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30일 오후 1시까지 캠프킴으로 신분증을 가지고 오세요.’ 국토교통부 용산공원조성추진기획단 소속 사무관에게서 ‘용산 미군기지 버스투어’ 안내 문자가 왔다. 한국 땅이지만 신분이 확인되고 미군 측의 허락을 받은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 용산 미군기지의 현실을 실감하게 하는 문자였다. 국토교통부는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주둔지로 수용된 후 114년 만에 되돌려 받은 것을 기념해 6차례에 걸쳐 용산 미군기지 버스투어를 기획했다.

기자는 1990년대 후반 용산 미군기지에서 2년 동안 근무한 경험이 있다. 집합 장소인 캠프킴은 갤러리로 활용 중이었다. 원래 캠프킴은 용산 미군기지에 배치받은 카투사(KATUSA) 사병들이 기지를 출입할 수 있는 ID카드를 발급받고 TA50(개인 군용 장비)을 지급받던 곳이었다(갤러리로 바뀐 곳은 미국위문협회(USO) 사무실이 있던 자리).

용산공원갤러리 전시회 관람을 마친 일행을 태운 버스는 신용산역 근처의 14번 게이트를 통해 사우스포스트로 들어갔다. 용산 미군기지는 크게 4구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넓은 남쪽의 ‘사우스포스트’, 한·미 연합사령부가 있던 ‘메인포스트’, 맨 북쪽의 ‘캠프 코이너’ 그리고 한강로 건너편의 ‘캠프킴’으로 나뉘어 있다. 지난해 미8군사령부가 평택 미군기지로 이전하고 올해 한·미 연합사령부까지 옮겼지만 네 개 캠프 중 가장 작은 캠프킴의 사용권만 우리에게 넘어온 상태다. 국토교통부는 용산 미군기지를 앞으로 용산공원(국가생태공원)으로 만들 예정이다.

ⓒ시사IN 이명익용산 미군기지 내 일본군 위수감옥 터에서 미군 관계자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곳은 기지 내에서 가장 한갓진 곳이다.

14번 게이트에서는 카투사 병사가 버스에 올라 신분증을 확인했다. 용산 미군기지에는 21개 게이트가 있는데 원래 이곳을 지키는 사람은 미군이 아니라 ‘게이트 가드’라 불리는 한국인이다. 이들이 속한 용역회사가 미군 측과 계약을 맺고 게이트를 지켜주는데, ‘한국을 지키러 온 미군’을 지켜주는 사람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아이러니했다.

게이트를 들어서면 오른쪽에 사우스포스트 벙커 건물이 나온다. 이 벙커는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이 지은 시설이다. 벙커 옆에는 일본군사령부가 있었는데 철거되었다. 광복 후에는 육군본부에서 이 벙커를 사용하기도 했고, 한강 다리 폭파 작전이 결정된 곳도 바로 여기이다. 북한군도 서울을 점령했을 때 이 벙커를 사용한 적이 있다. 국가공원인 용산공원이 조성된 뒤에도 이 벙커는 그대로 남아서 ‘기억의 의무’를 수행하리라 보인다.

용산 미군기지의 미국 대사관 신축 부지,
드래곤힐 호텔 부지, 대사관 직원 숙소 부지는
반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사우스포스트 벙커를 지나 남쪽 방향으로 조금만 가면 미 육군 121종합병원이 나온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에 가려 한강이 보이지 않지만 예전에는 한강이 내려다보였고 일제강점기에는 조선 총독 관저가 있던 곳이다. 인공호수까지 파서 조경을 했던 총독 관저는 아방궁으로 불리기도 했다. 일본군사령부와 마찬가지로 현재는 철거된 상태다. 121종합병원은 미 육군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군병원이다. 한국전쟁 와중에 미 육군은 야전병원(MASH: Mobile Army Surgical Hospital) 체제를 확립했고 그 모태가 되었던 곳이 바로 121종합병원이다. MASH는 미국에서 드라마로도 제작되어 10년 넘게 방영된 바 있다.

121종합병원에서 다음 방문지인 ‘일제 시기 용산 위수감옥’으로 가는 길은 용산 미군기지에서 가장 한갓진 곳이다. 소프트볼이나 야구를 하는 운동장이 있고 길 중간에는 대형 골프 연습장도 있다. 골프 연습장 남쪽에는 9만여 평(약 29만㎡) 규모의 미군 골프장이 있었는데 1992년 이곳을 반환받아 국립 중앙박물관과 용산가족공원을 조성했다.

용산 미군기지 내 주거지 면적은 대략 38%에 이른다. 메인포스트에는 주로 병사들이 이용하는 막사가, 사우스포스트에는 하사관과 장교들이 이용하는 관사가 있다. 사우스포스트 남쪽 일대는 시설물이 적어서 그냥 두어도 바로 공원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버스투어에 참가한 한 시민은 이 풍경을 보고 “미국의 한가한 지방 소도시에 온 느낌이 든다”라고 표현했다.

건물 중 약 8%가 일제강점기 때 건축

버스투어 참가자들은 일제강점기 시절 군 위수감옥이던 곳에서 내렸다. 철수 전까지는 미군 의무부대가 이곳을 사용했다. 담으로 쓰이던 벽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한국전쟁 때 생긴 총탄 구멍이 많았다. 담장 안에는 빈 건물이 몇 동 있는데 그중에는 감옥으로 쓰던 시절 치료(병감)와 취사(푸주)를 하던 건물이 그대로 있었다. 옛 서대문형무소와 마찬가지로 사형수의 시신을 나르던 쪽문은 봉해진 채로 있었다.

용산 미군기지에서 미군들이 사용하는 건물은 모두 번호가 매겨져 있고 세 종류로 구분된다. T로 시작하는 번호가 붙은 건물(임시 시설), S로 시작하는 번호가 붙은 건물(반영구 시설) 그리고 그냥 번호만 매겨진 건물(영구 시설)로 나뉜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임시 건물일수록 지은 지가 오래되었다는 점이다. T로 시작하는 퀀셋 막사(반원형 막사)는 대부분 1950~1960년대 지어졌다. S로 시작하는 건물은 1970~1980년대에 만들어졌다. 유추하면 초기 미군은 용산기지를 임시로 이용한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영구적으로 쓰는 시설로 생각하고 건물을 지었다고 볼 수 있다.

ⓒ시사IN 이명익11월30일 캠프킴 부지 내 옛 미국위문협회 건물에서 ‘용산공원 갤러리’ 개관식이 열렸다.

위수감옥 아래에는 미군 군용차 주차장(Motorpool)이 위치하고 그 옆에 대형 주유소가 있다. 이 주유소의 기름 탱크가 바로 녹사평역 일대 기름 유출의 원흉으로 꼽힌다. 미군이 용산 미군기지에서 완전 철수한 이후에도 기지 내 환경을 복원하는 데 상당한 시일이 걸리리라 예상하는데, 그중 이 기름 탱크가 가장 큰 난관이 될 것 같다.

위수감옥 터에서 좀 더 올라가면 해발 70m의 둔지산 정상이 나온다. 둔지산은 남산에서 한강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의 마지막 봉우리다. 이곳에는 미군 헌병감(군기 유지 및 군사 경찰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부서의 장) 사무실이 있었다. 미군이 감옥으로 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위수감옥 위에 헌병감 사무실이 있다는 것은 미군이 일본군의 부대 배치를 참고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용산 미군기지는 남산에서 두 개의 산줄기가 내려와 부대를 품은 형국인데, 일본인들은 그중 왼쪽 산줄기에 비중을 두고 일본군사령부와 총독 관저를 그쪽에 지었다. 미국인들은 언덕이 좀 더 높은 오른쪽 산줄기에 비중을 두었다. 둔지산 줄기의 마지막에는 미국 대사관 직원들의 숙소 부지가 있다. 언덕 위에서 강을 내려다보는 ‘리버뷰’로 미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주거 형태다. 미군 철수가 완료되어도 이 부지는 반환되지 않는다. 관할도 미국 국방부가 아니라 미국 국무부다.

ⓒ청와대사진기자단2004년 촬영한 용산 미군기지 사우스포스트 전경.
둔지산 정상에서 사람들을 태운 버스는 사우스포스트와 메인포스트를 연결한 고가도로를 지나 미8군사령부 청사와 한·미 연합군사령부가 청사로 쓰던 건물 옆에 내려주었다. 미8군사령부는 일본군이 막사로 쓰던 시설이라 건물에 일본군을 상징하는 별 문양이 남아 있다. 한·미 연합군사령부는 한국 정부가 지어준 것으로 한옥 기와 모양의 지붕을 하고 있다. 한·미 연합군사령부 뒤 언덕 위에는 한·미 합동군사업무단(JUSMAG-K) 건물이 있는데, 미·소 공동위원회 당시 소련군 대표단의 숙소로 이용되었던 곳이다. 이 건물은 일본군 장교의 숙소였다. 용산 미군기지 안 건물 중 약 8%가 일제강점기에 지어졌다. 버스투어에 동참한 신주백 한림대 교수 (일본학연구소)는 “용산 미군기지의 역사는 한반도의 역사이자 동아시아의 역사인 만큼 보전이 중요한 이슈다”라고 지적했다.

용산 미군기지는 작은 자급도시

11월1일 한·미 국방장관은 ‘전시작전권 전환 이후 연합방위지침’에 서명했다. 이 지침에 따르면 한·미 연합군사령관은 한국군 4성 장군이, 부사령관은 미군 4성 장군이 맡기로 한 부분이 눈에 띄었다. 미군이 다른 나라 지휘를 받지 않고 독자적인 지휘권을 행사하는 전통인 ‘퍼싱 원칙’이 깨진 것이라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미군의 우위에 선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옛 한·미 연합군사령부 청사를 한 바퀴 돌며 산책했는데 청사 뒤에 유유히 흐르는 만초천이 버스투어 참가자들의 시선을 붙들었다. 남산에서 내려온 산자락이 양쪽을 둘러싼 형세라 그 가운데에 자연스럽게 개울이 만들어졌다. 만초천은 대부분 복개되었지만 부대 안의 지류는 복개가 되지 않아서 물 흐름을 그대로 볼 수 있었다. 국가공원을 설계한 이로재 건축사무소의 함은아 부소장은 공원을 조성할 때 이곳의 물 흐름을 살려서 활용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둔지산과 만초천 등 용산 미군기지에는 우리가 되찾아야 할 우리 이름이 많다. 미군은 부대시설을 주로 숫자로 표시하지만 체육관과 같은 편의시설에는 한국전쟁에 희생된 미군 사병들의 이름을 붙인다. 도로와 캠프도 이런 식으로 이름을 지었다. 이를테면 미군기지 중 캠프 보니파스(2006년 반환)가 있었는데 이 캠프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때 희생된 보니파스 소령의 이름을 딴 것이다.

메인포스트 한가운데 있는 일본군 병기지창 무기고 터는 용산 미군기지 버스투어 일정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번엔 들르지 않았다. 이 건물이 있던 곳 주변은 미군의 생활 시설이 즐비했다. ‘미8군 클럽’이라고 부르던 클럽하우스, 볼링장, 푸드코트, 체육관, 도서관 등 부대 안에서만 생활하더라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다양한 시설을 구비해놓았다. 클럽하우스 지하에는 극장식 나이트클럽이, 1층에는 슬롯머신 등 위락시설이 있었다.

용산 미군기지는 하나의 자급도시였다. 미국 대학의 분교도 이곳에 강의실을 두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가장 큰 시설은 버스터미널로, 전국 각지의 미군부대로 가는 버스가 이곳에서 운행되었다. 미군 자체 대중교통 체제까지 구축하고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현재 이 터미널은 축소되어 드래곤힐 호텔 옆으로 이전했다.

메인포스트를 다 둘러본 버스는 왕이 직접 기우제를 지내던 남단(南壇)이 있던 캠프 코이너로 이동했다. 남단은 조선 시대에 종묘, 사직단과 함께 중요한 장소로 취급되던 곳이다. 버스투어 안내를 맡은 김천수 용산문화원 연구실장은 “미군들이 남단 터의 석물이라고 보존하고 있는 것은 조선 시대 석물이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발굴 조사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남단 터 외에도 캠프 곳곳에서 조선 시대 석물을 발견할 수 있다.

캠프 코이너는 일본군 야전 포병부대가 주둔하던 곳으로 사우스포스트나 메인포스트와 달리 막사를 제외하고는 생활 편의시설이 거의 없다. 막사도 대부분 비어 있고 부대시설도 마찬가지여서 을씨년스러웠다. 캠프 코이너의 북쪽 일부는 반환되지 않고 미국 대사관 신축 부지로 사용될 예정이다. 이곳을 비롯해 앞서 지적한 미국 대사관 부지, 그리고 버스투어팀이 마지막에 들른 드래곤힐 호텔과 방호부대 부지는 아직 반환 계획이 없다.

단순 숙박시설을 반환하지 않는 미군의 고집

이 중 사우스포스트의 드래곤힐 호텔은 용산 미군기지에서 단일 건물로는 가장 큰 규모이다. 부지도 8만여 평(약 26만㎡)에 이른다. 1987년 미군 전용 숙박시설로 쓰던 서울 종로구 내자호텔 대신에 지어준 곳이다. 4성급인 드래곤힐 호텔은 미군들의 휴양 시설로, 주로 미국 본토에서 오는 신병들이 자대 배치를 받기 전 이곳에서 묵는다. 그래서 인천공항으로 가는 공항버스 정류장이 이 호텔 앞에 있다. 드래곤힐 호텔은 용산 미군기지의 정중앙에 있는데, 미군은 단순한 숙박시설에 불과한 이곳을 반환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114년 전 일본군은 용산 땅 300만 평(약 992만㎡)을 헐값에 수용했다. 이후 일부를 돌려주었지만 일본군은 118만 평(약 390만㎡) 정도로 기지 규모를 유지했고, 미군도 그 대부분을 이어받아 기지로 사용했다. 일본군은 통으로 빼앗고 미군은 통으로 넘겨받았지만 돌려줄 때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반환 대상에 미국 대사관 신축 부지, 미국 대사관 직원 숙소 부지, 드래곤힐 호텔과 방호부대 부지 등이 빠져 있다. 공원화 대상은 약 73만 평(약 241만㎡)이다.

한·미 정상 간 용산 미군기지 평택 이전에 합의한 것이 2003년인데, 한·미 연합군사령부가 이전하기까지 15년이 걸렸다. 건물 1000여 동 중에서 이전이 마무리된 것은 100동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아직도 이전하지 않은 예하 부대가 많아 여전히 기지는 미군이 관리하고 있다. 미군으로부터 관리권을 되돌려 받아 다시 국민의 품에 돌려주기까지 앞으로도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용산공원특별법이 2007년에 제정되었고 종합기본계획이 수립된 것이 2011년인데 아직까지 조성 사업은 첫 삽을 떼지 못했다. 2020년 전시작전권이 반환될 때까지 한·미 연합군사령부 일부도 이곳에 잔류한다. 토양 정화 사업과 문화재 조사 사업을 거쳐 2022년 정도에 본격적인 공원 조성 사업이 시작될 예정이다. 일반인에게 공개되는 시점은 2025년 이후가 되리라 예상된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드래곤힐 호텔 로비는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다. 평택 미군기지로 대부분의 부대가 철수해서 용산 미군기지 내 상점들은 거의 문을 닫았는데도 드래곤힐 호텔의 상점들은 성업 중이었다. 그중 한 곳에서 애플파이 하나와 피칸파이 하나를 사보았다. 카드가 해외에서 결제됐다는 문자가 왔다.

기자명 고재열 기자 다른기사 보기 scoop@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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