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훈
사회학을 전공하던 대학 시절, 내겐 잊을 수 없는 교수님이 두 분 있다. 두 교수님은 흥미롭게도 각각 학교 바깥에 마련된 ‘또 하나의 학교’를 운영하고 계셨다. 종교철학에 관심이 많았던 첫 번째 교수님은 서울 신촌 지역에 위치한 학교를 중심으로 학생을 선발해 온갖 철학 고전을 독파하는 ‘작은 대학’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문화인류학을 전공한 두 번째 교수님은 대안 문화의 한 첨병으로 기능하기 위해 토론·출간·문화 바꾸기 등의 활동에 집중했던 ‘또 하나의 문화’(‘또문’)라는 행동 집단을 만들었다. 난 ‘작은 대학’의 일원이기도 했고 ‘또문’의 일원이기도 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두 학교는 내게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작은 대학’은 점점 더 그 정체성을 사회학과의 일정과 무관한 방향으로 이끌어가기 시작했다. 그곳의 중심은 해당 철학서 그 자체가 지닌 독단의 가치와 이론이었지, 그것이 지금 우리 사회에 어떻게 연계될 것인가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반면 ‘또문’은 정반대였다. ‘또문’의 핵심은 어떤 철학자가 어떤 이론을 내놓아 이러저러한 계보가 쌓이니 ‘참 대단하다’가 아니라, 당시 대한민국 사회의 각종 문화 현상을 직시하고 고쳐나가기 위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이론은 무엇인가를 정확히 파악해내는 일이었다. 그때 내게 더욱 필요했던 건 이론과 현실이 하나로 뒤섞인 ‘또문’이었다.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한 민규동 감독의 신작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서양골동양과자점〉)가 개봉했다. 기억이 혼미한 어린 시절의 악몽을 파헤치기 위해 케이크 가게를 연 진혁과 이 가게에 파티셰로 입사한 ‘마성의 게이’ 선우가 주인공이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감독이 ‘할 말’이 참 많았던 작품이다. 진혁의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서는 스릴러·공포 장르의 특성은 물론, 주제를 드러내려는 야망도 동시에 이루어야 했다. 뮤지컬 연출 방식을 곳곳에 집어넣어 관객을 기분 좋게 해주어야겠다는 욕심도 컸을 것이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되는 것은 이른바 ‘동성애 시대 개막’을 선전포고하는 일이다. 민규동 감독에게 이 모든 것은 관객에게 ‘동시에’ 전해져야 할 쉽지 않은 과제였다.

난나 그림
할 말 제대로 다 하면서 예상 뛰어넘는 재미도

이 영화는 예상을 뛰어넘는 재미를 주었다. 동시에 각각의 과제는 제 모습의 성취를 거두며 동시에 다가왔다. 그 까닭은 여러 과제가 각각 하나씩 자리를 차지하며 독단적인 욕심을 부린 게 아니라, 서로 어우러진 채 균형을 잡으며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내게 영화 〈서양골동양과자점〉은 ‘또문’이었다. ‘또문’의 이론이 한낱 공허한 글자의 배열로만 그치지 않았던 것은 그 곁에 현실이 있었기 때문이며, ‘또문’이 지향하는 대안의 현실이 그저 맹랑한 이상향으로만 머무르지 않았던 것은 그 곁에 이론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문’의 이론과 현실은 괜스레 서로 떨어졌다 각각 망가지는 대신, 반씩 자리를 양보하고 손을 잡았다 결국 커다란 시너지를 내며 양쪽 모두 제 설 길에 서게 되었다. 그 똑같은 논리로 〈서양골동양과자점〉은 최근 개봉한 영화 중 가장 ‘보기 좋은 모습’으로 제 자리에 섰던 것이다.

물론 모든 영화가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더러운 타협’이냐 ‘건강한 통합’이냐 하는 오랜 논쟁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어느 경우에 ‘공존의 가치’가 높이 올라가느냐다. 2008년 11월에 등장한 〈서양골동양과자점〉의 ‘공존 방정식’은 혹여 지금 우리 시대에 어떤 경고라도 날리려 했던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기자명 이지훈 (FILM 2.0 편집위원, 영화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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