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라는 딱지를 이토록 공공연하게 붙이고 다니는 건 어떤 의미인가. 이 질문이 내게 심각한 문제가 될 때는 바로 일상에 로맨스가 피어오를 때다. 활동가가 된 뒤 내 연애는 오래 불황을 맞았다. 더는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이 많아진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전보다 인기가 너무 없었다.
섹시한 사람을 만나면 금방 정신을 놓게 됐지만, 대화를 시작하면 금세 피곤해졌다. 앞으로 있을 수많은 싸움을 상상하며 나는 미리 지쳐 포기하곤 했다. 외로움을 참다못해 소셜 데이팅 앱에 비키니 사진과 함께 ‘Yes I am a feminist’ 같은 문구를 올리면 그럴 일은 좀 줄었다. 하지만 어쩐지 너무 올바른 대화는 에로틱해지기 어려웠다.
가끔 섹시하면서도 불편하지 않은 대화를 계속할 수 있는 상대가 있기도 했다. 그들은 내가 하는 활동이 멋지다며 계속 해보라고 날 격려했다. 그리고 이만 급한 일이 있어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하고 연락이 없었다. 더 큰 문제는 이전 연애 경험을 통해 뭐가 틀리는지는 알겠는데 뭐가 맞는지는 당최 잘 모르겠는 거였다. 연애야말로 권력의 문제 아닌가. 평등에 대해 상대와 내가 서로 공감해도 어떻게 도달해야 할지 몰라서 자꾸 헤맸다.
나는 선택하는 사람으로서의 역할에 몹시 서툴렀다. 다른 사람에게 나를 맞추며 호감을 얻는 법은 익혀왔지만 자기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구애하는 일에 대해선 문외한이었다. 남자들은 그런 걸 너무 잘하던데!
불과 3년 전만 하더라도 나는 제대로 된 페미니즘 서적 한 권 제대로 읽어본 일이 없었다. 여성주의적 감수성이라곤 그다지 없던 내가 ‘열혈 페미 전사’가 된 것은 대학 내 성폭력 사건을 정면으로 통과하면서부터다. 도저히 아무것도 안 하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2016년 ‘페미당당’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모르는 게 많아서 두려울 것도 없었다. 강남역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얼마 뒤 페미당당 회의에서 “요즘 같은 움직임은 이전에는 결코 없었다. 한국에 여성주의 정당이 창당된다면, 그건 지금 바로 우리에 의해서다”라고 진지하고 당당히 말한 친구 얼굴을 기억한다.
페미니스트 공동체를 꾸려가는 것도 연애와 비슷한 이유로 어려웠다. 누군가는 목소리가 크고 누군가는 자주 침묵했다. 모두가 제 역할을 하는 상황에서 언론은 꼭 대표를 찾았다(페미당당은 대표 없이 매번 프로젝트별 담당자와 팀원을 꾸려 운영한다). 리더십은 권위와 위계 없이도 잘 작동할까. 정치 세력화는 개개인을 뭉뚱그리지 않고도 가능할까.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면서도 일상을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을까. 서로가 서로에게 폭력적이지 않기란 왜 이토록 어려운가.
‘표준 페미니스트 매뉴얼북’ 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이 늘 우리의 인생과 꼭 맞지는 않을 것이다. 삶은 복잡하니까. 페미당당 내에서도 ‘우리’로 감히 묶기 어려운 각자의 다양하고 복잡한 생각이 얽혀 있다. 페미니즘보다 페미니즘‘들’이라 부르는 게 더 적절하다는 생각도 든다.
지금은 활동을 시작할 때보다 무서운 게 더 많아졌다. 요즘같이 SNS로 개인정보가 빠르게 공유되고 피드백이 오가는 시대에는 더 그렇다. 그래서 예민한 사람으로 오래 남으려면 아주 자주 쉬어줘야 한다. 미쳐버린 페미니스트 말고, 행복한 페미니스트로 지내려면 할 만한 싸움을 잘 골라야 한다.
우리에게 언어가 필요한 때를 지나, 우리에게 상상력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누구도 살아본 적이 없다. 그 밖에 다른 내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잘 모른다. 그때까지 서로의 일상을 위해서, 슬픔과 분노보다 상상력과 유머를 떠올리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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