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5일은 백남기 농민의 2주기였다. 다들 ‘벌써 2년이나 지났어?’라고 되묻는다. ‘다이내믹 코리아’라고는 하지만 지난 2년을 돌이켜보면 정말 다이내믹 자체다. 대통령이 바뀌었고, 두 전직 대통령이 실형을 받아 복역 중이다. 남북 정상이 세 번이나 만나 남북 화해의 분위기가 그득하다. 하지만 형편이 나아졌는지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어렵다. 농촌에서는 정부가 바뀌었는지 실감하지 못한다는 불만이 쏟아지고 있다. ‘촛불 정부’라 불리는 문재인 정부 탄생의 도화선이 바로 백남기 농민이었기 때문에 농민들의 실망은 더욱 크다.

문재인 정부에서 농림축산식품부(농식품부) 장관은 가장 늦게 임명되었지만 가장 먼저 사퇴했다. 그러고는 전남도지사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그로부터 5개월간 장관 자리는 비어 있었다. ‘농업 홀대론’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저 자리가 기획재정부나 교육부 장관이었으면 비워둘 수 있었겠느냐며. 이후 임명된 이개호 농식품부 장관도 호기롭게 총선에 출마하겠다고 돌직구로 답변했다. 농업·농촌이 뒷전인 것은 새삼스럽지 않지만 문재인 정부에 대한 기대가 너무 높았던 탓일까. 이런 실망감이 가득한 분위기에서 백남기 농민 2주기를 맞이했다. 많은 이들이 물대포는 기억하지만, 그때 일흔 살에 가까운 보성의 농민이 왜 서울까지 올라와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사IN 이명익2016년 11월6일 전남 보성 생가에서 백남기 농민의 추모식을 마치고 밀밭으로 이동하고 있다. 백남기 농민은 광주 망월동 5·18 묘역에 안장되었다.

박근혜 집권 3년차인 2015년, 노동·농민·빈민·청년·인권·여성·통일·환경 등 전체 시민운동은 열패감에 빠져 있었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는 생각에 이르자 함께 모여서 외치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해 11월14일 민중총궐기대회에는 주최 측 추산으로 13만명, 경찰 추산으로도 8만명 정도가 모였다.

이때 전국에서 농민 3만여 명이 서울로 올라왔다. 그중에 백남기 농민도 있었다. 농민들이 외친 구호는 ‘쌀값 21만원 보장하라’.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의 농업 공약이 쌀 한 가마니에 21만원씩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2015년 당시 쌀값은 한 가마니에 평균 15만원대였다. 쌀 최대 산지인 전라도의 쌀값은 12만원 선까지 주저앉았다. 밥 한 공기에 200원인 상황이 20년째 이어지고 있었다. 농민들이 요구한 쌀값 21만원은 1㎏당 3000원 정도다. 공깃밥 한 그릇에 100원을 더 쳐서 300원을 보장해달라는 요구였다.

하지만 대통령이 한 약속을 지키라고 외치는 농민들에게 정부는 물대포를 쏘았다. 물대포에 물 202t, 최루액 440ℓ가 쓰였다. 집회 참가자를 색출하기 위해 색소도 120ℓ가 쓰였다. 이날 사용한 물과 취루액은 ‘역대급’이었다. 백남기 농민은 차 벽에 설치된 밧줄을 홀로 잡아당기다 직사 살수된 물대포를 맞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서울대병원에서 그저 사망에만 이르지 않게끔 연명 수술이 강행되었다. 이미 지지율이 바닥인 박근혜 정권에서 농민 사망 사건마저 날 경우 상황을 걷잡을 수 없다는 정권의 판단 때문이었다. 서울대병원은 박근혜 청와대에 수시로 환자의 상태를 보고하고, 가족의 동정을 살폈다.

병상에 있는 10개월간 ‘백남기농민대책위’와 시민들은 서울대병원 정문 앞에서 농성하며 백남기 농민과 그 가족을 지켰다. 2016년 9월25일 백남기 농민이 숨을 거둔 뒤에는 정확한 사인을 밝혀야 한다며 부검하겠다고 나섰다. 물대포에 맞고 뇌출혈을 일으켜 죽음에 이른 외인사였음에도 서울대병원 측은 병사라고 적힌 사망진단서를 발급했다. 부검 정국이 한 달여간 이어졌다. 40여 일 동안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장례 투쟁까지 벌여야 했다. 이는 결국 박근혜 정권의 끝을 보는 일이었다. 2016년 11월5일 백남기 농민 장례식에 참석한 시민들은 그 자리에서 촛불을 들어 올려 ‘박근혜 퇴진’을 외쳤다.

학생운동 이어 농민운동에 헌신한 삶

고향인 전남 보성에서 우리밀과 콩, 쌀 농사를 지으며 평생 농민운동에 매진했던 백남기. 그와 박근혜의 악연은 오래전 시작되었다. 청년 백남기를 고문하고 감옥까지 끌고 간 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였다. 중앙대 행정학과 68학번이었던 백남기는 1971년 박정희가 내린 위수령 반대 시위에 참여하다 1차 제적을 당했다. 백남기는 중앙대 학생운동의 중심으로 성큼 들어가 1973년 유신 철폐 시위를 주도했고 긴 수배 생활을 했다. 이때 봉쇄수도원에 들어가 5년간 수도 생활을 했다.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다시 학교로 돌아오지만 1980년 5월17일 계엄군은 백남기를 연행했다. 백남기는 모진 고문을 당하고 징역까지 살다 정치범 딱지를 단 채, 1981년 고향 보성으로 내려와 평생 농사를 짓고 살았다. 1986년 가톨릭농민회에 들어가 농민운동에 몸담은 백남기 농민은 우리밀 살리기 운동에 뛰어들어 보성 최초의 우리밀 재배 농민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그렇게 단 한 번도 고향을 떠나지 않고 선산을 지키며 살았다.

평생 광주에 미안함을 안고 있었던 백남기는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 신청도 끝내 하지 않았다. 1980년 계엄군에 잡혀 고문당하고 징역까지 살았지만 살아남은 자의 미안함이 더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명처럼 백남기는 광주 망월동에 묻혔다. ‘생명과 평화의 일꾼 백남기(임마누엘)의 묘’라고 새겨진 묘비 앞에서 농민으로 살다 죽어간 백남기를 만날 수 있다.

직사 살수의 명령권자인 구은수 전 서울경찰청장은 무죄판결을 받았고, 최종 책임자인 강신명 전 경찰청장은 기소조차 되지 않은 채 퇴임했다. 당시 현장 지휘관과 살수 요원 두 명이 유죄를 선고받았지만 법원 판결에 불복해 항소 중이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죽음이다.

무엇보다 백남기 농민의 죽음에 온전히 책임지는 완결판은 농민의 삶이 나아지는 것이다. 하지만 농민들은 여전히 쌀값 21만원 보장을 외치고 있다.

기자명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백남기 농민 투쟁기록사〉(가제) 저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