업의 진행 단체 공모를 1월부터 2월까지 두 달 동안 진행한다. 경쟁률이 10대 1 안팎이라 선정되기가 쉽지 않겠지만 문화기획자라면 도모할 가치가 충분히 있는 사업이다. 직장이나 지역에서 ‘문화가 있는 날’ 프로그램을 유치하고 싶은 사람도 신청할 수 있다(‘문화가 있는 날’ 홈페이지 참조, www.culture. go.kr/w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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