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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예멘 난민의 8개월 한국살이

2018년 4월 제주에 도착한 나질라 씨는 예멘을 떠날 때만 해도 이렇게 멀리 올 줄은 몰랐다. 그는 카페와 조선소에서 일하며 하루하루 살았다. 지금 그의 바람은 어디든 정착하는 것뿐이다.

제주/글 김영화 기자·사진 이명익 기자 young@sisain.co.kr 2019년 01월 08일 화요일 제5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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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mb’s everywhere(폭탄이 사방에서 터졌어요).” 나질라 알와하시 씨(34)의 머리 위로 비행기 한 대가 낮게 지나가자 엔진 소리가 지표면을 흔들었다. 그는 몸을 움츠렸다. 제주국제공항 착륙장으로 들어서는 여객기였다. “끔찍한 소리예요. 예멘에서 이런 소음을 자주 들었어요. 폭탄을 싣고 가는 전투기였거든요.”

고향에서는 하늘에 항공기 세 대가 나타나면 이내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한 대는 정찰을 하고, 한 대는 목표물을 확인하고 돌아갔다. 폭탄을 떨어뜨리는 건 마지막 한 대였다. 마을 전체가 흔들릴 정도의 굉음이 울렸다. 사우디아라비아 주도 다국적군의 폭격이었다. 하디 정부와 후티 반군의 대립으로 시작된 예멘 내전은 2015년 3월 이후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등 주변국이 개입하면서 본격화했다(<시사IN> 제574호 ‘왜 예멘 사람들은 난민이 됐을까’ 기사 참조).

ⓒ시사IN 이명익
나질라 씨는 2017년 8월 예멘을 떠나 2018년 4월 제주에 도착했다.

“가정집, 학교, 회사, 결혼식장까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폭탄이 터졌어요.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나갔어요.” 폭탄 세례를 피해 나질라 씨는 사촌과 함께 1년5개월 전 예멘에서 말레이시아로 탈출했다. 소름 끼치는 소음이 아직도 생생하다. 제주국제공항에서 세 번째 항공기가 지나가자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2018년 4월 나질라 씨는 혈혈단신으로 제주에 도착했다. 예멘을 떠날 때만 해도 이렇게 멀리까지 오게 될 줄은 몰랐다. “전쟁을 피해 잠시 안전한 거처가 필요했을 뿐이에요.” 말레이시아는 먼저 떠난 여동생이 있던 곳이다. 예멘인이 비자 없이 체류할 수 있는 국가였다. 그렇다고 난민에게 안전한 나라는 아니었다. 말레이시아는 난민협약 가입국이 아닌 데다 난민을 위한 정책이 사실상 전무했다. 통장을 개설하거나 취업할 수도 없었다. 나질라 씨는 그곳에서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천식과 알레르기 증상이 심해졌다.

“정상적인 생활이 거의 불가능했어요. 집 밖에는 거의 나가지 못했어요.” 가족이 남아 있는 예멘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예멘인 친구로부터 한국의 제주에 대해 들었다. “삶이 안정되기만을 바랐어요.” 말레이시아에 남겠다는 동생과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그는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2018년 상반기에 ‘무사증제도’로 제주에 입국한 예멘인은 모두 561명이다. 그중 549명이 난민 신청을 했다. 나질라 씨의 여권에 ‘체류허가 지역:제주도’라고 적힌 파란색 도장이 찍혀 있다. 난민 신청자의 심사가 진행되는 6개월간 체류와 취업을 허가한 비자다.

예멘인 난민 신청자가 급증하자 정부는 이들에게 출도제한 조치를 내렸다. 2018년 6월1일부터 예멘을 무사증 입국허가 국가에서 제외했다. “여동생을 다시 못 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두려웠어요. 다른 예멘인들도 가족과 떨어지게 됐죠.” 나질라 씨는 난민 심사 결과를 기다리며 게스트하우스를 전전했다. 하룻밤에 1만4000원 정도 하는 4인 객실이었다. 가지고 있던 돈은 계속 줄어들었다. 그 시기 제주 시내 숙소는 예멘인들로 점점 더 붐볐고, 몇몇 예멘인은 노숙을 하기도 했다.

그때쯤이었다. 예멘인들이 제주에 입국했다는 소식이 뉴스를 탄 뒤 각종 루머가 퍼지기 시작했다. ‘무슬림은 테러리스트다’ ‘예멘 남성들이 성범죄를 모의하고 있다’ ‘돈을 벌러 온 가짜 난민이다’ 따위 가짜 뉴스였다. 난민에 대한 공포심과 혐오 정서에 불을 지폈다. 당시 난민 구호 및 지원을 담당했던 천주교 제주교구 이주사목센터 나오미(이하 나오미 센터)는 이들에게 무료로 거처를 제공했다. 나오미 센터에서 일하는 루마니아 출신 크리스티나 수녀는 당시를 떠올리며 “그때 집을 구하는 게 가장 어려웠죠. 빈집이 있어도 계약을 거부했어요”라고 말했다. 난민이 입주한다는 사실을 안 집주인이 뒤늦게 계약을 파기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나질라 씨는 운이 좋은 편이다. 한 주민이 예멘 여성에게 방 한 칸을 무료로 제공하겠다고 나섰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행복했어요. 그동안 숙소를 여기저기 옮겨 다니다 보니 노숙 생활을 하는 것 같았거든요.” 집주인이 운영하는 카페에서 주말 아르바이트도 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커피를 만드는 일부터 청소, 설거지 등을 도맡았다. 평일에는 손님이 떠난 게스트하우스를 청소하거나 외국인 가정의 베이비시터로 일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전쟁으로 직업을 잃기 전까지 예멘에서는 화장품 가게와 옷 가게 직원으로 일했던 터라 손이 빨랐다.

3분짜리 영상 촬영 후 카페 그만둔 사연

ⓒ시사IN 이명익
인도적 체류허가를 받은 나질라 씨가 활동범위 제한이 해제된 자신의 여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던 중 난민을 돕는 한국인 친구 한 명이 나질라 씨에게 인터뷰를 제안했다. 예멘 난민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풀어보자는 취지였다. 당시 ‘난민’은 뜨거운 이슈였다. 2018년 6월 ‘제주도 불법 난민신청 문제에 따른 난민법, 무사증 입국, 난민신청 허가 폐지/개헌’을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71만명의 동의를 얻었다. 7월부터는 서울과 제주 등지에서 ‘자국민 안전과 보호 최우선’을 외치는 난민 반대 집회가 열렸다. 나질라 씨도 이 상황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한국인들이 무서워하는 마음이 이해가 가요. 낯설고 잘 모르니까요. 저는 사람들에게 알려진 사실과 다르다고 설명할 자신이 있었어요.”

‘노 프라블랜드(no problem+land)’라는 이름으로 제주 예멘 난민들의 목소리를 영상과 글로 전달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나질라 씨가 일하던 카페를 배경으로 찍은 3분짜리 영상은 자신과 예멘 내전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인터뷰에서 나질라 씨는 이렇게 말했다. “전쟁 이후 저 스스로 굉장히 많이 변했다고 느껴요. 집 안에 앉아서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거든요. 제 동생들을 지키기 위해 강해져야 했죠. 여자 혼자 다닌다고 걱정하는 소리를 많이 들어요. 그런데 저는 충분히 강하다고 생각해요.”

영상이 SNS로 퍼졌다. 파장은 예상보다 컸다. “이 가게에 예멘 난민이 일한다는 이유로 손님들이 보이콧을 한 거예요.” 영상을 찍은 2018년 9월 이후 카페에는 사람들 발길이 끊겼다. 결국 카페 사장은 손님 눈에 보이지 않는 주방에서 일하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했다. “정말 당황스러웠어요. 그냥 저와 예멘에 대해서 이야기한 게 다였거든요. 한국 사람들에 대해 나쁘게 말한 것도 아니고, 정치적 입장을 표명한 것도 아니었어요.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 수 없었죠.” 나질라 씨는 자기 때문에 가게에 피해가 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또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마침 그때부터 난민 신청자에 대한 1차 심사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법무부 제주출입국·외국인청은 예멘 난민 심사 대상자에 대한 면접심사와 마약검사, 범죄경력 조회 등 신원 검증을 거쳐 2018년 9월부터 결과를 발표했다. 나질라 씨는 10월24일 법무부의 전화를 받았다. ‘인도적 체류허가(G-1).’ 체류기한 1년이 허락됐고, 출도제한 조치 해제가 결정됐다. 인도적 체류허가란 난민법상 난민 인정 요건(인종·종교·국적·정치적 견해 등에 따른 박해)을 충족하지는 못하지만, 강제 추방할 경우 생명에 위협을 받을 위험이 있을 때에 허용된다. 난민 인정자와 달리 가족을 초청할 수 없고, 생계비 지원 및 사회보장을 받을 수 없지만 취업은 할 수 있다. “정말 오래 기다렸어요. 결과에 대해선 만족해요. 적어도 다른 지역으로 나가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으니까요.”

제주에서 취업 허가가 난 일자리 대부분은 일손이 부족한 어업·농업 등이었다. 노동강도가 센 탓에 여성을 선호하는 곳이 거의 없었다. 그는 인도적 체류허가를 받고 난 뒤 전남 목포에 위치한 조선소에서 선박 도색 작업을 할 사람을 찾는다는 소식을 접했다. 선박과 자동차의 부품을 조립하는 쪽은 대부분 남성이 맡지만, 도색 작업은 주로 여성이 맡았다. “선박에 페인트칠을 한다는 얘기만 듣고 곧장 목포로 갔어요.”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선박 내부 층계를 오르내리며 페인트칠을 했다. 그는 시퍼렇게 멍이 든 다리 사진을 보여주었다. 머쓱하게 웃으며 그는 “목포에서 보낸 일주일의 흔적이다”라고 말했다. 선박 모서리 부분에 여러 번 부딪혔다. 일을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전부터 앓고 있던 류머티즘 관절염 통증이 심해졌다. 열흘 만에 다시 제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체류허가 받아도 한국 적응은 또 다른 문제

ⓒ시사IN 이명익
김국희씨(가운데)가 예멘인을 상대로 한국어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인도적 체류허가가 인정되면서 예멘인들은 전국 각지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선택할 수 있는 일자리가 더 많고 관광지인 제주에 비해 물가가 조금이라도 싼 곳을 찾아갔다. 제주출입국·외국인청에 따르면, 2018년 12월5일 기준으로 인도적 체류허가를 받은 362명 가운데 251명이 제주도를 떠났다. 법무부는 12월14일 추가 심사 결과를 발표했다. 12월14일 기준 예멘 난민 신청자 총 484명 가운데 난민 인정 2명, 인도적 체류허가 412명, 단순 불인정 56명, 직권종료 14명으로 집계됐다. 난민 인정자는 언론인 출신 2명뿐이다. 제주출입국·외국인청은 “제3국에서 안정적 정착이 가능한 것으로 판단되는 사람 등 국내 체류가 부적절한 사람은 단순 불인정했다”라고 밝혔다. 난민 불인정을 받은 56명은 30일 이내 이의신청을 하거나 90일 이내 행정심판(소송)을 요구할 수 있다.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6개월 동안 체류허가가 보장된다. 난민 불인정을 받은 예멘인 ㄱ씨는 “평화를 찾아 예멘을 떠나왔는데 이제 다시 돌아갈 수도 없어요. 인도적 체류허가도 받지 못해 제주도에 계속 갇혀 있게 됐으니…”라고 말했다.

인도적 체류허가를 받은 이들에게 적응은 또 다른 문제다.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해 자립하는 예멘인이 있는가 하면, 다시 제주 나오미 센터로 돌아오는 이들도 있다. 크리스티나 수녀는 “대부분 일자리가 하루 10~12시간이고 노동강도도 센 편이라, 나질라 씨처럼 자립 의지가 강해도 여건에 맞는 일을 찾기 쉽지 않아요. 일자리가 생겨도 문화와 언어 차이 혹은 차별로 그만두기도 하죠”라고 말했다.

제주에 다시 돌아온 나질라 씨는 나오미 센터에서 거주하며 병원 치료를 받고 있다. 언제까지 나오미 센터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기에 일자리를 구하려 한다. 일주일에 세 번 제주도민이 진행하는 한국어 교실에도 나간다. 나질라 씨와 같은 예멘인들 열댓 명이 모인다. 2018년 6월부터 한국어 교사 노릇을 한 김국희씨(35)는 “낯선 곳에 어떠한 대비도 없이 오게 된 사람들이잖아요. 가족 없이 혼자 와 있다는 것 자체가 힘든 상황이죠. 주변에서는 왜 굳이 난민을 도와야 하느냐 하는데, ‘난민’이라는 프레임을 지우고 보면 제각기 다른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에요”라고 말했다.

나질라 씨의 외국인등록증 뒤쪽에는 2018년 4월 이후 한국에서의 궤적이 줄줄이 기록돼 있다. 체류허가를 받은 난민 신청자는 주소지를 옮길 때마다 14일 이내에 관할 출입국에 알려야 한다. 등록증에 기록된 거처를 포함해 지금까지 총 일곱 번 ‘이주’를 했다. 짐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지금 미래에 대해서 생각할 여유가 없어요. 병원 치료며 생활비며 하루하루 닥친 문제를 해결해야 하니까요.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어디엔가 정착하는 것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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