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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구순을 맞는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구순 생일을 맞는다. 그는 “꼭 이 사람에게 유언을 하겠다”라며 노부카와 미쓰코 씨를 지목했다. 노부카와 씨는 1994년부터 이용수 할머니를 도와왔다.

도쿄·이령경 편집위원 webmaster@sisain.co.kr 2018년 11월 05일 월요일 제5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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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7일 도쿄 신주쿠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 집회를 마친 참가자들은 한글로 ‘이용수 할머님 90살 생신 축하합니다!’라고 적힌 커다란 카드 위에 축하와 감사의 마음을 담은 메시지를 썼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200살까지 살겠다”라며 농담 같은 진담을 하는 이용수 할머니가 12월에 구순 생일을 맞는다. 이 축하 카드는 11월9일 대구에서 열리는 구순 잔치에서 이용수 할머니에게 전달될 것이다.

이용수는 1928년 대구에서 태어나 1944년 타이완의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갔다가 1946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1992년부터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로서 한국과 일본, 미국, 독일, 프랑스,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과 평화를 호소하고 있다. 용감하고 당당한 피해 생존자인 그는 오늘날 여성 인권과 평화의 상징이다. 그렇지만 홀로 26년 투쟁을 꾸려올 순 없었다. 함께 싸워온 사람들이 있기에 이용수는 구순을 맞이하는 지금이 “활동하기 딱 좋은 나이”라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그래서 이용수 할머니의 구순 생일을 축하하면서 그의 동지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해야 한다.
ⓒ노부카와 미쓰코 제공
2014년 5월 기념사진을 찍는 이용수 할머니(왼쪽)와 노부카와 미쓰코 씨.

“유언이란 걸 하게 된다면 꼭 이 사람에게 하겠다”라는 이용수의 이 사람, 노부카와 미쓰코. 1993년 8월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은 한국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조사 결과를 보고하며 강제 연행을 인정하고 사죄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그해 11월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는 김영삼 당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식민지 지배에 대해 사죄했지만, 구체적인 피해 배상 방안은 마련하지 않은 채 사직했다. 그런데 1994년 4월 하타 쓰토무 정권이 들어서고 5월 나가노 시게토 법무상이, 태평양전쟁은 침략 전쟁이 아니고 ‘위안부’는 공창이었다며 고노 담화를 뒤엎는 문제의 발언을 했다.

이런 일본 정부에 항의하기 위해 ‘현 생존자 군대 위안부 피해자 대책협의회’ 회장 김복선과 이용수를 포함한 피해자 15명과 그의 가족들이 일본에 갔다. 재일조선인 영화인 김수남 등은 피해자들을 도와야 하지 않겠느냐며 지원자를 모았다. 가와사키의 아사다 교회와 여성센터가 숙소를 제공했고 여러 사람이 십시일반 음료·도시락·이불 등을 모았다. 여기에 노부카와도 작은 도움을 주고 싶어 동참했다. 노부카와는 1994년 5월24일 참의원 의원회관 앞에서 이용수를 처음 만났다. 하얀 햇살 아래 하얀 소복을 입은 피해자들이 택시에서 내리던 순간은, 세 아이를 키우느라 바쁜 일상을 보내던 주부 노부카와의 삶에 활동가로서 삶을 더하는 분기점이 됐다.

노부카와는 일본이 저지른 전쟁에 관심이 없었다. 스무 살쯤 동네 내과에서 우연히 들은 전쟁 이야기에 놀랐지만 그저 그런가 보다 했다. 중국 전선에서 일본 병사들은 여자나 아이가 눈에 띄면 폭행을 저지르고 죽였다며 전쟁은 그렇게 인간을 미치게 만든다는 이야기였다. 1991년 8월14일 김학순의 공개 증언 뉴스를 보고 ‘아, 정말 그런 일들이 있었구나’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1994년 5월에도 처음에는 그저 며칠만 한국인 피해자들과 가족을 도와주면 되겠지 싶었다. 그런데 결국 그들과 11일간 진행된 모든 일정을 함께했다. 8살 딸이 엄마를 찾아 교회까지 왔지만, 가지 말라고 붙잡는 피해자 김분선의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교회 마룻바닥에서 함께 먹고 자고, 동네 목욕탕에서 함께 씻으며, 집회장과 총리관저 앞에 함께 나갔다. 하타 총리와의 면담을 요구하는 피해자들을 막아선 경찰과 출입구를 꽁꽁 막아놓은 사슬에 부딪치며 그녀는 온몸으로 ‘위안부’ 문제를 배웠다.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는 피해자를 바라보며 노부카와는 처음으로 일본인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노부카와 미쓰코 제공
1994년 6월2일 일본 정부에 항의하기 위해 방일한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와 지원자들이 노부카와 미쓰코 씨의 집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그 후 노부카와는 이용수 할머니 등 피해자들을 일본에 초청해 무려 100회가 넘는 증언 모임을 열었다. “증언을 듣겠다는 사람들이 있어요”라는 그녀의 연락에 흔쾌히 이용수와 김복선은 일본에 갔다. 100명 이상이 모이는 큰 모임도 있었지만 10명이 채 안 되는 작은 모임의 요청도 노부카와와 이용수는 거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1994년 지바 현의 한 중학교 1학년 담임선생이 학생들에게 이용수의 증언을 들려주고 싶다고 부탁했을 때는 그녀도 주저했다. 중학생들이 이 증언을 이해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어린 학생들은 이용수와 노부카와를 힘껏 안아주었다. 학생들은 선입견 없이 피해자의 아픔을 공유하고 공감했다. 1995년 10월 아이치 현의 한 고등학교 축제에서 증언을 마쳤을 때 이용수와 김복선에게 한 여학생이 다가와 울면서 사죄했다. 이용수는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눈물로 사죄하는 여학생의 등을 어루만지며 “네 잘못이 아니다” 하고 눈물을 닦아줬다. ‘왜 이 아이들이 피해자에게 사죄해야 하는가? 도대체 일본 정부는 뭘 하고 있는가?’라는 자문을 하며 노부카와는 지금 자신이 피해자들과 함께하는 활동은 지원 운동이 아니라 일본인이 안고 있는 문제 해결 운동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노부카와가 연 100회 넘는 증언 모임

때때로 노부카와는 “언제까지 괴로운 피해 경험을 증언하게 할 참이냐”라거나, “왜 피해자들에게 일본어로 말하게 하냐”는 항의를 받았다. 증언을 마치고 잠을 제대로 못 이루는 피해자들을 보며 노부카와도 마음이 아팠지만 이용수는 오히려 그녀를 격려했다. 이용수의 일본어는 식민지 지배하 강요당한 제국의 말, 위안소에서 몸에 새겨진 말이다. 이용수는 더 많은 일본인과 연대하고자 일본어를 갈고닦았다.

1995년 7월2일 한국과 북한의 연구자, 그리고 한국, 필리핀, 재일조선인 ‘위안부’ 피해자가 모인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기금’을 반대하는 국제 세미나와 증언 집회가 도쿄에서 열렸다. 그 자리에서 이용수는 “침략 전쟁의 피해자인 우리는 자발적으로 군인들에게 위안을 한 적이 없다”라며 ‘종군 위안부’라는 호칭을 비판한 일이 있다. 이 발언 전에 이용수 할머니는 노부카와에게 전화를 걸어 한국에서는 잘 쓰지 않는 ‘종군 위안부’의 종군의 의미를 꼼꼼히 확인했다. 2007년 3월2일 <도라지꽃-이용수 토크 콘서트>에서 이용수는 통역 없이 진행자 노부카와의 도움을 받으며 일본어로 자신의 증언을 노래에 실어 불렀다.

ⓒ연합뉴스
8월11일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 집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기림행사’에서 이용수 할머니가 발언하고 있다.
노부카와는 처음 2년은 단체에 소속되어 활동했지만 그 후로는 개인 활동을 해왔다. 이용수의 국제 행사, 재판 참석 일정이 있을 때는 그 전후의 일정을, 증언 의뢰를 받으면 보통 2주일의 일정을 짜고 이용수 할머니와 인연이 있는 이들에게 지원을 요청한다. 비행기 경비 등 후원자, 가구라자카의 숙소 제공자, 빠듯한 일정에 지친 이용수 할머니를 집으로 초대하는 지원자, 이용수 할머니의 곁을 비워야 할 때면 대신 일정을 함께하는 지원자, 일정이 끝나면 함께 온천을 찾는 지원자, 이용수 할머니를 만나려고 지방에서 먼 길 마다하지 않는 지원자, 준비에서 마무리까지 함께 행사를 치르는 지원자들이 있다.

1998년 이용수 할머니는 자신이 있었던 타이완의 옛 위안소를 방문했다. 지금은 공군기지가 된 옛 위안소 터에서 이용수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동료들과 일본 병사를 위해 제사를 지내고 명복을 빌었다. 이 또한 타이완의 ‘위안부’ 피해자를 지원하는 일본인들과 타이완 현지 지원자들 덕분에 가능했다.

노부카와는 매년 적어도 두 번 ‘제2의 어머니’인 한국의 ‘위안부’ 생존자들을 직접 방문했다. 공항에 내리면 먼저 서울 영등포의 김복선 집으로 간다. 그곳에서 하룻밤 묵으며 근처에 사는 김향순, 배족간을 만난다. 이튿날 수요 집회에 온 피해자들과 함께 나눔의 집으로 가서 강덕경, 김순덕 등을 돌본다. 다음 날 열차를 타고 대구에 가서 이용수, 김분선, 신현순이 사는 아파트에서 하루를 지내고 다음엔 경기도 부천에 사는 박복순, 강순애에게 간다. 그리고 마지막 날 다시 김복선의 집에 들렀다가 일본으로 돌아온다. 이제 다들 돌아가시고 이용수 할머니가 남았다.

이용수나 다른 생존자들이 사정이 있어서 일본에 오지 못할 때 노부카와는 필리핀이나 타이완 피해자 지원자들과 함께 관련 사진 전시를 열고,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대신 전하는 토크 행사를 한다. 피해 당사자는 없지만, 그곳에 노부카와가 26년간 만나온 한국의 ‘어머니들’ 사연이 빼곡하다.

이용수와 노부카와 두 사람이 항상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용수 할머니는 웃음과 흥이 많아 주변 사람을 유쾌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 자기만 알아서 주변 사람을 불쾌하게도 한다. 함께 지내다 보면 감정이 상할 때가 있다. 그럴 때 필자가 노부카와를 대신한 적도 있다. 그런데 하루 지나면 두 사람이 또 잘 지낸다.

이용수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 노부카와는 이용수 할머니가 건강하게 살아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 이용수가 노부카와의 카메라 앞에서 즐겁게 유언을 남기고 있다(지면에 담지 못한 이용수의 동지들, 쓰보카와 히로코, 가와라자키 미치에, 호시카와 가즈에, 야마다 게이코, 야스다 지세, 아다치 요코, 다니가와 도루, 나가누마 세쓰오, 김순자, 이정미, 나카하라 미치코, 기세 게이코, 고 미아케 가즈코, 그 외 많은 분에게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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