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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실습생의 죽음, 그 후 1년

현장실습 중 숨진 열아홉 인생은 짧은 위로와 함께 금세 잊혔다. 고 이민호군의 1주기를 맞아 남겨진 부모들이 마주 앉았다.

제주도/글 장일호 기자·사진 조남진 기자 webmaster@sisain.co.kr 2018년 11월 30일 금요일 제5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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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에게는 굳이 행선지를 말하지 않았다. ‘친구 만나러 간다’는 말이 꼭 틀린 것도 아니었다. 청주국제공항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한 시간여 만에 제주국제공항에 닿았다. 무슨 말로 인사를 시작하면 좋을까. 마음속으로 말을 고르고 또 골랐다. “제가 동준 엄마예요.” 50년을 사는 동안 스무 해 가까이를 아들 이름으로 살았다. 강석경이라는 자기 이름은 때때로 잊었다. 아들을 먼저 보낸 지 4년이 넘었지만 강씨는 여전히 ‘동준 엄마’라는 말 외에 자신을 무엇으로 소개해야 할지 잘 모른다.

그건 이상영씨(55)와 박정숙씨(50)도 마찬가지였다. 이씨와 박씨는 각각 ‘민호 아빠’ ‘민호 엄마’로 자신을 소개했다. 그걸로 충분했다. 인사가 끝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손을 부여잡고 어깨를 끌어안았다. 처음 만난 사람 사이를 가르는 어색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민호의 1주기를 사흘 앞둔 11월16일 오전 11시, 민주노총 제주본부에서 세 사람이 마주 앉았다.
ⓒ시사IN 조남진
지난해 11월 현장실습 중 숨진 이민호군의 어머니가 추모공원에 안치된 아들을 찾았다.

이씨와 박씨의 둘째 아들 민호는 2017년 11월19일 숨졌다. 열여덟 살 생일을 나흘 앞두고 있었다. 생수 제조업체 제이크리에이션 현장실습생으로 일하던 중 압착기와 컨베이어벨트 사이에 목과 가슴이 끼였다. 민호가 실습을 시작한 그해 7월부터 11월까지, 불과 4개월 사이 민호는 모두 세 차례 사고를 겪었다. 앞선 두 차례 사고에서 갈비뼈가 다칠 정도의 부상을 입었지만 적절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결국 세 번째 사고가 민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시사IN> 제534호 커버스토리 ‘제주 현장실습생의 마지막 문자, 내일 집 간다’ 기사 참조).

민호는 열흘간 중환자실에 머물렀다. 엄마도, 아빠도 실은 알고 있었다. 사고 이후 확보한 CCTV 속에서 민호는 이미 죽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영상 속에서 민호는 아무런 조치를 받지 못한 채 3분 이상 방치되어 있었다.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았다. 병원에 있는 동안 기자들의 질문에 단 한마디도 답하지 않았다. ‘높은 분’이 찾아와도 동요하지 않았다. 아이를 살리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이씨는 민호가 병원에서 열흘이나 버틴 게 ‘할 말이 있어서’라고 생각한다. “제가 애를 보내면서 애 가슴에 손을 얹고 마지막으로 약속한 게 있어요. 아빠한테 모든 걸 맡기고 좋은 데로 가라. 내가 너 왜 죽었는지 다 밝혀줄게…. 그 전까지는 울지 않으려고 해요.” 다짐이 무색하게도 이씨가 휴지를 뽑아 들고 눈가를 훔쳤다.

‘그날’로부터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다시 공장을 가동하게 되면 유족을 불러 민호가 담당했던 기계가 ‘안전하다’는 확인을 받겠다던 회사는 아무런 통보 없이 지난 1월3일 운영을 재개했다. 부모는 그날 이후 자주 곡기를 끊었다. 온종일 굶어도 배고프다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일주일 넘게 한 끼도 안 먹고 누워 있기도 했다. “지금도 뭐, 먹기는 먹지만 아무 맛이 안 나. 약 먹으려면 밥 먹으라고 하니까 그냥 먹는 거지.” 민호 엄마 박씨는 신경정신과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1년을 그렇게 보냈다.

ⓒ시사IN 조남진
2014년 현장실습 중이던 아들을 잃은 강석경씨(왼쪽)가 고 이민호군의 어머니 박정숙씨(가운데)와 아버지 이상영씨를 11월16일 제주에서 만났다.
강씨도 다 겪어본 일이었다. 산재 인정을 받기까지 강씨 역시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밥 먹고 있는 게 죄인 같지…? 나도 그랬어.” 아침에 창문으로 햇살이 쏟아지면 갑자기 너무 미안했다. 저 햇살을 나만 보고 있구나 싶어서 문을 가렸다. 바람이 볼을 스치면 ‘동준이가 왔구나’ 생각했다. 밥을 짓다가, 설거지를 하다가 울음이 터졌다. 아무도 듣는 사람 없는 벽에, 거울에, 샤워기에 대고 “대체 왜 그래야 했느냐”라고 악을 썼다. ‘그날’로부터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충북 진천 CJ제일제당에서 현장실습생으로 일하던 동준이는 2014년 1월20일 회사 기숙사 옥상에 올라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일터 괴롭힘 때문이었다. 사건 관련자들을 경찰보다 먼저 조사한 회사는 사내에 폭력 사태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동준의 휴대전화에 남아 있는 메시지에는 분임조 동기로부터 당한 폭력의 흔적이 고스란했다(<시사IN> 제338호 ‘학교도 회사도 각서만 내민다’ 기사 참조). 투신 이유가 회사 측의 관리 부실이라는 점을 밝혀 산재를 받기까지 수없이 싸움을 반복해야 했다.

동준이가 끝은 아니었다. 민호가 마지막이 아닐 수도 있다. 불가해한 죽음은 이름과 지역만 바꿔 계속됐다. 현장실습생 ‘김군’ ‘이군’ ‘홍양’ 따위로 요약되는 열여덟, 열아홉의 인생은 ‘명복을 빕니다’ 같은 댓글과 함께 금세 잊혔다. 그들의 남은 인생은 그렇게 기각당했다. 모두가 위로를 건넸지만 누구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남은 가족이 방치됐다. 가끔 모이는 친척들은 당연하다는 듯 아이가 대화의 화제에 오르지 않게 조심했다. 강씨는 남편과도 제대로 대화할 수 없었다. 한번은 크게 싸웠다. “당신 아니면 누구와 동준이 얘기를 하느냐”라고 소리를 질렀다. 남편은 단호했다. “당신이랑 아무렇지 않게 동준이 얘기하면서 있을 수가 없어.” 말하기 시작하면 둑이 터지듯 무너질 것 같다고 했다. 남편 역시 아프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동준의 사고 이후 자연스럽게 동창이나 친구 모임에 나가는 횟수가 줄었다. 같은 또래의 자식 키우는 부모들이 모이는 자리의 안부 인사는 대개 비슷했다. ‘애는 대학 갔어?’ ‘군대 갈 때 됐지?’ 같은 질문이 정말 무서웠다. 한번은 분위기 흐릴 거면 왜 왔느냐는 타박을 ‘뒷말’로 들었다. 다시 모임에 나가기까지 3년이 걸렸다. “내 아들은 먼저 갔지만, 나는 아직 동준이 엄마잖아요. 가서 담담하게 제가 먼저 인사하면서 그 집 아이들 안부를 물었어요. 그러면 되게 조심스럽게 물어요. 어떻게 지내느냐고. ‘그냥 그리워하면서 지내지, 뭐’ 하고 넘어가는 거죠.”

ⓒ시사IN 조남진
제주도교육청 앞에 이민호군의 1주기를 추모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들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시달린다. 때로는 목숨을 위협받는다. 한때는 택시 기사였고, 얼마 전까지 화물차를 운전했던 이씨는 민호의 사고 이후 운전대를 잡는 게 쉽지 않다. 20분 이상 핸들을 잡고 있으면 호흡이 가빠와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다. 강씨도 동준이의 사고 이후 직접 운전하는 일을 삼간다. 운전 중 강한 ‘자살 충동’을 경험했다. 커브 길에서 방향을 트는 대신 직진하고 싶었다. 낭떠러지 끝 강물로 향하던 운전대를 가까스로 멈췄다. 환청을 들었다. “‘엄마, 안 돼!’ ‘엄마, 안 돼!’ 동준이 목소리더라고.” 차를 세워놓고 앉아서 두 시간을 넘게 통곡했다. 대리기사를 불러 차를 끌고 집에 돌아온 이후 지금까지도 운전대를 잡지 못한다.

동준이네도 민호네도 사고 직후 가장 먼저 한 일이 이사였다. 아이의 흔적이 있는 곳에서 살 수 없어 옮긴 곳에서도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본다. 박씨는 침대에서 잠을 못 이룬다. 침대 위가 꼭 ‘관’ 같다. “꿈에서 낯선 사람이 자꾸 나타나서 물어. 그냥 삶을 포기하라고. 그럼 나는 ‘네’ 하고 따라가는 거야.” 그렇게 일어난 밤에는 더는 잠을 못 이루고 하염없이 거실을 걸어 다닌다. 저녁께 불빛이 거실로 쏟아지며 만드는 그림자가 민호처럼 보일 때가 있다. 가서 잡아본다. 손에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민호가 ‘엄마’ 한마디를 못하고 떠난 게 사무쳐요. 자려고 누워 있으면 열흘간 병원에서 봤던 게 고스란하게 떠오르는 거야. 한발 한발 뗄 때마다 생각이 나니까….”

같은 아픔을 겪은 사람만이 이해하고 보듬을 수 있는 슬픔이 있다. 죽은 아이 이름으로 병무청에서 입영통지서가 왔을 때, 그래서 미룰 수 있는 만큼 미루고 싶었던 사망신고를 하기 위해 병원으로, 경찰서로 증명서를 떼러 다닐 때, 사망자 이름으로 핸드폰을 소유할 수 없다고 연락이 와 아이의 전화기를 해지해야 했을 때…. 부모들은 예상치 못했던 무수한 순간마다 무릎이 꺾였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때마다 강씨는 박씨를 능숙하게 위로했다. “20년 가까이 키운 자식이 황망하게 갔는데 그만큼도 안 아프면 안 되지. 우리 아파도 돼. 안 미치고 여기 이렇게 앉아 있는 것도 대단한 거야.” 강씨가 덧붙이는 말에 잠깐 웃음이 번졌다. “내가 이래봬도 자식 보내고 ‘5년차’잖아. 민호 엄마도 이쯤 되면 나 정도 여유는 생겨.”

함께 울어주는 일은 각진 마음의 모서리를 둥글게 만들곤 했다. 강씨는 지난해 1월 LG유플러스 하청업체에서 일하다 사망한 홍수연양의 엄마를 만나면서 ‘나 혼자가 아니구나’라는 힘을 얻었다. 민호군 1주기에 맞춰 굳이 제주에 온 것도, 자신이 받은 힘을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민호군 부모에게 나눠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모두 외딴섬처럼 있으니까. 실습생 사망 사건이 개별 사건 같지만 다 비슷하거든. 자조모임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 싶은데, 일단은 내가 움직여보는 거지.”

강씨는 가족의 만류로 동준이의 마지막 모습을 확인하지 못했다. 그래서 계속 상상했다. 떨어질 때의 마음과 떨어진 후의 모습을. 얼마나 아팠을까, 몇 분 만에 죽은 걸까…. 그 생각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엄마가 계속 슬퍼하는 건 동준이도 싫어하겠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앨범을 모조리 꺼내 동준이의 어릴 때 사진부터 최근 사진까지 핸드폰으로 다시 찍었다. 이제는 언제든 ‘행복한 시절’을 손 안에서 확인할 수 있게 됐다.

물론 아무리 애써도 ‘굳은살’이 박히지 않는 말들이, 행동이 있다. 아이의 죽음은 부모의 의지와 상관없이 곧 ‘돈’으로 연결됐다. 지난해 민호군 장례 중 근로복지공단 직원이 찾아왔다. “애 입관도 안 했는데 와서 한다는 소리가 ‘유족급여로 9100만원 나옵니다’라는 거야.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쫓아왔어. 민호 사건이 이슈가 되니까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고작 한다는 게 그런 식이라고.”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고 부모 마음을 다 이해해주는 건 아니었다. 회사 측과 합의를 종용하는 목소리에 민호네도, 동준네도 시달렸다. 회사랑 싸워봤자 손해라는 말, ‘시체 장사’ 한다는 말, 자식 앞세운 게 훈장이냐는 말…. 모두 ‘아는 사람들’로부터 왔다. 부모 의사와 상관없이 일가친척을 통해 합의 금액이 오갔다. 박씨는 말했다. “회사에서 8000만원을 줄 테니까 합의서에 도장 찍으래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좋다, 우리가 8000만원에 더 얹어줄 테니까 아들 살려내라고.”

“하필 모두 가난한 집 자식들이야”

현장실습생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제도를 개선하고 보완하겠다는 약속이 남발됐다. 지금껏 수많은 아이들이 제 삶을 갈아 넣었지만 거의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28~29쪽 기사 참조). 부모들은 제 아이가 왜 죽었는지 정확하게 안다고 했다. “하필 모두 가난한 집 자식인 거지. 한국 교육 정책은 ‘좋은 대학’ 진학밖에 모르잖아. 그 나머지 학생의 삶에는 관심이 없다고. 일해야 하는 애들까지 신경 쓸 이유가 없는 거야. 나는 요새 젊은 사람들 만나면 돈 없으면 애 낳지 말라고 해. 우리도 그랬어야 하는데….”

강씨는 1996년 동준이를 낳았다. 얼마 뒤 둘째를 가졌다. 6개월 때 유산됐다. 불안정한 직장이 한창 힘든 때였다. 남편도 비슷한 시기를 통과하고 있었다. 차라리 잘됐다 생각했다. 맞벌이로도 빠듯했다. 하나라도 잘 키우자 다짐했다. 제 진로를 스스로 정하는 아들이 대견했다. “내가 참 멍청했어요. 동준이가 마이스터고 간다고, 대기업에 취업했다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몰라요.”

박씨는 1999년 민호를 낳았다. 바로 직전 해에 민호 형을 출산했다. 결혼하고도 한동안 들어서지 않던 아이가 연달아 찾아왔다. 연년생 아들을 키우면서도 힘든 줄 몰랐다. 아버지 이씨의 사업이 망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식자재 유통업을 하던 이씨는 2004년 ‘만두 파동’으로 그야말로 쫄딱 망했다. 빤한 집안 사정을 아이들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둘 다 특성화고에 진학했다. 눈치 빠른 아이들이 고맙고, 또 미안했다.

아이들 이야기가 오가는 동안 강씨가 어렵게 말을 뱉었다. “못할 말이지만, 말할 자식이 또 있어서 부럽다. 나는 동준이 하나잖아.” 이번에는 박씨가 먼저 강씨에게 손을 내밀어 꼭 쥐었다. 강씨는 길에서 거둔 고양이 두 마리와 유기견 세 마리를 들여 기르고 있다. 동준이가 고양이 한 마리 키우자고 조를 때 왜 그렇게 손사레만 쳤던지, 후회한다. 아이에게 못해준 것들을 꼽아 나가다 보면 끝도 없었다.

유족인 부모가 움직여야 ‘겨우’ 한 발짝만큼 변화를 만들 수 있다. 민호네는 약속한 추모비 설립 위치를 놓고 진통을 겪었다. 교육청에 세우려던 애초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현재는 제주시 학생문화회관으로 부지가 정해졌다. “무슨 일만 있으면 추모비 세우라고 하면 어쩔 거냐. 그러다 여기 비석거리 되겠다”라는 말 앞에 이씨는 또 한 번 휘청였다.

“사람들이 나보고 뭘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냐고 물어. 그래서 내가 말했어. ‘나한테 뭘 하라는 게 아니다. 민호 같은 애를 또 만들지 말아야 할 거 아니냐. 그러려면 뭘 해야겠느냐. 취업지원관 예산 확보해라, 노동부 제주지원센터 기능 강화하고 조직 확대해라, 도교육청 노동 담당 조직 확대해라, 노동 교육 강화해라….’ 실컷 듣고는 규정이 없거나, 선례가 없대. 내가 1년 내내 들은 소리다. 내가 하도 어이없어서 그랬다. 시행을 해서 선례를 만들라고.”

강씨가 맞장구를 쳤다. “‘일손이 없다’는 얘기도 공무원들 단골 멘트예요. 그래서 그럼 내가 직접 원인을 밝히겠다니까 그건 또 안 된대. 동준이가 일했던 공장 라인에 들어가 보고 싶은데 자꾸 막히니까 내가 뭐까지 했냐면, 동준이가 다녔던 회사에 외부 용역업체가 있어요. 거기 가서 일을 해야겠다. 가서 직접 보고 문제를 밝혀야겠다. 그래서 내가 서류를 두 번이나 넣었는데 안 뽑더라고(웃음).”

제주 시내에서 약 20분을 차로 달려 도착한 양지공원 제2추모관 116호실 창문으로 빛이 쏟아졌다. 민호의 유골함은 창가 가장 가까이 위치했다. 추위를 많이 타던 아이라 따뜻한 곳에 안치하고 싶었다. 영정 사진을 감싼 액자에는 산타할아버지와 눈 나무가 벌써 도착해 있었다. 엄마는 계절마다 어울리는 액자로 바꿔줄 예정이다.

“민호야, 엄마 왔어.” 박씨가 민호 영정 아래 붙인 바구니 안으로 새 사탕을 넣고 이틀 전 가져다놓은 사탕을 꺼냈다. 박씨의 혼잣말은 계속됐다. “네가 하고 싶었던 거, 못했던 거 하늘에서 다 해. 다 할 수 있어. 거기도 네가 필요해서 먼저 데리고 갔나 보다. 우리는 걱정하지 말고. 좋아하는 햄버거나 좀 많이 사줄걸…. 다음에 올 때 사올게.” 곁에 선 이씨가 말을 보탰다. “거기서는 남들한테 무조건 양보만 하지 마라.”

민호의 부고를 뒤늦게 접한 할머니는 아직 추모관에 와보지 못했다. 100세를 앞두고 있어 거동이 불편하다. 박씨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애 할머니가 어떤 스님한테 얘기를 들었는데 원래 다른 애를 데려갈 거였는데 민호를 잘못 데려갔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랬어. ‘어머니, 민호 덕분에 다른 애가 살았으니까 그것도 다행이네요.’”

강씨가 다시 한번 박씨의 어깨를 감쌌다. 강씨는 영혼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언젠가 자신이 들었던 동준이의 목소리를 박씨에게 들려줬다. “엄마, 내가 사랑하는 엄마. 얼른 일어나 밥 먹고, 평상시처럼 살아요.” 박씨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민호도 그렇게 말하고 있을 거 같아.”

동갑내기 두 엄마는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그제야 서로의 이름을 물었다. 박정숙 옆에 ‘민호 엄마’가, 강석경 옆에 ‘동준 엄마’라는 글자가 나란히 적혔다. “다음에는 동준 아빠도 같이 와요. 이래봬도 우리 애 아빠가 왕년에 관광택시 가이드 아니었소. 제주 한번 제대로 보여줄게요.” 술 한잔 하면서 사는 얘기하다 보면 시간이 또 저만큼 가 있지 않겠냐고, 그러면 지금보다는 덜 아프지 않겠냐고 세 사람이 서로의 팔을 엮으며 추모관을 나섰다. 그 순간 아버지 이씨의 휴대전화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지난해 12월 바꾼 벨소리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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