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이른바 ‘X양 사건’이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한 여성 배우와 H씨의 성관계 동영상이 유출된 것이다. 비디오로 유통된 이 동영상은 요즘처럼 인터넷 문화가 발달하지 않았음에도 ‘안 본 사람이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로 폭발적으로 확산되었다. 당시 뉴스 기사에 따르면 ‘음란물 암시장에서 유통 초기 100만원까지 이르던 이 비디오가 단 두 달 만에 1만원도 채 안 되는 가격으로 떨어질 만큼’ 거대한 시장이 형성되었다. 결국 그녀는 대국민 사과를 해야 했으며, 검찰은 상대 남성이 고의로 동영상을 유포한 게 아니라며 무혐의로 가닥을 잡았다. 그녀가 ‘X양’이 아닌 제 이름으로 복귀하기까지 무려 10년이나 걸렸다.
그 사건이 있고 3년 뒤에는 또 다른 ‘X양 사건’이 터졌다. 한 여성 가수와 그녀의 전 남자친구인 K씨의 성관계 동영상이 유출된 것이다. 이 동영상은 초고속 인터넷망이 보급되던 당시 사회적 상황과 맞물려 엄청난 속도로 퍼졌다. 앞선 X양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대국민 사과를 하고 한동안 활동을 접어야 했다.
그리고 2018년, 한 여성 가수의 전 남자친구인 최종범씨의 ‘동영상’이 사회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다. 이 사건은 처음에 그저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진 폭행 공방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최씨가 촬영한 성관계 동영상을 가지고 그녀를 협박했다는 사실이 공개되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최씨는 자신의 얼굴에 상처를 낸 그녀에게 분노해 동영상 편집본을 두 차례 보여주었고, 그녀는 동영상 유포를 막기 위해 결국 최씨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물론 최씨는 “협박이 아니었다”라고 주장하지만, 그 상황에서 그것을 협박으로 인식하지 않을 여성이 있을까? 게다가 최씨는 한 언론사에 동영상 제보 의사를 밝히는 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늦으시면 다른 데 넘겨요” “실망시키지 않아요”라는 코멘트과 함께. 하나의 동영상이 남성에게는 협박의 도구가 되고, 여성에게는 무릎을 꿇어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동안 이런 종류의 사건이 터지면 ‘○양 사건’ 등으로 명명하면서 사건의 주어를 피해 여성에게 두었다. 언론은 ‘○양’을 주어로 한 가십을 확산시켜 왔다. ‘사이버 성폭력 카르텔’은 강력했고 동영상은 만능 협박 도구가 되었다.
왜 피해자가 대국민 사과를 해야 하나
최씨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그 협박은 실패할 것 같다. 불법 동영상을 찍고 유포하고 소비하는 사이버 성폭력 카르텔은 여전히 견고해 보이지만, 많은 이들의 노력을 거쳐 사회는 더 이상 해당 사건의 주어로 피해자를 호명하지 않을 정도의 상식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 부족하다. 이런 협박이 통하지 않고, 동영상을 감히 유통하지 못하도록 법이 보완되기까지 아직 갈 길이 멀다. 더 이상 피해자가 세상 죄를 뒤집어쓴 얼굴로 나와서 대국민 사과를 하지 않고도 당당하게 활동할 수 있는 사회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할 일도 많다. 물론 언론도 ‘클릭 경쟁’을 멈추고 변해야 한다.
이번 사건의 핵심은 ‘X양 동영상’ 유무에 있지 않다. 동영상을 무기로 여성을 협박하고도 오히려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며 연속 가해를 하고 있는 ‘최종범’과 지금도 어디선가 불법 동영상을 찍고, 유통하고, 소비하고 있을 남성들이 저지르는 ‘사이버 성폭력’이 핵심이다. 그러므로 이번 사건은 이전과는 다른 이름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최종범 불법 동영상 협박 사건.’ 이제 이런 종류의 사건의 주어를 제대로 찾아 부를 때가 되었다. 이 주제로 글을 쓰며 과거의 ‘X양 사건’들을 호명하는 칼럼도 이게 마지막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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