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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구금에 고문당했어도 배상받지 못하네

1974년 탈북한 김관섭씨(사진)는 국군정보사령부 소속 ‘대성공사’에서 3년6개월가량 갇힌 채 갖은 고문을 당했다. 김씨는 2015년부터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1심에 이어 2심 법원도 대성공사의 불법성을 인정했으나, 소멸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항소를 기각했다.

김은지 기자 smile@sisain.co.kr 2018년 12월 24일 월요일 제5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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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에서 130만명이 넘는 사람을 대상으로 통일·안보 강연만 4123회를 한 탈북자 김관섭씨(83)는 달변가다. 시사부터 연애까지 대화 소재에 막힘이 없다. 딱 하나, 6073부대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주변을 살핀다. 앞뒤좌우를 확인한 다음 목소리를 낮추고 말을 이어간다.

6073부대는 과거 국군정보사령부 소속으로 ‘대성공사’라는 위장명을 썼던 곳이다. 현재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로 이름을 바꾼 중앙합동신문센터(이하 합신센터)의 전신이다(37쪽 딸린 기사 참조). 이름 그대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국군기무사령부(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 등 정보기관이 합동으로 탈북자를 신문하고 간첩 검거를 하는 방첩 업무를 맡았다(<시사IN> 제296호 ‘그곳은 탈북자의 감옥’ 기사 참조).

1974년 8월26일 탈북한 그는 남한에 오자마자 대성공사로 끌려갔다. 간첩 혐의를 조사한다는 명목이었다. 군은 ‘보호’라고 주장하지만, 당사자는 ‘강제 구금’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김씨는 대성공사에서 3년6개월가량 “수용소 생활을 했다”. 그곳에서 김씨의 번호는 ‘74-2호’였다. 1974년 대성공사에 들어온 두 번째 탈북자라는 뜻이었다. ‘74-1호’는 탈북자 ㄱ씨였다.
ⓒ시사IN 윤무영

안에서 문이 열리지 않는 독방에 수용

‘74-2호’는 안에서는 문이 열리지 않는 독방에서 지냈다. 총을 찬 헌병은 문틈으로 안을 수시로 들여다봤다. 식사는 매 끼니 방으로 넣어줬다. 용변도 방 안에서 해결해야 했다. 정해진 시간에 운동을 나갈 수 있지만 늘 감시하는 군인이 따라붙었다. 김씨가 언제 밥을 먹고 화장실을 가는지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기록됐다. 신문관은 매일 동태일지, 주간·월간 업무일지, 분기별 업무분석, 연간 업무분석을 남겼다.

이는 모두 불법이라는 국가의 판단이 나왔다. 지난 12월12일 김관섭씨가 대한민국을 상대로 낸 2억원 손해배상 소송에 대한 2심 선고에서다. 서울고등법원 민사37부(재판장 권순형)는 1심(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25부 재판장 이흥권)에 이어 불법 구금으로 보았다. 대성공사의 불법성을 공인한 첫 판결이다.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의 국가안보상 필요 등을 고려하더라도, 대성공사 공무원들이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김관섭씨를 대성공사에 3년6개월가량 수용한 것은 그 자체로 위법하다. 뿐만 아니라 이는 헌법이 보장하는 신체의 자유를 중대하게 침해한 불법행위다. 따라서 대한민국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김관섭씨에게 위와 같은 불법행위로 인해 발생한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
ⓒ시사IN 윤무영
김관섭씨가 3년6개월가량 구금과 고문을 당한 옛 대성공사를 찾았다.

재판부는 김관섭씨가 겪은 상황은 법이 정한 범위를 넘어선 게 아니라, 아예 관련 규정이 없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아무런 근거 없이 탈북자라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가뒀다는 것이다. 김씨는 “당시는 탈북자라고도 안 했고 귀순자라고 했는데 1년에 내려오는 사람이 열 명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제대로 된 규정도 없이 대충 처리했던 것 같다. 거기 수용된 사람들이 그걸 따질 형편도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당시 탈북자 김씨를 대성공사로 데려갔던 유일한 근거는 대통령 훈령 28호 군합동신문소 운영규정이었다. 현재 이 훈령은 비공개다. 재판에 진술서를 낸 전직 대성공사 직원 이진우씨(가명)에 따르면, “북한에서 귀순자가 오면 지역 합동신문소에서 즉시 그 사람에 대한 1차 신문을 진행하고 초동수사를 한 뒤 보고하면, 군에서 운영하는 합동신문소(대성공사)로 24시간 이내에 호송하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당사자조차 불법인 줄 모르고 지나가던 시절, ‘간첩’은 모든 걸 마비시키는 주술이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하는 재판이기도 했다. 하지만 소멸시효가 발목을 붙잡았다. 김관섭씨는 대성공사에 1974년 8월부터 1978년 3월까지 있었다. 사건이 마지막으로 발생한 지 37년 가까이 지난 2015년 8월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손해배상 채권에 대한 소멸시효 기간이 지났다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김관섭씨가 대한민국의 제도 및 법체계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등 객관적으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 사유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같은 이유로 김관섭씨의 청구를 기각한 1심에 이어 2심도 김씨의 항소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3년째 이 사건을 맡아온 하주희 변호사(법무법인 향법)는 “재판부가 국가폭력 피해자에 대한 이해가 너무 없다”라고 지적했다. 일반 손해배상 사건처럼 원고를 이해하면 안 된다는 주장이다.
ⓒ시사IN 조남진
김씨는 노태우·노무현 정부에서 훈장을 받았다.

실제로 국회에서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담은 법안이 발의되기도 했다. 지난 19대 국회에 이어 20대 국회에서 인재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고문방지 및 고문 피해자 구제·지원에 관한 법률안’을 냈다. 고문 피해자의 손해배상 청구권에 대한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내용 등을 담았다. 국가폭력 피해자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뒤늦게나마 질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지만, 19대 국회에서는 기간 만료로 폐기되고 20대 국회에서도 계류 중이다.

하주희 변호사가 주장하는 ‘소멸시효에 대한 다른 이해’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대성공사에서 김관섭씨가 겪었던 일을 알아야 한다. 2015년 그가 소송을 하겠다고 결심하게 된 배경에는 ‘유우성 간첩 조작’ 사건이 있었다. 대성공사 기능이 이전된 합신센터에서 유우성씨의 동생 유가려씨는 오빠가 간첩이라는 진술을 국정원 직원들에게 강요당했다고 밝혔다.

유우성씨 남매가 겪은 폭력·회유·협박 등 인권침해로 당시 합신센터는 ‘가짜 간첩 공장’이라는 비판을 샀다. 40여 년 전 김관섭씨가 대성공사에서 겪은 일도 비슷했다. 그도 용기를 냈다. 늦게나마 국가의 사과와 배상을 받고 싶었다.

북한군 중대장(대위)이던 그는 ‘안일부화(간통 등 도덕적으로 지탄받는 죄목을 가리키는 북한 말)’ 혐의 등으로 몰린 1974년 8월 탈북을 결심했다. 그해 8월26일 자정 무렵 바다를 7시간 동안 헤엄쳐 강화도로 들어온 그날부터 대성공사에서 간첩 여부를 조사받았다. 당시 육영수 여사 피살 사건이 일어난 지 열흘 남짓 지난 때여서 간첩 의심이 더욱 짙었다. 대성공사에 들어간 다음 날인 8월27일부터 신문관은 <나는 공작원이었다> <나는 여간첩이었다> 따위 책을 들고 와서 읽게 했다.

밤새도록 고문받고 허위 자백

고문은 8월28일부터 시작됐다. 신문관들은 곤봉으로 김씨의 온몸을 때렸고 입과 콧구멍을 물수건으로 덮은 다음 주전자로 물을 부었다. 밤새도록 고문을 당하다 ‘박정희를 때려잡으러 왔다’고 허위 자백을 했다. 8월29일 서울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가서 제정신을 차리고 허위 자백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고문이 재개됐다(고문을 받았다는 김씨의 주장에 대해 1·2심 법원은 모두 증거가 부족하다며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김씨를 고문했던 사람을 특정해 겨우 찾았지만 고인이 된 뒤였다. ‘수차례 어딘가를 다녀온 김씨가 한동안 걷지 못했고 중정을 갔다 왔다는 점은 헌병들이 다 알았다’라며 당시 근무했던 한 헌병의 진술서를 냈지만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45일가량 폭행 등을 당한 뒤 그해 11월이 되어서야 고문이 멈췄다. 왼쪽 다리를 절뚝이며 방으로 돌아가는 그를 부축하던 헌병의 귀띔이 김관섭씨를 살렸다. 일관되게 진술하라는 말이었다. 그렇게 해서 간첩 혐의를 벗은 그는 “대한민국 만세”를 세 번 불렀다. 이후 김씨는 북한 군사 분야 고급첩보 129건을 제공했다.

김씨는 이후에도 대성공사에서 계속 살아야 했다. 귀순 환영식을 가거나 통일·안보 강의를 다녀도 복귀해야 할 곳은 6073부대였다. 담당자들이 외출하는 김씨를 따라다녔다. 자유라고는 없었다. 김관섭씨에게 대성공사에서의 삶은 고문받은 감옥 생활과 고문 안 받은 감옥 생활로 나뉠 뿐이었다.

고문한 사람에게 도움 청할 수밖에 없었다

3년6개월이 지난 1978년 3월31일에서야 대성공사를 나왔다. 몸과 마음 한편에 대성공사에서 받았던 고문에 대한 분노와 상처가 짙게 남았다. 곧바로 문제 제기를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척박한 남한살이에서 당장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은 대성공사에서 자신을 감시하고 고문하던 이들이었다. 하 변호사는 “김관섭씨뿐 아니라 탈북자 대부분이 겪는 일이다. 일이 생겨서 당장 의논할 대상이 보호관찰자인 국정원·경찰 관계자 등이다. 기댈 곳이 마땅찮은 이들의 인간관계에서는 감시와 보호가 뒤섞인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1977년부터 2000년까지 매년 100~200회씩 통일·안보 강연을 하며 돈을 벌었다. 1981년부터 1992년까지 대북 심리전 방송도 진행했다. 2002년부터는 기무사에서 매달 20만원씩 받았다. 경기도 안산에서 보증금 200만원에 월세 2만원을 내는 LH 임대주택에 사는 기초수급자 김씨에게는 큰돈이었다. 일종의 정보 동향을 제공하는 대가라고 여기며 옛 기무사와 ‘좋은 인연’을 맺어왔다. 노태우·노무현 정부에서 훈장을 받고, 청와대에 가서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을 만났다. 정보기관과 관계를 이어와 가능했다. 자연스레 정보기관이 불편해할 말은 삼갔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다 2015년 소송을 시작했다.

12월12일 오후 2시 2심 선고 시작 직전, 김관섭씨는 하주희 변호사에게 선고가 몇 분 정도 진행되느냐고 물었다. “두 마디만 아니면 된다”라고 하 변호사는 답했다. 항소 기각은 대체로 “주문, 원고 항소를 기각한다. 항소 비용은 원고가 부담한다”로 끝난다.

3분 후 정말 그 두 마디만 듣고 나온 하 변호사의 침묵이 길어지자, 오히려 김관섭씨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변호사님,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애쓴 보람은 없지만 살다 보면 산비탈도 만나고 하는 건데…. 내가 시간이 별로 없어서 가슴 아픈 일이긴 하지만, 대법원으로 가야죠.”

김관섭씨가 재판부에 남긴 탄원서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었다. “제가 귀순 당시 40세였는데 어느새 백발이 되었습니다. 저에게 단 하루라도 아니 단 한 시간이라도 ‘남한에 참 잘 온 것 같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눈을 감도록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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