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형 일자리’는 일종의 ‘새로운 노동시장 설계도’다. 지역은 광주광역시, 산업은 자동차산업을 출발점으로 한다. 2014년 6월 지방선거에서 윤장현 당시 광주시장 후보가 ‘사회통합을 통한 광주형 좋은 일자리 1만 개 창출’을 공약하면서 관련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노·사·민·정이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일하고(노동자) 투자하고(자본) 싶은 기업을 지역에 만들어보자는 구상으로 발전했다.

ⓒ시사IN 조남진

한국은 대기업·정규직으로 대표되는 1차 노동시장과 중소기업·비정규직으로 대표되는 2차 노동시장 간 격차가 극심하다. 이른바 ‘노동시장 이중구조’다. 개인의 능력보다 어떤 회사에 취업하느냐에 따라 급여가 결정되고 그 차이도 엄청나다. 더욱이 지불능력이 큰 대기업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 투쟁에 총력을 집중할 수 있지만 중소기업에는 노조가 없는 경우도 많다. 원청 대기업이 자사의 인건비 일부까지 하청업체에 전가해서 중소기업의 성장 및 소속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을 차단한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갈수록 소득불평등과 사회적 갈등이 악화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대기업 따로 중소기업 따로 이뤄지는 기업별 노사관계로는 이를 해결하기 어렵다.

광주시 노·사·민·정이 참여한 사회적 대화 기구 ‘더 나은 일자리위원회’가 2017년 6월 합의한 4대 의제(적정 임금, 적정 노동시간, 원·하청 관계 개혁, 노사 책임경영)에는 이런 문제의식이 담겼다. “광주에 노동자들이 정규직으로 적정 노동시간만큼 일하고 적정 임금을 받는 기업(‘광주형 일자리 모델 기업’)을 설립한다. 자동차 조립업체일 가능성이 큰 이 기업은 하청업체에 대해서도 적정한 하청 대금을 지급해야 한다. 노동자가 경영에 주체적으로 참여한다. 이를 통해 ‘노동자 간’ ‘기업 간’ 격차를 해소하면서 좋은 일자리를 만든다.”

제대로 실현된다면,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를 지역 차원에서 푸는 실험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바람직한 설계도’로 보이는 광주형 일자리 사업이 추진 과정에서 진통을 겪고 있다. 현대자동차가 광주에 투자 의향을 밝히고 사업계획을 구체화하면서 오히려 노동·기업·정부의 시각차가 선명해지는 모양새다. 각각이 원하는 광주형 일자리 구상의 핵심이 다르기 때문이다.

현재 가장 적극적인 주체는 문재인 정부다. 정부·여당에게 광주형 일자리는 단지 특정 지역에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원·하청 및 노사관계 그리고 성장 모델을 염두에 둔 구상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대선 후보 시절, 광주형 일자리가 전국으로 확산되어 지역 일자리 창출의 새 모델이 되도록 정부가 적극 지원하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100대 국정과제에도 관련 내용이 포함됐다. 정태호 청와대 일자리수석이 이번 현대차 투자 유치에 깊이 관여했다고 알려졌다.

광주에서 성공하면 전국 확산 가능

ⓒ시사IN 조남진11월21일 울산 태화강역 강변에서 광주형 일자리 저지 등을 위한 민주노총 울산 총파업대회가 열렸다.

문재인 정부는 특히 최근의 최저임금 인상 여파, 소득주도 성장 관련 여론 등으로 인해 일자리 문제에 사활을 걸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광주형 일자리는, 문재인 정부가 지향하는 노동시장의 ‘선전 모델’이기도 하다. 기존 연공급적 임금체계(오래 근무할수록 많은 임금을 받는 제도)의 개혁, 원청 대기업 노동자의 일정한 양보와 타협을 전제하는 부분이 그렇다. 일단 지역 차원에서 이런 모델이 성공하면 전국으로 확산되리라 정부는 기대한다. 당·정·청은 광주형 일자리를 전폭 지원할 계획이다.

우려의 목소리도 많다. ‘광주형 일자리’는, 정부와 사회가 노동과 중간재 등의 부문에서 공익적인 시장제도를 만들어나가자는 프로젝트다. 시장이 언제나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되는 것은 아니란 점을 감안하면 바람직한 계획이다. 그러나 이런 사업에는 지속적이고 사려 깊은 정부의 지원이 필수적이다. 각각 5년, 4년 임기의 선출직인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권력이 교체되면 광주형 일자리 모델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 사업에 참여하는 이들은 ‘사회협약’의 힘을 말하지만, 한국 사회에 아직 그런 전통이 뿌리내리지 못했다.

더욱이 ‘광주형 일자리 모델 기업’의 경영 책임을 어디에 두느냐도 논쟁거리다. 1대 주주는 광주시(21%, 590억원), 2대 주주는 현대차(19%, 534억원)다. 그러나 모델 기업은 ‘독립 법인’이라는 형식을 취한다. 현대차가 일부 차종의 생산을 모델 기업에 맡기는 형식(위탁 생산)이기 때문에 일정한 비용을 지급하게 되겠지만, 직접 경영하는 것은 아니다. ‘최악의 노사관계’로 악명 높은 현대차가 기존 노사관계의 극복을 사명으로 하는 모델 기업을 경영한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이 회사가 흑자를 낸다면 광주시와 현대차는 배당금만 받으면 된다.

적자는 누가 책임질 것인가? 광주시가 모든 리스크를 안아야 할 수도 있다. 광주시가 현대차에 ‘일정 물량 보장’을 요구하는 이유다. 2014년 지방선거 때 광주형 일자리 공약을 설계한 박병규 전 광주시 경제부시장 역시 지금의 애매한 지배구조에는 불만이다. “처음 구상과 다르다. 현대차가 대주주이자 운영 주체로 참여하거나 시민들이 대주주가 되는 모델을 생각했다.”

모델 기업에 위탁될 차종 역시 논란거리다. 지난 4월까지만 해도 첨단 전기차가 거론되었다. 그러나 실제 협상은 1000㏄ 경형 SUV 10만 대 생산 쪽으로 흐르고 있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경차 10만 대로는 광주형 일자리 구상을 실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자동차 사업의 현실을 간과한 비즈니스 모델이다. 경차 수요가 내수 기준 13만 대도 안 되고, 자동차 생산이 줄어 설비가 남아도는 마당에 2019년 경차 생산능력 50만 대에 10만 대를 더 보탠다는 것은 다 죽자는 이야기다. 자동차산업 고용이 2016년부터 꺾였다. 정부는 (새로운 자동차 일자리 창출이 아니라) 구조조정에 대비해야 할 때다.”

이에 비해 조철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광주형 일자리의 임금수준을 적절히 조정한다면 경차 10만 대로도 시작할 만하다는 의견이다. “경형 SUV도 해외 수요가 있다. 경형 SUV로 (생산) 라인을 만든다 해도 향후 전기차로 전환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만 한국의 경우, (완성차 부문에서) 외국 업체보다 ‘매출 대비 인건비’가 높다. 완성차 업체가 한국 내에 신규로 투자하기가 어려운 이유다. 결국 기업에 이전보다 얼마나 이점이 있는 노동조건일지가 국내 신규 투자를 이끌어내는 데 중요할 것이다.”

“울산과 광주 사이 제로섬 게임 염려”

ⓒ청와대 제공문재인 대통령이 11월22일 새로운 사회적 대화 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 1차 회의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금속노조 현대차지부는 광주형 일자리 모델 기업 때문에 울산 공장의 생산 물량이 줄어들 가능성을 우려한다. 하부영 금속노조 현대차지부장은 “광주에서 생산될 물량만큼 (물량과 고용에) 영향이 있다고 본다”라고 말했다(20~21쪽 기사 참조). 2019년이면 현대차 울산 3공장에서도 경형 SUV 10만 대를 생산하는데, 자칫 울산과 광주 사이에 물량 빼앗기 제로섬 게임이 발생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하 지부장은 11월21일 민주노총 울산본부 총파업 결의대회에서 자동차 산업 위기를 강조하며 “정부는 일자리를 만들 때가 아니라 지킬 때다”라고 말했다. 광주형 일자리의 슬로건 중 하나인 ‘(현대차의) 반값 연봉’에 대해서도 현대차 노조는 문제를 제기한다. 현대차 생산직 초임은 연장근로수당과 상여금 등을 포함해서 연 4800만원이다. 광주형 일자리 초임으로 알려진 3500만원은 현대차 초임의 반값이 아니다.

현대차 노조는 광주형 일자리가 내세우는 ‘원·하청 관계 개혁’에도 현실성이 없다고 본다. 광주형 일자리에 따르면, ‘모델 기업(원청) 따로, 하청기업 따로’ 노사교섭을 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청 노동자와 경영진이 함께 만나 노동조건을 협상한다. 실현되면 원·하청 기업 간 이익 공유 및 노동자 간 소득불평등 문제가 일부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차 노조는 이에 대해 현행 하도급법 등의 위반 소지가 있을 뿐 아니라 원청 모델 기업이 하청과 이익을 공유하리라는 보장도 없다고 본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2006년 산별노조로 전환한 이후에도 노동시장 내 격차가 심화되어온 가운데 현대차 등 원청 대기업 노동조합이 자신의 이익만 챙겼다는 여론 역시 만만치 않다. 더욱이 지금의 기업별 노사관계 아래서 빠른 시일 내에 어떻게 격차를 해소해 양질의 일자리 창출까지 이끌어낼지에 대해서도 사회적 합의가 난망하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조합이 광주형 일자리가 새로운 돌파구가 될 가능성을 무시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현대차 사측의 경우, 광주 모델 기업의 임금과 노동시간, 노사관계 문제의 ‘보장’ 없이는 투자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현대차는 노동조합과 ‘갈등적 담합’이라 불리는 관계를 이어왔다. 고임금을 지급하기 때문에 매출 대비 인건비 비중은 국제적으로 높은 편이지만 노사갈등은 매우 심각하다. 일부 전문가들은 현대차가 자동화에 많이 투자해온 이유가 노동자들의 숙련을 박탈해서 노조의 작업장 권력을 꺾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임금수준을 내리지는 못하니 현대차는 자연스럽게 ‘저숙련-고임금’ 조합이라는 지속 불가능한 노동 시스템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대차 측은 이런 상황에서 국내에 새로 투자하려면, 또 다른 울산공장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현대차가 바라는 광주형 일자리의 원형은 지난 3월7일 광주시 노사민정협의회가 채택한 ‘빛그린산단 내 광주형 일자리 선도모델 실현을 위한 노·사·민·정 공동 결의’에 나와 있다. 여기엔 ‘상생노사발전협의회를 구성해 그 안에서 노사가 제반 근무환경 및 조건을 협의하며, 결정 사항은 최소 5년 동안 유효성을 보장한다’ ‘임금 인상의 경우 소비자 물가상승률 및 경제성장률 같은 객관적 기준을 토대로 설계한다’ 같은 조항이 들어가 있다. 언론에 의해 ‘임금·단체협상 5년 유예’로 해석된 내용이다.

그런데 노동조합을 만들어 임금·단체협상을 벌이고, 파업 등 행동에 돌입할 권리, 즉 노동 3권은 헌법적 권리다. 헌법 제33조 1항은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고 규정해놓았다. 현대차는 사실상 위헌적인 노동조건을 요구한 셈이다. ‘노동’ 몫으로 이 과정에 참여한 윤종해 한국노총 광주지역본부 의장은 “광주시가 노정 TF를 꾸리고 성실히 협의해간다는 전제하에 동의한 것으로, 이후 성실히 협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효로 된 이야기다”라고 말했다.

최저임금법 위반 등 위법성 논란도

ⓒ시사IN 포토금속노조는 광주형 일자리로 울산 현대차 공장(위) 물량이 줄 것을 염려한다.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현대차 투자 유치를 위한 물밑 접촉은 지난해부터 이뤄졌는데, 이 단계를 광주시 담당 공무원 2명이 비밀리에 진행했다. 광주형 일자리 공약을 설계한 박병규 당시 광주시 경제부시장은 배제되었다. ‘사회적 대화’를 진행하는 부서와 ‘투자 유치’를 추진하는 부서가 별도로 굴러간 것이다. 광주시가 문재인 대통령까지 초청해 6월19일 개최하려 했던 투자협약식을 돌연 무기한 연기한 것도 최저임금법 위반 등 ‘위법성 문제’ 때문으로 알려졌다. 이 상황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광주시와 현대차가 협상한 안을 보니 법을 위반하겠다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누구보다 법을 준수해야 할 공무원들과 대한민국 대표 기업 현대차가 법을 지키지 않고 사업을 진행하려 했다”라고 비판했다.

광주시와 현대차가 애초 합의한 초임은 주 40시간 기준 기본급 1800만원에 직무수당 300만원, 연장근로수당 720만원, 연월차수당 100만원, 성과급 80만원을 포함한 3000만원으로 알려졌다. 이 가운데 최저임금에 포함되는 금액은 기본급과 직무수당을 합한 2100만원으로 내년도 최저임금과 큰 차이가 없다. 공장이 가동에 들어갈 예정인 2021년이면 사실상 최저임금에도 못 미친다. 투지유치추진단에 참여하는 박명준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수석전문위원은 “새로운 일자리 모델의 실험인데 노동 3권과 최저임금을 모두 무시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현대차가 이런 실험에 참여하기보다 광주형 일자리를 저임금 노동으로 보면서 아예 노사관계까지 비켜가려 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현대차로서는 저임금이 아니라도 광주 투자를 검토할 이유가 있다. 그룹 차원의 현안인 승계 관련 지배구조 개편, 한전 부지 글로벌비즈니스센터 사업 인허가, R&D 지원 등을 해결하려면 정부의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설령 투자한다 하더라도, 현대차가 ‘적정 임금’ 이외의 의제인 ‘적정 노동시간’ ‘원·하청 관계 개혁’ 등을 냉소적으로 본다면 광주형 일자리의 구현은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대다수 언론은 광주시와 현대차의 불법·위헌적 합의를 지적하기보다 ‘광주시가 노동계에 휘둘렸다’는 식의 비판만 쏟아냈다.

자동차산업 위기 국면에 ‘실패가 예견된 프로젝트’에 세금을 쏟아붓는 것인지, ‘새로운 혁신과 연대를 도모해 노동자 내 격차를 해소하고 일자리도 창출’하는 실험이 될지, 광주형 일자리는 기로에 서 있다. 금속노조 기아차지부 광주지회장 출신으로 광주형 일자리 공약에 참여한 박병규 전 광주시 경제부시장은 “기존 노사관계에서 어떻게 문제를 풀어갈지가 잘 안 보인다. 앞으로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소수다. 나머진 지금이 걱정일 뿐이다. 이에 대해 노동운동이 답을 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광주형 일자리가 던지는 질문이다.

 

 

 

기자명 전혜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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