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운 아이드 걸스의 마스코트 같은 막내였다. 버섯 같은 머리와 강한 색상의 스타킹에 짙은 눈 화장을 하고 가인은 천진하게 웃곤 했다. 그런 그의 솔로 활동 콘셉트는 매번 으리으리했다. 가인이 노래하는 세계는 늘 돌이킬 수 없고, 대담하고, 관능적이며 위험했다. 그 정점에는 〈Hawwah〉 미니 앨범이 있다. ‘태초의 여성’인 하와가 소재였다. 그는 무대 위를 기어 다니며 뱀을 형상화한 안무를 소화해내기도 했다. 내용은 더 무거웠다. 규범을 거부하고(‘Free Will’), 금기를 넘어 욕망을 추구하며(‘Apple’), 죄의식을 넘어 쾌락을 취하기도(‘Paradise Lost’) 했다.
중저음 중심의 음역이라 케이팝 무대에서 솔로 가수로 효과적일지 의아해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고음에서 숨 가쁜 듯이 위태로운 호소력을 연마해냈다. 개성이 강한 음색이다. 때로는 디테일을 가릴 때마저 있다. 하지만 개성 뒤에서 그의 풍성한 표현력은 늘 가공할 힘을 발휘한다. 그로 인해 유행한 스모키 눈화장처럼, 속내를 알 듯 모를 듯하지만 의미심장해서 이목을 뗄 수 없게 된다.
무거운 이야기만 하진 않는다. 경쾌하게 내달리는 비트와 화려한 오케스트라가 찬란한 꿈결을 만들어내는 ‘피어나’와 ‘Carnival’이 좋은 예다. 마침 이 곡을 작사·작곡한 김이나·이민수 콤비는 아이유의 ‘좋은 날’을 담당하기도 해 자주 비교되기도 한다. ‘정진정명 아이돌’의 작품이랄까. 밝고 아름다우며 꿈과 환상을 전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가인은 미묘한 차이를 선보인다. ‘피어나’는 성적 관계에서 느끼는 여성의 환희를 말한다. ‘Carnival’은 만족과 기대 속에 맞이하는 이별을 노래한다. 곡에서 이별은 추억의 완성이며 새로운 시작이다.
그래서 가인의 작품들은 좋은 여성 서사다. 여성은 사랑받아야만 살 수 있는 듯 여기는 가요계에서, 그는 “나는 거기 있었고 충분히 아름다웠다”라고 노래한다. 욕망의 대상인 여성 스타가 루머를 바라보는 시선(‘진실 혹은 대담’), 데이트 폭력(‘Fxxk U’) 같은 것들을 다룬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태도가 만연한 세계에서, 가인은 응당 입 다물어야 할 것으로 간주되는 것들에 입을 연다. 우리가 “왜”라고 물어보지 않은 하와의 입장처럼. 그는 할 말이 있는 가수다. 그것이 눈화장 속에 배어나오는 진실한 눈빛처럼 자극적인 콘셉트에 실려 전해지곤 한다.
한동안 건강상의 이유로 그는 활동을 멈췄다가, 최근 새 작업을 시작했다고 소식을 전해왔다. 도발과 센세이션이 질료이자 무기였던 가인에게 휴식은 어쩌면 절실했을지도 모른다. 그간의 작품들을 보아도, 평범한 사람이라면 진즉에 버텨내지 못했으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그의 반가운 복귀는 인내심으로 기다려도 좋겠다. 이 용감한 여성 가수에게 더 듣고 싶은 이야기가, 한두 마디가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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