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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은 어떻게 괴물이 되는가

주리시 타이완 국립정치대학 교수는 공영방송 부사장 시절 ‘뉴스자율·정화선언’을 발표했다가 비난에 직면했다. 그의 발표는 보도를 이유로 인권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타이완/글 장일호 기자·사진 신선영 기자 webmaster@sisain.co.kr 2018년 11월 08일 목요일 제5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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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캐리어와 함께 도착한 백발의 신사가 유창한 한국어로 인사를 건넸다. 타이완 남부 가오슝 시로 한국의 광주 민주화운동 관계자들을 1박2일간 안내하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다. 10월10일 타이베이 시 한 호텔 커피숍에서 만난 주리시(朱立熙) 타이완 국립정치대학 교수는 1987년 타이완 <연합보> 서울특파원 겸 부사장으로 일하면서 한국 민주화운동을 취재했던 ‘한국통’이다.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지갑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독도 명예주민증’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타이완 민주주의 상황이 계속 악화되고 나중에 정 갈 데 없으면 독도로 갈 거예요(웃음).”

주리시 교수는 <연합보> <중국시보>를 거쳐 <타이베이타임스> 총편집인을 역임하고 2004년 타이완 공영방송 CTS(중화방송공사:Chinese Television System) 부사장에 취임했다. 취임 한 달여 만에 주리시 교수는 타이완 언론사에 전무후무한 개혁을 단행한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촬영기자 한 명이 와서 그래요. ‘저는 집에 있는 텔레비전에 케이블 뉴스 채널은 물론 CTS까지 볼 수 없게 막았습니다. 선정적인 뉴스들을 아이들이 볼까 두려워요’라고. 평소에 갖고 있던 언론에 대한 문제의식을 내가 이 자리에 있는 동안, 내가 속한 매체에서라도 풀어야겠다 싶었어요.”

2004년 9월28일 주리시 교수가 작성하고 당일 저녁 뉴스에서 발표된 ‘CTS 뉴스자율·정화선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취재를 이유로 환자의 응급조치를 방해하지 않는다, 유죄 판결 전까지 용의자의 얼굴은 방송하지 않는다, 교통사고와 자살 현장은 촬영하지 않는다, 공익에 무관한 가정사는 취재하지 않는다, 미신을 조장하는 뉴스를 보도하지 않는다, 보도가 잘못된 경우 정정 보도하고 사과한다 등.

지극히 ‘상식적인’ 보도윤리 강령은 발표 직후부터 도전에 직면해야 했다. 시민사회 일각의 지지도 있었지만 동종업계에서 비난이 쇄도했다. CTS의 뉴스자율·정화선언이 취재의 자유와 시민의 알권리를 침해한다는 이유였다. 타사 경찰 출입기자들은 경찰이 CTS에 정보를 제공하지 말 것을 종용했고, 그 결과 실제 ‘낙종’하는 일도 생겼다. 주리시 교수는 채 1년을 채우지 못하고 CTS 부사장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저는 실패한 사람이에요.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거든요. 기자들이 응급실이나 장례식장에서 ‘가족이 죽어서 많이 슬픈가?’ 같은 질문을 아직도 한단 말입니다. 환자들의 프라이버시는 안중에도 없어요. 병원은 새로운 약이나 치료법을 홍보하기 위해 기자들의 행동을 눈감아요. ‘몬스터’가 따로 없습니다.”

ⓒ시사IN 신선영
주리시(朱立熙) 교수가 2004년 CTS 부사장 시절 발표한 ‘CTS 뉴스자율· 정화선언’ 문건이 보도된 신문을 들고 있다.

2007년 공개된 단편 다큐멘터리 <각미미(脚尾米)>는 타이완 언론 현실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 홍콩과 마카오 출신 타이완 유학생 3명은 다큐멘터리 촬영을 진행하며 두 가지 실험을 시도한다. 이들은 ‘자신이 키우던 애완견이 죽었는데 영혼으로 돌아왔다’라는 내용의 보도 자료를 7개 언론사에 뿌렸다. 한 언론사가 검증 없이 받았다. ‘인터넷에서 행운을 판매한다’라는 내용의 보도 자료는 3개 언론사가 취재 요청을 해왔으며 “최근 행운을 사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따위 코멘트와 함께 보도되기도 했다. 다큐멘터리는 ‘가짜 뉴스’가 보도되는 과정을 여과 없이 보여주며 타이완 사회에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학생들은 명예훼손 소송 위협을 받았지만 검증 없이 보도한 방송국은 아무런 법적 제재 조치도 받지 않았다. 주리시 교수는 “이런 보도들이 수십 년간 누적되다 보니 아무도 뉴스를 믿지 않게 됩니다. 뉴스가 오락거리로 전락했어요”라고 말했다.

중국 자본의 간섭도 타이완 언론계 흔들어

양안(兩岸) 관계에 놓여 있는 중국 자본의 직간접적인 간섭 역시 타이완 언론계를 흔드는 주요 변수다. 주리시 교수는 “중국 자본이 공격적으로 타이완 언론을 인수하는 움직임이 몇 년 전부터 눈에 띕니다. 여론전으로 ‘타이완 독립파’를 고립시키려는 것으로 보여요”라며 우려를 표했다.

‘하나의 중국’ 정책을 펴고 있는 중국은 타이완을 중국의 일부로 여긴다. 중국과 수교를 맺기 원하는 국가는 타이완과 외교 관계를 끊어야 한다. 현재 타이완과 수교를 맺고 있는 국가는 17개국에 불과해 외교적으로도 고립된 상태다. 타이완은 올림픽 등 국제대회에 출전할 때도 국호와 국기를 쓰지 못한다. 10월20일 타이베이 시 민진당사 앞에는 타이완 독립 추진 단체 회원 13만명(주최 측 추산)이 운집해 차이잉원 총리의 대중국 정책에 불만을 표시하는 시위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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