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보전이나 난민 대책을 위한 국제기구 회의를 취재할 때마다 마음에 남는 일이 있었다. 회의를 주재하는 이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대개 경제적으로 여유 있어 보이고 세련된 백인이었다. 그들이 하는 얘기는 영어에 능통하지 않은 이들이라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상투적이었다. 보편적인 인류 공통의 가치, 나이·종교·성별·인종에 상관없는 인간의 기본권, 열린 사회, 다원화, 언론의 자유, 지속 가능한 발전 등등. 그들은 마치 밀린 숙제라도 하듯 언제나 이런 단어들을 빠르게 조합했다. 모두 중요한 얘기임에 틀림없지만 공허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올해 하반기 미국이나 유럽에서 나온 단행본 또는 잡지에 유난히 많이 등장한 주제가 있다. ‘서구 리버럴리즘은 최후를 맞았는가?’ ‘무엇이 리버럴리즘을 죽였는가?’ ‘민주주의도 따라서 죽었는가?’ 따위 질문을 던지고 답하는 내용이었다. 국제기구의 사회자들이 뱉어내는 단어가 대변하는 리버럴리즘은 그동안 현대 서구 사회를 이끌어온 가장 강력한 힘이자 신념이었다.

ⓒ한성원

1989년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몇 달 전 미국의 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언〉이란 제목의 에세이를 썼을 때 리버럴리즘은 가장 환하게 빛났다. 그때는 많은 사람이 정말로 서구의 리버럴한 민주주의 아래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는 줄로만 알았다. 극단적인 민족주의나 종파, 그리고 파시즘이나 공산주의가 더 이상 역사에 개입하는 일은 없을 줄 알았다. 지금의 현실과 비교해보면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리버럴리즘은 흔히 우리말로 진보라고 해석해 많은 혼란을 빚는다. 좌파 성향의 사람을 리버럴리스트라고 통칭하는 이들이 많은 것은 그 때문이다. 리버럴리즘은 18세기 미국의 독립혁명과 프랑스 혁명기에 영국에서 태동했다. 극단적인 우파 자유주의나 유럽·미국의 대학가를 휩쓸던 사회주의 이념과는 달랐다. 개인의 자유와 인권, 열린 시장과 자유무역, 권력이 제한된 작은 정부, 그리고 표현과 토론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를 지향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는 믿음이었다. 계몽주의의 맥을 잇는 사상이었다.

리버럴리스트들은 지상낙원을 건설하겠다고 약속한 파시즘이나 사회주의에 맞서 서구의 복지체제를 수립해 실제로 인류가 유토피아를 건설할 가능성이 있다는 걸 보여줬다.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면서 파시즘과 공산주의는 몰락한 반면 리버럴 사회는 번영을 구가했다. 리버럴리즘은 서구 사회를 넘어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리버럴리즘이 이룬 성과는 과소평가할 수 없다. 18세기 시민혁명기의 비참함 속에서 리버럴리즘의 기치를 내걸었던 이들이 본다면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릴지 모른다. 당시 30세를 밑돌던 유럽의 평균수명은 지금 70세 이상이다. 극빈자 비율이 80%에서 8%로 떨어졌다. 그동안 전 세계에서 65억명 이상이 빈곤에서 해방되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도 놀랍도록 신장되었다. 이제 많은 나라에서 개인은 어디서 누구와 함께 살 것인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

하지만 정치철학은 과거의 영광에만 머물 수 없다. 거기에 리버럴리즘의 고민이 있다. 유럽과 미국의 유권자들은 그동안 정치를 주도해온 리버럴리스트 엘리트들이 자기의 친구가 맞는지 의심하기 시작한 지 오래되었다. 입만 벌리면 지당한 말씀을 하는 그들이 정작 스스로의 말을 실천할 동력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는지 살펴보는 사람이 늘어났다. 리버럴리스트들이 현실에 안주하고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공정성을 상실했다는 생각에 동의하는 이들이 점점 불어났다.
그 결과 사람들은 리버럴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세상의 미래에도 회의한다. 지난해 여론조사에서 독일인의 36%, 캐나다인의 24%, 프랑스인의 9%만이 미래 삶이 부모 세대의 그것보다 나아지리라고 보았다. 미국에서는 아예 군사정부가 들어서기를 바라는 의견이 1995년 7%에서 지난해 18%로 늘어났다.

리버럴리즘에 대한 시민의 믿음 ‘추락’

결국 선거에서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리버럴리즘에 대한 시민의 믿음이 확고할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들이 벌어졌다. 대저택에서 연료를 펑펑 때고 살면서 입으로는 항상 환경보호를 부르짖어 빈축을 샀던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가 대통령 선거에서 낙마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했을 뿐이다. 하지만 리버럴한 모든 가치를 부인했던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한 뒤 모든 사실은 분명해졌다. 의전에서는 흠잡을 데 없었던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가 내세운 공약이 모두 자잘했다는 게 새삼 두드러졌다. 영국 유권자는 리버럴리스트들이 ‘빛나는 업적’이라고 내세워왔던 유럽연합에서 탈출을 감행했으며, 유럽 곳곳에서 과거 파시스트 정당과 성향이 엇비슷한 포퓰리스트 정당들이 약진하기 시작했다. 결국 유럽의 양심적인 리버럴리스트 정치인의 상징과도 같았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퇴진하는 것으로 사태는 중간 결산을 할 모양이다.

리버럴리스트의 강력한 뒷받침 아래 꽃을 피웠던 서구식 민주주의도 덩달아 퇴조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국제사회의 비난 여론에 아랑곳하지 않고 권위주의 체제를 강화하는 한편 물리력을 동원해 주변국을 압박하고 있다. 중동,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의 신생 경제체제들은 서구식 민주주의보다는 중국이나 러시아 체제에 더욱 매료된 모습이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리버럴리스트들이 구축한 동맹체제와 기구를 키우기보다는 오히려 공격하는 태도를 보인다. 국제 질서는 파시즘과 볼셰비즘을 키웠던 1920년대, 1930년대와 비슷한 혼란 속으로 빠져드는 상황이다.

미국과 유럽의 리버럴리스트가 신뢰를 잃은 까닭은 단순하다. 힐러리 클린턴처럼 도움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살 정책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같은 대학에 가고, 끼리끼리 결혼하고, 한동네에 살고, 비슷한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정치적 감수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보통 사람들의 눈에 부패한 집단처럼 비치는 법조 관련 권력자들과 재계의 엘리트, 대학에서 철밥통을 차고 군림하는 교육계 엘리트와 오히려 성향이 비슷해졌다. 많은 이들이 보수주의자로 변신했다. 그들은 매끈한 표현과 통계수치로 정책을 그럴듯하게 포장할 줄은 알지만 힘든 사람들이 실감할 만한 정책을 만드는 데는 서툴다. 어쩌면 그럴 의지조차 없는지 모른다. 그런 가운데 사람들은 소수가 특권을 누리는 걸 바라보면서 절망했다. 부패한 판사와 변호사들이 오히려 법의 보호를 받았다. 교수들은 열린 사회를 찬양하면서 종신제를 즐겼다. 금융가들은 자신을 고용한 자들이 국민 세금으로 분탕질하는 것을 도우면서 최악의 경제위기를 조성했다. 이런 모든 불의 앞에서 리버럴리스트들은 무력했다. 개혁은 동지들을 배신하고 스스로 특권을 포기해야 가능한 일이 되었다.

리버럴리스트의 미래가 암담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경쟁자라 할 수 있는 포퓰리스트의 한계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리버럴리스트의 편에 서서 책을 쓴 저자들이 내놓은 해법은 비슷하다. 포퓰리스트를 바보 멍청이라고 부르며 화를 내는 데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급진적이고 파괴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 과학과 기술의 진보, 고령화, 젠더 갈등 따위로 눈이 핑핑 돌 만큼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에서 뒤처지지 않는 개혁안을 생각해내야만 한다. 스스로 특권을 내던져야 한다.

정부·여당의 참을 수 없는 안일함

한때 80% 이상 치솟았던 문재인 정부에 대한 지지율이 40%대까지 곤두박질쳤다. 올 것이 왔다고도 볼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끄는 민주당은 한국에서 서구의 리버럴리스트 정당에 가장 가까운 세력이라고 볼 수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대선에서 승리할 무렵 이미 지금의 미국이나 유럽의 리버럴리스트 정당들이 직면했던 유권자의 불신과 마주한 적이 있지 않았던가. 현직 대통령이 탄핵당하고 수감되는 비상 상황을 맞아 잠시 유보됐던 것뿐이다.

대통령과 민주당에 대한 인기 급락은 미국이나 유럽의 리버럴리스트가 고전하는 것과 거의 같은 이유에서다. 북한과의 관계에서는 괄목할 만한 돌파구를 열었고 그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지만 외교가 밥 먹여주지는 못하지 않는가. 고용·세제·복지·교육 등 사람들의 삶에 실용적으로 보탬이 될 만한 분야에서의 성과가 고만고만하다. 정책을 관통하는 빅 아이디어가 도대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하기 힘들다.

과거 민주화운동에 목숨을 걸었던 이들이 주도해 만든 정당치고는 기득권 세력에 대한 공격 역시 무디기 짝이 없다. 미국이나 유럽의 리버럴리스트처럼 립서비스에만 능하다는 비난을 받아도 할 말이 없게 생겼다. 대학생 시절 위장 취업해 노동자와 한 몸이 되어보려고 했던 그 열정을 되새겨야 한다. 지금 정부·여당 내에 청년 실업자나, 파산한 자영업자, 노후 보장이 안 된 노인들이 친구로 생각할 만한 정치인이 누가 있는가. 그보다는 재벌, 판검사, 잘나가는 변호사, 사학재단 실력자들과 가깝게 얽혀 돌아가는 정치인이 더 많은 게 아닐까. 정책을 현장에서 길어 올리지 못하니까 번번이 민생과 유리돼 분노만 자아내는 것은 아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야 한다.

홍준표·김성태·나경원·김진태 등등 이런 사람들을 조롱하고 욕해봐야 무엇하겠는가. 이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걸 자기들 말고 세상에 누가 모르겠는가. 문재인 정부는 다른 여타 정치 세력이 아니라 내부의 반개혁성과 싸워 이겨야만 한다. 과거 김병준씨를 발탁했던, 지금도 내부에 도사린 그 끔찍한 안일함과 말이다.

참고한 활자:〈포린 어페어스〉 〈이코노미스트〉 〈워싱턴포스트〉

기자명 문정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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