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유리 동물원〉 무대에 오르려다 갑자기 쓰러진 배우 글로리아(아네트 베닝)의 분장실에서 영화는 시작한다. 극장 관계자의 전화를 받고 피터(제이미 벨)가 달려온다. “너희 집으로 좀 데려가줄래?” 힘없는 목소리로 부탁하는 여자. ‘왕년의 필름스타’이면서 ‘한때 피터의 연인’은 그렇게, 1981년 가을의 어느 날 영국 리버풀로 온다.

집에 온 첫날, 글로리아의 잠자리를 봐준 뒤 방문을 열고 나오는 피터 앞에 낯익은 복도가 펼쳐진다. 열심히 목을 푸는 글로리아의 목소리가 새어나오는 방문 위로 새겨지는 자막. “런던, 프림로즈 힐, 1979년.” 1981년의 문을 열고 나간 피터가, 둘이 처음 만난 1979년의 복도를 연이어 걷게 만드는 영화적 속임수. 비슷한 방식의 장면 전환이 그 뒤에도 몇 차례 더 나온다. 이 영화를 더욱 단단한 작품으로 만들어준 연출 아이디어다.

“혹시 〈토요일 밤의 열기〉 본 적 있어요?” “네, 세 번이나 봤어요.” “그럼 디스코 좋아해요?” “취해서 추는 건 좋아하죠.” “술 드릴 테니 같이 춰줄래요? 댄스 수업 때문에 파트너가 필요해서요.”

‘한물간 배우’와 ‘배우 지망생’이 나눈 첫 대화는 그랬다. 신나게 춤추고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함께 영화도 보고 술도 마시고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연인이 되었다. 모든 게 여느 커플과 다를 게 없었지만 딱 한 가지, 나이 차가 달랐다. 29살 차이. 네 번 결혼하고 네 번 이혼하는 동안 네 아이를 낳은 50대 여성이 20대 청년과 사귀는 모습을 누구도 좋게 봐주지 않는다. 피터의 가족만 빼고. 분장실에서 쓰러진 글로리아가 병원 대신 피터의 집에 가고 싶어 한 이유다.

장면마다 세심하게 배치한 컬러와 음악

‘필름스타는 리버풀에서 죽지 않는다(Film Stars Don’t Die in Liverpool)’라는 원래 제목과 달리, 영화는 리버풀에서 죽고 싶어 하는 ‘필름스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두 사람의 2년에 걸친 달고 쓴 연애담을 되짚는 한편, 쉰일곱 여성 배우의 평생에 걸친 고난과 고독에도 귀를 기울인다. 리버풀의 쌀쌀한 골목길과 캘리포니아의 따뜻한 바닷가를 오가면서, 그들 마음속 감정의 온도를 짐작할 수 있게 장면마다 컬러와 음악을 세심하게 쓴다. 특히 호세 펠리시아노가 부른 ‘California Dreamin′’이 마치 피터의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장면에 나는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다.

실제 주인공 피터 터너가 쓴 같은 제목의 회고록을 영화로 만들면서 아마도 가장 고심한 건 캐스팅일 터. 그러나 아네트 베닝과 제이미 벨은 이 커플을 향한 세상 모든 미심쩍은 시선을 폼 나게 비웃으며 따로 또 같이 반짝인다. 내가 몹시 아끼는 두 편의 영화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와 〈럭키 넘버 슬레븐〉을 만든 폴 맥기건 감독의 연출 솜씨는 이번에도 참 좋다. 마지막 장면 뒤에 나오는 글로리아 그레이엄의 생전 영상을 놓치지 말 것. 이 가을이 끝나기 전, 〈필름스타 인 리버풀〉이 담아낸 ‘행복한 슬픔’을 그냥 지나치지 말 것.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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