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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냥 자본으로 경부철도 놓았다네”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야욕을 지닌 일본은 경부선 철도를 건설해야 했다. 그들은 한국인을 강제로 징발해 공사했다. 철도가 놓이는 땅은 사실상 공짜로 수용하다시피 했다.

김형민 (SBS CNBC PD) webmaster@sisain.co.kr 2018년 12월 26일 수요일 제5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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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경부선 철도는 1904년 12월27일 완성되었다.
위는 경부선 기공식 모습.

1899년 경인선이 준공됐어. 일본이 만든 것이라면 무엇이든 곱게 보지 않았던 대한제국 사람들은 철도를 그리 즐겨 이용하지 않았고 경인선 철도 회사는 만성적자에 시달렸다고 해. 어차피 돈을 벌자고 벌인 일은 아니었어. 일본인들은 고작 32㎞의 경인선 철도와는 차원이 다른 철도 노선을 일찌감치 구상하고 있었단다.

한국 사람들이나 한국 정부가 근대화의 상징인 철도에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본과 기술이 터무니없이 모자랐고 자주적으로 밀어붙일 힘도 부족했지. 일본은 이 지점을 빈틈없이 파고들었고,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욕심을 숨기지 않던 일본에 한국 철도는 최우선으로 장악해야 할 대목이었어. “철도 사업은 조선 경영의 골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기에 다음과 같은 순서를 따라 실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첫째 경부철도, 둘째 경의(서울-의주)철도, 셋째 경원(서울-원산)에서 웅기만(함경북도)에 이르는 철도(국사편찬위원회, <근현대 과학기술과 삶의 변화>).”

철로를 건설하는 것은 일본이었으나 거기에 동원된 이들은 일본인이 아니었어. 그들은 한국인을 강제로 징발해 공사에 나서게 했다. “1904년 7월 시흥군에 철도 역부 8000명을 동원하라는 관찰사의 명령이 내려왔다. (중략) 7월9일 시흥군청에는 도민 수천명이 운집하여 명령을 거두라고 요구했다. 군중의 기세는 흉흉했다. 이 기세에 놀란 시흥군수는 관찰사에게 달려가 동원 숫자를 줄여달라고 청하여 3000명을 할당받았다. 군수는 각 동(부락 단위의 작은 마을)마다 역부 10인씩 차출하라는 명을 내렸다(이수광, <경부선>).”

또 철도가 놓이는 땅은 그야말로 공짜에 가깝게 수용해버렸지. 이런 노래가 나돌 정도로 말이야. “산 뚫고 1000여 리에 지반가(地盤價) 누가 받았나. 군표(어음) 제조비는 500냥 들었다네, 500냥 자본으로 경부철도 놓았다네.”

온갖 우여곡절 끝에 경부철도가 완성된 것은 1904년 12월27일, 본격적인 영업은 1905년 1월1일에 개시됐어. 총연장 441.7㎞. 부산과 대구, 구미를 거쳐 추풍령을 넘어 오늘날의 대전과 천안, 수원을 거쳐 서울로 올라가는 경부선이 한반도를 종단하기 시작한 거야.

이 경부선으로 여러 도시의 운명이 갈렸지. 그 가운데 가장 큰 ‘행운’을 얻은 도시라면 역시 대전(大田)일 거야. 도시는커녕 마을조차 제대로 없던 지역이 별안간 한국의 대표적인 대도시 가운데 하나로 성장하게 돼. 대전이라는 지명은 원래 있지도 않았어. 대전 부근에 있는 회덕 IC로 그 이름이 남아 있는 회덕현(縣) 대전리(里) 또는 대전천(川) 일대의 허허벌판일 따름이었지. 경부선 철도역이 들어서면서 대전이라는 신도시의 역사가 출발을 알리는 기적을 울리게 된 거야.

이원수와 최순애의 애끓는 ‘경부선 연애’


이후 경부선은 눈물과 환호를 뒤로한 채 역사적 인물과 사연을 싣고서 가난과 전쟁을 뚫고 한반도를 종단하게 됐단다.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부산항에서 관부연락선을 기다리는 청년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올라탄 열차였고, 경남 밀양 출신인 김원봉 등 여러 젊은이들이 ‘독립’ 두 글자 가슴에 품고 몸을 실은 기차이기도 했으며, 이토 히로부미의 볼모로 일본행을 택해야 했던 고종 황제의 아들 영친왕도 경부선 열차를 탔지. 경부선 철도에 얽힌 사연이야 그 철로의 자갈보다도 많겠지만, 그중 하나로 아동문학가 이원수와 그 부인 최순애의 사랑 이야기를 짤막하게 해볼까 해.

ⓒ이원수문학관 제공
1980년 문화의 날에 대한민국 문학상을 받은 이원수·최순애 부부.

이원수는 동요 ‘고향의 봄’을 작사했고, 최순애는 ‘오빠 생각’의 작사자야. 놀랍게도 최순애가 ‘오빠 생각’을 방정환 선생이 펴내던 잡지 <소년>에 투고했던 건 우리 나이로 열두 살이던 1925년이었어. 이원수는 이듬해인 1926년 열여섯의 나이에 ‘고향의 봄’으로 등단했으니 데뷔는 최순애가 빨랐던 셈이지.

이원수는 등단 선배 최순애를 눈여겨보고 있었고 열세 살이 된 동요 작가에게 편지를 보낸단다. 무려 10년 동안 이어진 펜팔 연애가 시작된 거야. 이원수의 고향은 경상남도 함안, 최순애의 집은 경기도 수원이었거든. 이들의 편지는 경부선을 통해 배달됐지. 1920년대 말쯤에는 경부선에 주간 1회, 야간 2회씩 우편열차가 왕복했고 그 우편물 무더기 속에서 둘의 사랑은 영글어갔어.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사이였지만 둘은 서로가 평생 함께할 사람임을 확신하게 됐고, 편지로 결혼까지 약속하는 용기를 과시한다. 그러던 끝에 이원수는 부산으로 가서 경부선을 타고 수원으로 올라오기로 했어.

얼마나 설렜을까. 10년간 채팅만으로 누군가와 대화하고 결혼을 약속하고 마침내 상대를 만난다고 상상해보렴. 둘은 편지로 첩보원 같은 약속도 나누고 있었다고 해. “무슨 색깔의 어떤 옷을 입고 나갈 테니 나인 줄 알아보시오.” 최순애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수원역에 나가 약속된 옷을 입은 백마 탄 기사를 기다렸지만 그 기사는 나타나지 않았어. 하필이면 그날 이원수가 불온한 독서회를 조직하고 활동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구속됐던 거야.

감옥에 가면서 이원수는 얼마나 가슴이 찢어졌을까. “몇 시 기차를 타야 합니다! 갔다 와서 잡혀가겠습니다.” 경찰에게 통사정을 하지는 않았을까. 최순애는 또 어땠을까.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이렇게 노래했던 최순애의 ‘오빠’는 방정환과 함께 소년운동과 독립운동에 열심이던 최영주였지만, 최순애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이원수가 투옥된 뒤 ‘오빠’는 이원수로 바뀌었다고 해. “옥에 갇혀 있는 사랑하는 임을 기다리는 노래로 변해, 남몰래 부르며 울었다(<신동아>).”

최순애는 뒷동산에 코스모스를 심어놓고 이원수를 기다렸고 출감하자마자 결혼식을 올렸어. 이때 집안의 반대를 가로막고 결혼을 지지했던 건 바로 최순애의 ‘오빠’ 최영주였다는구나. 둘은 결혼식을 올린 후 바로 경남 함안 산골로 내려갔어. 그 역시 경부선을 되짚는 여정이었겠지. 기차 안에서 이원수는 자신이 지었던 동시를 읊으며 갓 결혼한 아내와의 첫 여행을 기념하지 않았을까. “강 건너 산 밑으로/ 기차가 가네./ 멀리 가느다란/ 연기 뿜고서/ 언덕 위에 올라선/ 어린 두 형제/ 사라지는 연기를 바라봅니다./ 언니 태우고 간 기차/ 말 하나 없이/ 달이 열 번 둥그러도 안 데려오니/ 언니 소식 언제나 들어보나요./ 오늘도 벌판에는 해가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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