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좀 독특한 공익재단이 있다. 반도체를 제조하는 대기업이 재단을 만들자며 350억원을 내놓았다. 혹여 대기업의 ‘면피’를 위해 들러리 서는 것이 아닐까. 언뜻 보면 미심쩍지만, 실무자들의 생각은 확고하다. 기업으로부터 철저히 독립된 싱크탱크를 만들겠다는 각오다. 재단의 모든 의사 결정과 운영은 외부 인사로 구성된 위원회와 이사회가 맡는다.

이 공익재단 이름은 ‘숲과나눔’이다. 지난여름 창립했다. 환경·안전·보건 분야에서 전문가를 길러내고, 갈등이 불거졌을 때 합리적인 해법을 모색하는 것이 목적이다. 기금을 출연한 곳은 SK하이닉스다. 재단 이사장은 장재연 아주대 예방의학교실 교수(61·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가 맡았다. 구도완 환경사회연구소 소장, 김호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 박영숙 아름다운재단 이사,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등 쟁쟁한 이들이 이사를 맡았다.

장재연 이사장과 SK하이닉스의 인연은 어찌 보면 악연이다. 2014년 SK하이닉스 반도체 생산 라인 노동자들의 직업병 문제가 〈한겨레〉 보도로 불거졌다. 1990년대부터 근무했던 노동자 28명이 림프조절기계 암 진단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SK하이닉스 회사 측은 즉각 사업장 실태조사를 위해 ‘산업보건검증위원회’를 꾸렸고 이때 장재연 이사장이 위원장을 맡았다.

ⓒ시사IN 이명익

검증위원회는 1년여의 조사 끝에 회사 쪽에 포괄적 지원·보상안과 127개에 이르는 산업안전보건 개선안을 제안했다. 하이닉스는 이를 전격 수용했다. 사회적 문제 제기→회사 측의 대책 마련→검증위원회 구성→보상 및 산업안전보건 개선안 이행이라는 직업병 문제 해결 모델을 만들어냈다. SK하이닉스는 당시 경험의 연장선에서 장재연 이사장에게 숲과나눔 창립을 제안했다.

장재연 이사장이 환경운동에 뛰어든 지는 30년이 넘는다. 1980년대 울산 공해병(일명 ‘온산병’), 1990년대 후반 평택 매향리 소음 소송 등 굵직한 환경 이슈마다 함께했다. 88서울올림픽 때부터 미세먼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환경기준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숲과나눔은 10월15일 인재 양성 프로그램 공고를 냈다. 국내외 대학원생에게 등록금과 학습지원비를 대주고, 사회적 난제 해결을 위해 연구비를 제공한다. 박사학위 취득 후 3년 미만자를 대상으로 재단이 지정하는 특정 주제를 연구하도록 하는 ‘박사 후 펠로십’ 프로그램도 있다. 숲과나눔의 ‘씨뿌리기’가 시작됐다.

기자명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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