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아이는 □□다. 한 동네에 오래 살면서 내 아이와 또래의 성장을 지켜본 편이다. 유아 시절에는 이 네모 칸에 ‘예쁘’다,라고 썼을 것이다. 초등학생 때에는 살짝 안타까운 마음으로 ‘치인’다,라고 쓰게 된다. 아이가 중학교 진학을 앞둔 요즘은 복잡한 심경을 담아 이렇게 쓴다. ‘아프’다.

유독 순해서 눈에 담기던 아이가 있다. 6학년 2학기가 되면서 그 아이는 쉬는 시간이든 점심시간이든 엎드려 잠만 잔단다. 종종 밤 12시 넘도록 학원 숙제를 해야 해서란다. 축구를 해도 골키퍼만 하려던 아이였다. 달리면서 다른 아이의 공을 빼앗는 게 영 불편해서라고 했다. 어릴 때 길바닥 과자 부스러기에 개미들이 몰려들자 밟을까 봐 발을 떼지 못하던 모습도 떠오른다. 이 ‘착한 아이’가 “집도 싫고 주말도 무섭다”고 친구에게 하소연한다니.

영어 학원에서 레벨 높은 반으로 옮기면서 “빡친다”는 다른 아이는 한동안 손톱을 물어뜯어 열 손가락 다 소독약을 바를 지경이었는데, 요새는 손등도 긁어대는 것 같다. 매번 새로운 딱지가 앉아 있다.

ⓒ박해성

학원 수업이 적은 날 우리 집에 들러 “퐁당퐁당 놀다” 가던, 말을 참 잘하는 아이인데 최근 토론식 논술 수업까지 시작하며 더 시간에 쫓긴다. 열세 살이 여든세 살은 된 것 같다. 기력이 없고 말수도 줄었다. 걱정되어 그 엄마를 따로 만났는데, 그이는 논술 전형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는 얘기만 늘어놓았다.

학원 보내고 공부시키는 게 양육의 중심인 부모들이 있다. 아니 많다. ‘누군들 제 아이 고생하는 게 좋겠는가. 나중에 고생 덜하라고 지금 붙잡고 씨름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논리가 메아리 방(에코 챔버) 효과 같다. 닫힌 방 안에서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의 소리만 듣다 보면 그 소리가 더 크게 울려 퍼지기 때문에 그것이 전부라고 여기게 되는 것 말이다. 그 배후에는 불안과 공포를 조장하는 사교육 시장이 있다. 그저 복습 삼아 공부하는 학원은 찾기 힘들다. 돈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긴 시간 수업하고 숙제도 잔뜩 내준다. 빽빽한 문제집을 끝내야 심화 학습까지 한 것으로, 돈값 한 것으로 믿어진다. 그 과정에서 부모는 사교육 소비자를 넘어 채권자가 되어버린다. 동동대며 학원 알아보고 들인 돈이 얼마인데 “성적이 이것밖에 안 되느냐” “누구 맘대로 그만두느냐”….

수학 학원에서 귀가 팔랑거린 수학 교사

본인도 수학 교사인데 수학 학원에 상담하러 갔다가 물정 모르는 학부모 취급을 받은 한 이웃은 “고등학교 가서는 입시에 쫓기니까 지금부터 진도 빼놔야 한다” “지금 등록 놓치면 중학교 내내 자리가 없다”라는 상담실장의 설명에 귀가 팔랑거리고 가슴이 벌렁거렸다고 했다. 하루 3시간 주 3회가 기본이라는 말에 접었지만 말이다(하루 5시간 수업도 있단다). 자기 아이는 “절대 순순히 그리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다행이다. ‘착하지’ 않아서.

학원에 가서 앉아만 있거나 잠만 자다 오는 것으로 ‘반항’하는 아이들은 그나마 낫다. 꾸역꾸역 다 소화해내는 아이는 결과가 신통치 않거나 잠깐 한눈이라도 팔았다간 심하게 자책한다. 부모가 다퉈도 제 탓이라 여긴다. 여리고 민감한 아이일수록 더 그렇다. 그게 쌓이고 쌓이면 아프다.

초등 고학년부터 중학교까지, 학업에 뜻이 있고 나아가 길이 있다고 믿는 부모들이 ‘포기’를 모를 때다. 부모가 욕심을 접지 못하니 아이들은 생애 처음 가장 힘든 시기를 거친다. 나는 그 결과가 ‘중2병’이라고 본다. 정확히는 ‘중2병’이란 일반론을 내세워 과잉 학습에 시달리는 개별 아이들의 아픔을 그 부모가 은폐하는 것이다.

기자명 김소희 (학부모∙칼럼리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