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일이다. 힐러리가 배럭 오바마보다 훨씬 많은 정치자금을 거두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3분기의 승자(Queen of Quarter)’라는 제목이었다. 재미있는 건 힐러리 선거본부의 공식 발표가 있기 20분 전에 이 기사가 실렸다는 점이다. 그리고 오바마가 “힐러리가 이라크전 파병에 찬성했었다”라는 내용을 주제로 기자회견을 하기로 한 그날이었다. 이 기사 때문에 여러 사람이 이른바 ‘물을 먹었다’.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 같은 유력 일간지들이 그랬고, 오바마는 힐러리를 상대로 한방 먹이려다 헛물만 켠 셈이 되었다. 이 기사가 게재된 곳은 바로 르윈스키 스캔들을 발표해 클린턴을 곤혹스럽게 했던 〈드러지 리포트〉(Drudge Report)였다.
‘드러지’는 현재 미국 안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매체로 성장했다. 여론조사 기관인 닐슨 넷레이팅에서는 월 300만명이 정기적으로 드러지 사이트를 방문한다고 평가했으며, 지난주에만 1600만명이 방문했다고 드러지 사이트가 밝혔을 정도이다. 일반인의 방문뿐만 아니라,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 같은 유력지는 물론이고 각 선거운동 본부에서도 매일 드러지 사이트를 모니터링한다는 사실은 정가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실제로 〈드러지 리포트〉에서 힐러리의 선거자금을 발표한 직후,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도 그 기사를 인용 보도했다.
이처럼 영향력 있는 매체로 성장한 드러지에 대한 정치권의 구애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통상 선거운동 본부의 대언론 전략은 별게 아니다. 자기에게 유리한 기사는 가능한 한 크게 보도되어야 하고, 반면 자기에게 불리한 기사나 경쟁자에게 유리한 기사는 실리지 않거나 실을 수밖에 없다면 물타기라도 해서 김을 빼야 한다. 힐러리가 선거자금 모금 결과를 공표한 날짜가 오바마의 기자회견 날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들이야 우연한 일이라고 주장하겠지만, 우연이 잦으면 필연이 되는 법이다.
드러지는 보수주의 시각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기에 공화당은 2004년 선거부터 드러지에게 공을 들였다. 친공화당적인 기사가 많이 게재되고, 친민주당적인 기사가 누락되어왔던 것이 이 때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공화당에서는 드러지에 무차별적으로 정보를 제공해서 귀찮게 하지 말고, 가치 있는 기사만을 전달하라는 내부 방침까지 마련해두었다. 공화당 후보인 매케인은 선거운동 본부를 구성한 직후 드러지를 초청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힐러리의 승리를 주장하는 기사가 실린 것이다. 그렇다 보니 일각에서는 민주당, 특히 힐러리가 눈에 보이지 않게 드러지에 공을 들인 결과가 드디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힐러리의 구애가 성공한 걸까
하지만 공화당이나 힐러리 측이나 공히 이를 부정한다. 〈드러지 리포트〉에 일부러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혹여 이 때문에 다른 언론사들의 미움을 받지 않으려는 속내다. 굳이 적을 만들면서까지 드러지에 독점 기사를 제공할 까닭이 없다는 것이 그들의 항변이다.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 같은 유력지들은 ‘드러지 열풍’을 폄하하기 시작했다. 그의 보고서가 가십이나 풍문 등을 담고 있어서 신뢰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비판이라면 자사의 신문도 예외가 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비판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드러지에 줄서기를 하는 대통령 후보들이 못마땅하거나, 자신들보다 먼저 속보를 발표하는 드러지가 얄미운 탓이라고 보는 게 좀더 정확하지 않을까 싶다.
언론과 정치권의 애정 행각. 선후를 따지는 것이 우스울 지경이다. 언론이 먼저 구애를 했든, 후보가 먼저 구애를 했든 독자가 보기에는 그놈이 그놈이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저 동네 기자들은 최소한 선거철이라고 자리를 옮기지는 않는다. 실제 선거 보도 행태에서는 별반 다를 게 없는 미국 언론이 우리보다 잘났다고 고개를 쳐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