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충을 잡으려면 살충제를 개발해야 한다. 다만 세월이 흐른 뒤 그 살충제에 면역력을 가진 더 강한 해충이 창궐할 수 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 새로운 문제를 일으킨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한 지 10년이 된 2018년 가을, 세계 금융시장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10월 중순 국제통화기금(IMF)이 발표한 〈글로벌 금융 안정성 보고서(Global Financial Stability Report)〉에 따르면, 지난 10년 동안 “금융 규제의 틀이 개선되고 은행 시스템(banking system)도 강화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취약성(new vul-nerabilities)이 발생하면서 글로벌 금융 시스템의 신뢰성이 시험에 빠졌다”.

2008년 위기의 근본 원인은 미국 대형 은행들의 방만한 부동산 대출이었다. 2000년대 초반 이후 미국 은행들은 가계에 대한 고액 부동산 담보대출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상환 능력이 없는 저소득 가계에도 ‘겉으로만 유리한 조건(고금리를 저금리인 것처럼 포장)’으로 대출을 ‘살포’했다. 은행으로서는 일단 대출하면 이후 수년에 걸쳐 채무자로부터 일정한 금액을 받을 수 있다. 예컨대 10억원을 빌려주면 10년에 걸쳐 15억원(연 금리 5%로 가정)을 상환받는 권리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은행들은 이 권리를 합치고 쪼개서 만든 ‘파생금융 상품’을 여러 나라의 다양한 금융투자자들과 사고팔면서 적잖은 재미를 누렸다.

ⓒEPA10월9일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IMF-세계은행 연차총회에서 크리스틴 라가르드 총재가 발언하는 모습.

이 파생금융 상품은, 당초 부동산 대출을 받은 가계가 원리금을 은행에 계속 납부해야 그 가치가 유지된다. 2006년 이후 미국의 저소득 가계 중 대다수가 부동산 대출금을 상환할 수 없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은행이 수년에 걸쳐 원리금을 돌려받는 권리’ 자체가 의문시된다면, 그 권리에 기반해서 만들어진 파생금융 상품의 가치 역시 0달러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 해당 상품을 잔뜩 보유하거나 거래한 여러 나라의 유수한 금융기관들이 사실상 파산하면서 글로벌 차원에서 금융거래, 나아가 세계경제를 마비시켰다.

빈사 상태에 빠진 세계경제를 구하기 위해 미국 등 경제 대국의 중앙은행은 이른바 ‘양적완화(중앙은행이 금융기관 보유 국채를 매입)’로 금융기관들에 엄청난 규모의 통화를 공급했다. 지난 10년 동안 미국·유럽연합(EU)·일본·중국의 중앙은행이 금융기관에 뿌린 돈이 무려 10조 달러를 훌쩍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렇게 통화 공급이 늘어나면서 그 (본원)통화의 가격이라 할 수 있는 기준금리 역시 선진 각국에서 ‘사실상 0%’로 고정되었다. 이와 함께 은행들이 방만한 대출과 위험한 거래를 하지 못하도록 금융 규제를 강화했다. IMF가 ‘규제 틀 개선과 은행 시스템 강화’로 표현한 내용이다.

문제는, 금융위기를 수습하기 위한 이런 정책이 ‘새로운 취약성’을 낳았다는 점이다. 선진 각국이 기준금리를 사실상 0%로 고정한 취지 중 하나는, 은행들이 싼 금리로 실물경제 부문에 대출해서 경기를 살리라는 것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현실은 기대와 매우 다르게 전개되었다. 늘어난 돈은 실물경제보다는 금융시장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EPA미국 버지니아 주의 한 주택 앞에 주택 매매 광고판이 걸려 있다.

지난 10년간 실물경제 활성화되지 않아

IMF 보고서가 제기한 ‘새로운 취약성’ 가운데 대표 사례는 ‘비금융 기업(금융기관 이외의 업체) 부문의 이미 높은데도 계속 올라가는 부채비율’이다. 미국의 경제정보 전문 미디어인 〈블룸버그〉(10월11일)는 지난 5년 동안 감행된 기업 인수합병 가운데 인수 금액이 높은 순서로 50건을 검토했는데, 대표적 비금융 기업들의 부채비율이 크게 악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지난 10년은 금리가 극도로 낮은데도 불구하고 실물경제는 활성화되지 않은 시기다. 비금융 기업들의 매출액 성장 역시 매우 더딘 편이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이런 상황에서 기업들은 쉽게 성장할 수 있는 묘수를 찾아낸다. 어떻게든 거액을 빌려 경쟁 기업을 인수해버리면 된다. 단번에 기업 규모를 확대하면서 시장점유율까지 높일 수 있는 길이다.

세계 최대 통신회사인 미국의 AT&T는 올해 들어 미디어그룹 타임워너 등을 인수하는 데 모두 1900억 달러(약 216조원)를 투자했다. 그 자금 중 상당 부분이 빌린 돈이다. 순식간에 AT&T의 부채는 EBITDA(이자·세금·감가상각비 등을 빼기 전의 순이익. 해당 기업의 영업을 통한 현금 창출 능력을 나타냄)의 4.4배에 이르렀다. 부채가 EBITDA보다 많을수록 해당 기업이 영업에서 번 돈으로 빚을 갚기는 어렵게 된다. 신용평가사 무디스와 S&P는 AT&T의 신용등급을 A-에서 BBB로 두 단계나 떨어뜨렸다.

ⓒAP Photo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왼쪽)이 스티븐 므누신 재무장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신용등급은 ‘해당 기업에 돈을 빌려줘도 되는지’를 투자자들에게 알리는 지표라고 할 수 있다. BBB 이상을 ‘투자등급’이라고 부르는데 ‘빌려줘도 떼먹힐 위험이 크지 않다’로 해석할 수 있다. 다만 안심하고 빌려주는 대신 많은 이자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BBB 이하는 ‘투기등급’이다. ‘상환받지 못할 위험이 큰 대신 높은 이자를 받을 수 있다’라는 의미다. AT&T는 투자등급의 최하위(BBB)로 떨어지는 수모를 감수하면서까지 타임워너를 인수한 것이다. 식음료 부문 거대 기업인 닥터페퍼스내플 그룹은 큐리그그린마운틴(커피머신 제조사)과 합병하면서 170억 달러의 빚을 졌다. 합병회사(큐리그닥터페퍼)의 부채는 EBITDA의 5.6배로 평가된다. 신용등급 역시 BBB+에서 BBB로 떨어졌다. 〈블룸버그〉는 미국 기업들이 BBB 등급으로 빌린 돈이 2조4700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한다. 금융위기가 터진 2008년 말의 3배에 달하는 규모다. 지난 10년 동안 기업 부문의 악성 부채가 폭증한 것이다.

그 이유는, 기업과 투자자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금융투자자들은 지난 10년 동안 지루하게 이어진 ‘저금리의 세계’에서 다소 위험하더라도 높은 수익률을 얻을 수 있는 투자처를 찾아 세계를 헤맸다. 기업 입장에서는 차라리 신용등급을 낮춰 투자자에게 더 많은 이자를 지급하는 쪽이 거액을 빌리기엔 유리했다. AAA보다 BBB 등급의 기업이 자금을 쉽게 조달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더욱이 기준금리 자체가 워낙 낮았기 때문에 투자자에게 이자를 더 줘도 그 금액의 절대 규모는 크지 않았다.

〈블룸버그〉는 무디스, S&P 같은 글로벌 신용평가사들의 문제점도 지적한다. AT&T, 큐리그닥터페퍼 등은 부채비율로 볼 때 투기등급으로 평가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신용평가사들은 이 회사들에 투자등급을 부여하는 놀랄 정도로 ‘관대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무디스 등은 10년 전에 ‘금융위기의 종범’으로 비난받은 바 있다. 위험한 파생금융 상품들에 투자등급을 척척 붙여줬기 때문이다. 비슷한 일이 다른 형태로 되풀이되고 있다.


IMF 보고서는 이외에도 ‘새로운 취약성’이 선진국 자산(주식·부동산 등) 시장과 이머징마켓 등에서 축적되어왔다고 지적한다. 양적완화로 대량의 자금을 확보한 선진국 금융기관들이 실물경제보다 높은 수익률이 기대되는 자산시장과 이머징마켓에 투자하면서 거대한 거품을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10년 동안 각국 주식시장은 실물 부문의 불황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최고 지수를 경신해왔다. 보고서의 표현에 따르면 “자산가치가 늘려짐을 당했다(stretched asset value)”. 한동안 이머징마켓들 역시 쏟아져 들어오는 외국자본 덕분에 특수를 누렸다.

가장 바람직한 시나리오는 새로운 취약성을 한낱 ‘잠재적 위협’으로 억누르는 것이다. 취약성들이 특정한 계기를 만나 현실화되면 세계경기 침체, 나아가 금융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불행히도 그런 계기가 형성되고 있다.

먼저 타격 입은 새로운 취약성 ‘이머징마켓’

무엇보다 주요국들이 통화 긴축(기준금리 인상)을 이미 진행 중이거나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IMF 보고서는 “수년에 걸쳐 구축된 취약성이 금융 환경의 갑작스러운 긴축으로 현실화할 수 있다”라고 우려한다. 지난 2016년부터 인상되기 시작한 미국의 기준금리는 지금도 역사적으로 낮은 수준이지만 내년까지 계속 오를 전망이다. 지난 50여 년의 경험에 비춰보면 미국의 기준금리가 오르면 크든 작든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가장 먼저 타격을 입은 새로운 취약성은 이머징마켓이다. 남미의 아르헨티나는 이미 국가부도 상태다. 터키·인도네시아·인도·파키스탄·남아프리카공화국 등도 위태롭다. IMF 보고서는 ‘달러로 갚아야 할 외채’를 상당한 규모로 짊어진 이머징마켓 국가들의 위험성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부풀어 오른 각국 자산시장도 우려의 대상이다. 10월 중순 미국 주요 주가지수의 폭락과 한국 증시의 출렁임도 선진국 통화 긴축(금리 인상)에 따라 세계 금융시장에 드리운 불안감의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악성 기업 부채들이 산적한 미국도 결코 안전하지 않다. 폭증한 BBB 등급의 기업들은 금리 인상이 진행되는 가운데 발생 가능한 외부 충격을 감당하기 힘들다. 부채비율을 개선하지 못해 투기등급으로 강등되면 기존 빚의 이자율이 오르는 한편 새롭게 돈을 빌리기도 힘들어진다. 이런 상황이 미국의 주요 기업에서 발생하면 미국은 물론 세계 금융시장이 혼란에 빠지게 된다. 10년 전 위기의 발원지는 가계의 주택담보대출이었다. 다음 위기는 미국 기업의 악성 부채로 시작될 수 있다.

IMF는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 등 여러 나라에 개시한 무역전쟁에 대해서도 “세계경제에 심대한 리스크를 안길 것이다”라고 경고한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총재는 세계무역기구(WTO) 개혁 및 국제무역 시스템의 개선을 요청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가 바라는 것은 ‘규칙에 근거한(rules-based)’ 국제무역 질서의 개선이 아니다. 경제와 군사 부문의 라이벌로 찍은 중국의 기세를 꺾는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최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개정해 타결한 미국·멕시코·캐나다 협정(USMCA:United States-Mexico-Canada Agreement)은 노골적으로 중국을 겨냥한다. 캐나다와 멕시코가 중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지 못하도록 했다. 글로벌 차원에서 전개되는 국제분업 체계에서 ‘세계의 공장’ 구실을 해온 중국의 지위를 박탈해 핵심 제조업 및 하이테크 산업을 미국으로 되돌리는 것이 트럼프 행정부의 장기적 목표다. 라가르드 총재의 충고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통할 것으로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다.

2008년 금융위기에 대한 해결책이 다음 위기로 이어질 수 있는 취약성들을 만들어냈다. 취약성이 현실화될 계기들도 돌출하고 있다. 세계 각국이 새로운 국제협력 체제를 구축해서 금융위기의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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