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0월20일 ‘중거리 핵전력(INF)’ 조약을 파기하겠다고 선언했다. INF 조약은 냉전의 마지막 시기인 1987년 미국과 소련이 500~5500㎞ 사거리의 지상 탄도탄 및 지상 발사 순항미사일의 생산과 실험, 배치를 금지한 핵군축 조약이다. 일부 언론은 미국의 INF 조약 파기 선언이 예측 불가능한 트럼프 대통령의 개인적 성향이 표출된 결과로 본다. 그러나 INF 조약은 그 필요성이 사라지면서 운명을 다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미국의 INF 조약 파기 선언은 단순히 군축 합의 파기가 아니라, 새로운 안보 환경이 형성되는 징후로 봐야 한다. 미국의 조약 파기 선언 이후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러시아는 곧바로 군축을 담당하는 유엔 총회 제1위원회에 INF 조약을 유지하기 위한 결의안을 상정했다. 미국을 비롯한 나토 동맹국들은 이를 부결시켰다. 미국이 INF 조약을 파기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러시아와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 조약이 냉전 이후 형성 중인 새로운 힘의 상관관계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TASS존 볼턴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왼쪽 두 번째)이 10월22일
니콜라이 파트루셰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서기(오른쪽 세 번째) 등과 회담하고 있다.

INF 조약의 파기는 오래전부터 예견되었다. 2007년 2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INF 조약이 더 이상 러시아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미국은 2008년 이후 러시아가 약 2700㎞ 사거리 미사일인 SSC-8의 시험으로 조약을 위반했다고 경고했다. 러시아는 오히려 미국이 이지스 발사체계인 Mk.41 VLS를 폴란드와 루마니아에 배치한 행위를 조약 위반이라고 맞받아쳤다. 이 무기를 철수하지 않으면 INF 조약에서 탈퇴하겠다고 했다.

러시아가 INF 조약을 위반하게 된 실질적 이유는 미국이 아니라 중국의 점증하는 중거리 핵무기 능력 때문이었다. 중국의 중거리 핵무기로부터 가장 위협받게 된 국가는 역설적으로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INF 조약을 유지해야 유럽에서 미국과 나토 국가들의 중거리 핵무기를 묶어둘 수 있지만, 중국의 핵무기에 대응하려면 조약을 위반해야 하는 모순에 빠졌다. 러시아의 이런 이율배반적 처지는 러시아가 냉전시대의 세계적 패권국가에서 19세기적 지역 강국으로 회귀했음을 의미한다. 미국의 조약 파기 선언은 이를 확인한 것이다.

미국도 러시아의 처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에서도 오래전부터 INF 조약이 무의미하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중국이 중거리 핵미사일을 대거 실전 배치해 아시아에서 핵전력 불균형이 심해지는 상황을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과 러시아가 INF 조약으로 손이 묶여 있을 때, 중국은 중거리 핵무기 분야에서 압도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미국은 아시아 지역에서 절대적인 핵전력 열세에 직면하고 말았다. 이후 미국은 중국과 러시아까지 포함하는 3자 조약 체결을 제시했으나 중국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미국이 표면적으로는 러시아의 조약 위반을 문제 삼았지만, 실질적으로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INF 조약을 파기했다고 보는 견해도 이 때문이다.

중국과 북한 상대로 꽃놀이패 쥔 미국

이번 조치가 미국이 중국과 패권 경쟁을 본격화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번 INF 조약의 파기로 미국은 대중(對中) 경제 조치에 더하여 군사적 압박의 수단도 확보하게 되었다.

통상 군사적인 압박은 매우 구조적이고 장기적인 경향을 띤다. 만일 중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구상들이 현실화하면 국제 안보 현안의 우선순위 변화도 불가피하게 될 것이다. 걱정되는 점은 미국이 북핵 문제를 후순위로 밀어내는 것이다. 만일 미국이 중국과 패권 경쟁을 고려한다면 북핵 문제 해결을 차순위로 밀어내는 것은 당연한 순서가 될 수 있다.

미국이 선택할 수 있는 북핵 문제 옵션은 다음 두 가지다. 첫째는 중국 문제와 북핵 문제를 한꺼번에 묶어서 처리하는 것이다. 북핵 문제의 원만한 해결이 어렵다고 판단될 경우, 대북한 봉쇄와 중국에 대한 압박을 동시에 추진할 수 있다. 둘째는 중국에 대한 압박과 북핵 문제 처리를 별도로 추진하는 것이다. 만일 북핵 문제가 북·미 간 협상으로 정리될 수 있다고 판단한다면, 북한과 중국을 분리할 수 있다. 북한이 최소한 미·중 갈등에서 중립적인 것만으로도 미국으로서는 성공이다. 만일 북한을 미국 편에 서게 한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CHINESE MILITARY REVIEW중국 YJ-62 장거리 크루즈(ACSM)는 280km 이상 떨어진 목표물을 파괴할 수 있다.

미국이 어떤 옵션을 선택할지는 북·미 대화의 진전 여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지금까지 북한은 외교 협상에서 신뢰할 수 있는 상대임을 보여주지 못했다. 북한 처지에서도 미국을 무조건 믿기는 어렵다. 미국과 북한은 서로 불신의 벽 건너편에 서 있다. 미국과 북한 간에 오가는 설전과 교착상태는 이런 불신의 벽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동북아 및 한반도 안보 상황을 어떻게 이끌어갈지 결정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키를 가진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이 중국에 대한 견제와 북핵 문제라는 카드를 가지고 꽃놀이패를 행사할 수 있는 가장 유리한 전략적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북핵 협상이 잘되어도 좋고 잘되지 않아도 괜찮다.

북핵 협상이 잘되지 않아도 미국에 유리한 까닭은 무엇일까? 미국은 이런 상황도 중국을 압박하기 위한 방법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북핵 협상 실패 시 북한의 핵위협을 명분으로 중국을 겨냥한 강력한 군사 대응조치를 할 수 있다. 먼저 괌과 한반도에 이르는 선에 제1격과 제2격을 위한 핵무기의 중첩적 배치를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이 그런 상황을 고려하여 INF 조약의 파기를 선언했다면 지나친 추측일까?

미국이 중국에 대한 핵무기 배치를 고려한다면, 전략적으로 한국은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중국의 턱 밑에서 지상 발사가 가능한 중거리 핵무기를 배치할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한국에 핵무기를 배치한다면, 중국이 느끼는 부담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미국이 중국을 압박하기 위해 북핵 협상을 오히려 결렬시킬 수도 있다. 북핵 문제 해결보다 한국에 핵무기를 배치하여 중국을 억제하는 편이 더 중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언제 어떻게 방침을 바꿀지 모른다. 미국에게는 중국이 상수이며, 북한은 종속변수에 불과하다.

북·미 간 핵협상이 결렬되면, 미국이 요구하기 전에 한국 내부에서 먼저 핵무기 배치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이미 국내 정치권에서 미국의 전술 핵무기를 배치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있었다. 그렇게 될 경우, 미국은 아무런 정치적 비용 부담 없이 한국에 핵무기를 배치하고 중국을 견제할 수 있다. 미국의 어떤 전략가가 이런 기회를 놓치겠는가? 북·미 간 대화 결렬은 미국의 강경파들이 바라는 옵션일 수도 있다. 존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중국·북한·이란·러시아가 모두 참여한 중거리 핵무기 군축 조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북핵 협상 결렬을 바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중국의 처지를 한번 생각해보자. 중국은 어차피 미국이 군사적으로 압박을 가한다면 미국과 북한의 협상이 결렬되는 게 훨씬 유리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북·미 관계가 개선되면 북한을 완충지대로 이용하던 중국의 전통적 전략이 용도 폐기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은 중국이 감당하기 어렵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북·미 간 대화가 결렬되어 북한을 자신들의 완충지대로 계속 존속시키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한국에 핵무기가 배치되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북한을 잃는 건 참을 수 없다.

동일한 전략적 이해관계를 가진 남북한

ⓒ시사IN 이명익2017년 9월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경북 성주군 주민들이 경찰과 충돌하고 있다.

자칫 남북한 모두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 신세로 전락할 수 있다. 미·중 간 패권 경쟁에 휘말려 들지 않아야 한다. 냉전 시대에는 어느 한 진영에 속하는 것이 유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한국과 북한이 양쪽 진영에 서로 나뉘어 있으면 양쪽 모두 손해만 볼 가능성이 높다. 북·미 간 대화가 결렬되면 북한은 선택의 여지없이 중국 편에 서는 구도이다.

그렇게 되면 남북 모두에게 엄청난 피해가 불가피하다. 북한은 항구적인 제재를 받으면서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 이미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편입 중인 중국은 미국의 요구를 무시하고 북한을 무작정 보호할 수도 없다. 그것이 냉전과 다른 점이다. 그렇게 되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권력과 체제를 유지하기도 쉽지 않다. 북한이 아무리 주민들을 잘 통제한다 하더라도 한계가 있다. 주민들의 높아진 기대심리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김정은 정권도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다. 한국도 곤경에 빠질 수 있다. 중국은 한국의 핵무기 배치를 반대하고, 사드 배치 때와는 수준이 다른 경제제재를 감행할 것이다. 그럴 경우 우리 경제에 심각한 피해가 불가피하다.

미·중 간 패권 경쟁으로 인해 형성된 갈등의 틀을 뛰어넘지 못할 경우, 남북 모두 최악의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 미국과 북한이 서로 대화를 하도록 여건을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전략이다. 북·미 협상이 잘 진행되어 한반도에 핵무기를 배치하지 않고, 북한도 북핵 문제를 일정 부분 양보하고 경제적 번영을 누릴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남북한은 이제 동일한 전략적 이해관계에 놓여 있다.

 

 

기자명 한설 (예비역 육군 준장·전 육군본부 군사연구소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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