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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인 퉁두란은 왜 ‘이지란’이 되었나

여진인 퉁두란은 이성계의 활 솜씨에 감탄하며 의형제가 되기를 자처한다. 그는 고려식 이름(이지란)으로 바꾸고 이성계와 함께 격동의 고려 말을 맞이했다. 이성계에게 필요한 지혜와 직언도 아끼지 않았다.

김형민 (SBS CNBC PD) webmaster@sisain.co.kr 2018년 11월 29일 목요일 제5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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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7년 몽골은 또 고려로 쳐들어왔다. 횟수가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 아홉 번째 침략이었지. 고려의 동북면, 오늘날의 함경남도 지역도 전란에 휩싸였어. 각 지역의 수비를 책임진 사람이나 백성들이나 더 이상 전쟁이라면 지긋지긋했지. 마침내 조휘, 탁청 등이 중심이 돼 반란을 일으켰고 그들은 동북면 병마사 신집평을 죽이고 몽골에 항복한다. 이 항복 대열에 가세한 사람이 있었어. 이안사(李安社)라는 이였지.

고려 동북면은 고려인만 살던 곳이 아니었어. 여진족도 적잖이 살았고 거란족의 후예도 띄엄띄엄 있었는데 여기에 몽골인까지 몰려왔다. 근 100년이 흐르는 동안 쌍성총관부는 그렇게 다양한 종족이 어울려 살았지. 몽골에 항복했던 이안사는 쌍성총관부의 천호(千戶) 벼슬을 하게 되는데, 이안사의 고손자가 바로 이성계야.

ⓒ연합뉴스(왼쪽) /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주 경기전에 있는 이성계의 어진(왼쪽)과 경기도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지란 초상화.

이성계는 어려서부터 출중한 무예를 자랑했다. 활 쏘고 말달리는 일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유목 민족인 몽골, 여진족 무사들도 이자춘의 아들 이성계에게는 혀를 내둘렀지. 요즘의 청소년들도 학교에서 주먹이 세다고 소문나면 “누가 더 센지 보자”고 ‘현피를 뜨는’ 일이 있잖니. 이성계가 살던 고려의 옛 동북면, 쌍성총관부 일대에서도 그랬을 거야. 이성계보다 네 살 위인 여진족 천호 퉁두란(쿠룬투란티무르)의 귀에도 이성계의 이름은 넉넉히 들렸겠지.

조선 중기 홍만종의 <순오지(旬五志)>에는 이성계를 질투한 퉁두란이 이성계 암살을 시도하는 장면이 등장해. 퉁두란은 뒷간에 볼일 보러 간 이성계가 쪼그리고 앉은 틈을 타서 화살을 날린다. 여진족도 활이라면 결코 뒤지지 않는 사람들이고 거기서도 퉁두란은 명궁으로 소문났지. 의기양양 시신을 확인하러 뒷간으로 들어가려던 퉁두란은 기절초풍하고 말았어. 이성계가 한 손으로는 허리춤을 매만지면서 다른 한 손으로 화살 세 대를 거머쥐고 성큼성큼 걸어 나왔으니까. 퉁두란은 그만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이성계도 후일 새 나라를 열 정도의 국량, 자신의 목을 노린 그를 용서하고 손을 내밀지. 퉁두란은 고개를 숙인다. “평생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이후 이름도 여진족 이름에서 고려식으로 바꾸지. 이지란(李之蘭)으로.

이지란은 이성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격동의 고려 말기를 맞이하게 돼. 현재 남아 있는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을 보면 이성계는 기골이 장대하고 위풍당당한 외모야. 이지란의 초상을 보면 우락부락하고 덩치가 산만 한 여진족 추장이 아니라 동글동글한 인상의 미남자임을 알 수 있어. 심지어 이지란 신도비(神道碑)에는 “용모가 단정하고 아름다운 것이 마치 여인과 같았다(公容貌靚和端麗如婦人)”라고 기록돼 있단다. 누가 보아도 장군감인 이성계와 그 옆에 선 꽃미남 장군 이지란 콤비는 고려 말 벌어진 외적과의 허다한 전투에서 큰 빛을 발했다. 쌍성총관부 천호이던 이성계 집안이나 여진족 천호이던 이지란의 휘하에는 용맹스러운 가병(家兵)이 많았다. 이들을 가별초(家別抄)라고 불렀는데 고려-여진 군단인 그들은 이성계·이지란의 지휘를 받으며 사방에서 닥쳐오는 고려의 적들과 종횡무진으로 싸웠어.

ⓒ문화재청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에 위치한 황산대첩비지.
1945년 파괴되어 1957년 다시 세웠다.
두 호걸의 역사적인 협공 작전

가장 유명한 일은 역시 황산대첩일 거야. 1380년 8월 수백 척의 왜구 선단이 충청도 진포를 공격해 들어왔어. 이때 고려 조정은 최무선이 공들여 개발한 화약 무기를 쏟아부어 왜구 함대를 깡그리 불태우는 개가를 올렸고, 육지에 상륙해 있던 왜구들은 졸지에 쥐구멍이 막힌 쥐가 됐지. 궁한 쥐는 고양이도 무는 법, 1만명이 넘은 왜구들은 한반도 남부를 횡단하다시피 하면서 기세를 올렸고 이성계·이지란 등이 이끄는 고려군은 지리산 기슭의 황산에서 왜구와 맞닥뜨린다.

이성계는 몸을 돌보지 않고 돌격했고 총사령관이 노출된 상황에서 왜구들의 화살이 이성계에게 집중됐어. 이성계의 말들이 계속 죽어나갔고 이지란의 화살을 손으로 받았던 이성계의 넓적다리에도 화살이 꽂혔다. 절체절명의 위기, 이성계는 동북면에서 데리고 온 가별초, 즉 자신과 이지란의 직속 기병군단의 힘으로 위기를 돌파해 나갔단다. 이성계가 해를 가리키고 외쳤다. “두려운 이들은 물러가라. 나는 적에게 죽을 것이다(怯者退 我且死賊).” 필시 이지란도 여진 말로 부르짖었을 거야. “무서이 주션!(우리 여진!) 우리가 고려인에 뒤져서야 되겠나.”

전투 가운데 한 나이 어린 왜구의 활약이 돋보였어. 고려군은 ‘아기’라는 고려 말과 용사를 뜻하는 몽골어 ‘바투(발도-拔都)’를 붙여 ‘아기발도’라 일컬으며 공포에 질렸다. 이때부터 이성계와 이지란 두 호걸의 역사적인 협공 작전이 펼쳐져. 여전히 얼굴까지 면갑(面甲)으로 가린 두꺼운 갑옷을 입고서 좌충우돌하는 아기발도를 향해 이성계가 활을 들었다. “얼굴도 면갑으로 감싸고 있으니 쏠 데가 없구먼. 내가 투구 끝을 맞혀 면갑을 벗길 테니 그때 얼굴을 쏘라.” 성난 멧돼지처럼 날뛰는 적장의 투구 꼭지가 과녁이었으나 이성계의 화살은 빈틈이 없었지. 화살 두 대에 투구가 중심을 잃었고 이어 투구 끈이 날아갔어. 이제는 이지란의 차례. 아기발도는 얼굴에서 피를 뿜으며 말에서 떨어졌고 사기를 잃은 왜구는 전멸했어.

여진인 이지란은 전투에서만 용맹스러운 사람이 아니었어. 지나치게 자신의 능력을 믿고 과시하기를 즐겼던 이성계에게 필요한 지혜와 직언을 한 이도 이지란이었으니까. 고려 우왕이 이성계와 이지란을 비롯한 신하들을 거느리고 사냥에 나섰다가 활쏘기 시합을 열었어. 이성계가 대뜸 나서 과녁을 쏘아 맞혀버렸다. 우왕도 좋아하고 이성계도 의기양양했지. 이지란의 이맛살은 펴지지 않았어. “재주 좋으신 건 아는데 왜 그렇게 남에게 많이 보입니까.” 권력의 절정에 있다가 공민왕에게 밉보여 한순간에 몰락한 신돈의 예처럼, 인기 절정의 장군이 왕 앞에서 잘난 체하는 건 별로 현명한 일이 못 됨을 깨우쳐준 거지.

이후로도 이지란은 이성계 개인에게 끝까지 충실했어. 유일하게 이성계를 거슬렀다면 아마도 새 왕조를 뒤흔든 왕자의 난에서 이성계가 세자로 세운 막내 이방석이 아니라 이방원을 도운 일이었을 거야. 이로 인해 이성계는 크나큰 정치적·심리적 타격을 받고 상왕으로 물러앉게 되지. 이지란은 정종을 거쳐 태종 이방원이 즉위하자마자 벼슬을 내놓아버린다. 마치 이성계에게는 미안하지만 그가 태종 이방원을 도운 것은 새 왕조 조선에 그런 강력하고도 지혜로운 임금이 필요했기 때문이며, 부귀영화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듯이. 야사에 따르면 그는 상투를 잘라 상소에 동봉했다고 해. 이제 자신의 일은 끝났고 불도에 귀의하여 자신이 무수히 죽인 생명들에게 사죄하며 살겠다는 뜻이었지.

그는 세상을 떠날 때 자신을 화장하여 여진 풍속대로 장례 치르기를 청한다. 이건 무슨 의미였을까? 혹시 몽골, 여진, 고려인이 섞여 살았던 동북면 출신의 조선 왕조가 국제적 분위기와 빠르게 결별하고, 자신이 속한 여진족이 새 왕조 조선의 ‘오랑캐’로 전락한 데 대한 가벼운 항의는 아니었을까(순전히 아빠의 추정임을 밝혀둔다). 고려를 위해 평생을 바친 여진 사람 이지란은 자신의 일생을 걸었던 형님이자 상관이 세운 나라 조선의 안녕을 기원하며 죽었다. “조심조심 덕을 닦아 영원히 조선을 보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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