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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의 몰락 지켜본 시어머니와 며느리

조선 왕조와 대한제국의 마지막을 지켜본 황태자비와 황태손비는 외국인이었다. 영친왕 이은의 아내는 일본인 마사코, 영친왕 아들 이구의 아내는 미국인 줄리아였다.

김형민 (SBS CNBC PD) webmaster@sisain.co.kr 2018년 12월 12일 수요일 제58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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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세계적 영화감독인 이탈리아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여러 작품 가운데 <마지막 황제>는 중국 대륙의 마지막 왕조인 청나라와 만주국의 황제였던 푸이(溥儀)의 기구한 삶을 그려 아카데미상까지 거머쥔 작품이야.

그럼 우리나라의 ‘마지막 황제’는 누구일까. 1926년 세상을 떠난 대한제국의 2대 황제 순종이지. 그는 경술국치 후 ‘이왕(李王)’으로 격하됐으니 ‘마지막 왕’이기도 하다. ‘마지막 황후’라면 순종의 부인 순정효황후 윤씨가 될 것이고, ‘마지막 황태자’라면 후사가 없던 순종의 뒤를 이을 황태자로 책봉됐던 순종의 동생, 영친왕 이은일 거야. 마지막 황태손(이것은 공식적 칭호는 아니고 이 호칭에 반대하는 사람도 많단다)도 있어. 영친왕의 아들 이구가 그야. 그러면 ‘마지막 황태자비’와 ‘마지막 황태손비’도 있지 않겠니. 조선 왕실이자 대한제국 황실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공화국이 서고 남편이 죽은 뒤까지 살아남았던 황가(皇家)의 일원들. 그들은 외국인이었단다.

ⓒ국립고궁박물관
영친왕 이은과 이방자 여사.
ⓒ국립고궁박물관
영친왕의 아들 이구와 줄리아 리.

고종의 일곱째 아들로 형을 제치고 황태자에 책봉된 영친왕은 1907년, 나이 열한 살에 일본 ‘유학’을 떠난다. 허울이 좋아 유학이지 영친왕은 인질이었어. 일본식으로 교육받고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는 동안 마음대로 귀국할 수조차 없는 처지였으니까. 그는 친어머니 엄비(嚴妃)가 세상을 뜨고 나서야 장례식 참석차 고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단다.

어머니 임종도 못한 영친왕은 또 한 번 황망한 일을 겪게 돼. 자기도 모르는 사이 약혼자가 정해지고 발표된 거야. 영친왕의 상대는 메이지 천황의 조카딸인 마사코였어. 마사코는 히로히토 황태자의 배필 물망에도 올랐었지. “‘이럴 수가 있나? 내가 왕세자 전하와 약혼을 하다니! 약혼 사실을 신문에서 알게 되다니!’ 도대체 납득할 수 없는 사실에 머릿속이 휭휭 돌고 눈앞이 어지러워 활자가 커졌다 작아졌다 했다(이방자, <세월이여 왕조여>).”

결혼식은 원래 1919년 1월25일이었어. 하지만 결혼식 나흘 전 고종이 세상을 떠나버렸고, 삼일운동이라는 거대한 사건이 폭발해서 결혼은 1년 미뤄졌지. 1920년 4월28일 신랑 신부를 포함해 그 결혼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거야. 오히려 조선인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지. 아버지 삼년상을 끝내기도 전에 장가를 들다니, 그것도 일본 여자한테! “금일부터 영친왕으로 존칭하기를 폐하리라, 영친왕이던 이은은 부모도 없고 나라도 없는 금수(禽獸)이므로(1920년 5월8일자 <독립신문>).” 마사코 어머니의 회고에 따르면, 결혼식 당일에도 조선 청년의 수류탄 공격이 있었다고 해.

정략결혼한 부부 사이가 원만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영친왕과 마사코, 우리식 이름으로 하면 이방자(李方子) 여사의 사이는 상당히 좋았다는군. 첫아들을 잃은 슬픔과 영친왕이 지닐 수밖에 없었던 고독감을 제외하면 부부는 나름 행복하게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거야.

해방이 왔어. 일본이 패망했지. 영친왕 가족은 다른 일본 귀족 가문들과 함께 일체의 특권과 지위를 박탈당하고 이들 부부는 수십만에 달하는 ‘재일 한국인’이 됐다. 영친왕은 귀국을 열망했지만 자신을 흡사 왕으로 여기던 전주이씨 이승만 대통령은 왕년의 황태자에게 여권조차 내주지 않았지.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한 후에야 영친왕은 식물인간 상태로 이제는 한국인이 된 이방자 여사와 함께 돌아오지만 얼마 못 가 불운한 생을 마쳤어. 박정희 정권은 구황실이 설립한 교육기관을 이방자 여사에게 맡기려 했고, 영친왕의 어머니 엄비가 설립한 숙명학원이 그중 하나였지. 그러나 숙명여대 기존 재단에서 가만히 있지 않았어. “재단 운영진이 이를 가만둘 리 없었다. 이들은 즉각 들고일어났고 언론 및 학생들과 연계해 이방자 여사를 몰아붙였다. ‘쪽바리 여자 나가라!’ ‘왜놈 돌아가라!’ ‘게다짝 물러가라!’ 같은 표어들이 주요 언론 및 숙대 교정 곳곳에 등장했다(2010년 5월1일자 <한대신문>).” 결국 이방자 여사는 재단 참여를 포기하고 말았단다.

“지금부터 남은 인생을 한국 사회가 조금이라도 밝아지고 불행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구원받을 수 있기를 기원하며 한 사람의 한국인으로서 후회 없이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이후 이방자 여사는 장애인 돕기를 실천하며 여생을 보냈어. 얼마 전 네가 읽었던 소설 속 주인공 덕혜 옹주가 일본에서 돌아왔을 때 그녀를 거두고 마지막까지 챙긴 것도 이방자 여사였다. 이방자 여사는 덕혜 옹주의 병간호를 하면서 이렇게 속삭였다고 해. “빨리 깨어나세요. 이대로는 너무나도 일생이 슬퍼요···.”

“이씨 가문 망친 여자”라는 손가락질

ⓒ연합뉴스
1989년 5월 이방자 여사(왼쪽)와 줄리아 여사가 장애인 청소년이 만든 수공예품 바자회를 열었다.

이방자 여사와 영친왕의 아들, 황태손 이구는 미국 유학을 떠났는데, 거기서 여덟 살 연상의 미국인 여성 줄리아와 사랑에 빠져 결혼했어. 옛 대한제국 황족을 국내로 불러들이고 그를 통해 정치적 이득을 얻으려던 박정희 정권 덕택에 황태손과 부인은 국내로 금의환향했단다. 하지만 줄리아 리의 이후 삶은 녹록지 않았지.

인내심이 강했던 줄리아 리는 전혀 상상하지도 않은 나라 한국에 들어와 한복을 입고, 시어머니 이방자 여사를 모시면서 봉사활동으로 일상을 메웠어. ‘마지막 황후’ 순정효황후가 세상을 떴을 때 소복단장하고 장례식장을 지켰던 건 이 고부(姑婦), 외국인이었으나 한국인이었던 두 여성이란다. “그녀가 외국인이 아니었다면”이라는 이방자 여사의 한탄처럼 줄리아 리는 종친들의 환영을 받지 못했어. 외국인인 데다가 아이도 낳지 못했으니까. 망해버린 왕가의 후사가 뭐가 중요하다고 어떤 이들은 이구에게 여자를 소개해주느니 어쩌느니 부산을 떨었고 점차 부부 사이는 멀어졌지. 친척들과 함께한 사업이 부도가 났고 이구는 일본으로 건너가버렸어. 1982년 이구 부부는 25년간의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돼. 줄리아 여사는 이혼을 수락한 결정적 계기를 아프게 토로한 바 있어. “시아버지 산소에 갔을 때 전주이씨 문중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습니다. 저를 가리키며 저 여자가 누군가 하니 이씨 가문을 망친 여자라는 것이었습니다(1982년 6월28일자 <동아일보>).”

마지막 황태손비였던 줄리아 리는 한때 자신을 열렬히 사랑했던 여덟 살 연하의 남편을 마음에서 놓지 않았고 한국을 떠나지도 않았어. 플라자호텔에서 공예점을 운영하며 장애인 고아들을 돕는 활동을 계속했지. 그렇게 벽안의 아내가 마지막 황태손비로서 품위를 지키는 동안 이구는 사기 혐의로 피소되기도 하고 여자 무당과도 동거하다 2005년 세상을 떠났단다. 그래도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손의 장례여서 문화재청장이 주관하고 국무총리가 참석하고 의장대가 장송곡을 연주하는, 근엄하고도 거창한 장례가 치러졌단다.

그런데 이를 멀리서 몰래 지켜보는 백인 노파가 있었어. 줄리아 리 여사였지. 장례식에 정식으로 초대받지 못한 그녀는 먼발치에서 사랑했던 남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았던 거야. 마지막 황태손은 아마도 그 우렁찬 장례식보다도 슬픔과 회한과 사랑을 담아 자신의 영구를 지켜보던 옛 아내가 더 반가웠을지도 모르겠구나.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손비 줄리아 리도 2017년 세상을 떠났다. 대한제국의 마지막을 지켜본 외국인이자 한국인 고부는 그렇게 한국과의 인연을 끝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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