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기에 충절의 상징인 삼은(三隱)이 있었다면, 대한민국에는 명절 때마다 청년들을 괴롭히는 ‘3은’이 있다. “취업은 했니?” “애인은 있니?” “결혼은 언제 할 거니?” 한 칼럼(‘추석이란 무엇인가 되물어라’ 〈경향신문〉 9월21일)은 이들 질문에 대해 ‘취업(연애, 결혼)이란 무엇인가?’ 되물으라고 조언했지만, 현실적으로 친족 공동체와 의절할 각오가 돼 있지 않고서야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그 칼럼의 필자는 이미 명절마다 이런 질문들을 ‘받는’ 위치가 아니라 ‘던지는’ 위치에 더 가깝다.
그 칼럼과 그것이 만들어낸 담론의 기저에는 요즘 젊은이들은 불의를 보고도 분노할 줄 모른다며 통탄하는, 어떤 태도가 전제되어 있는 듯하다. 스스로가 ‘리버럴’하고 ‘쿨’하다고 믿는 기성세대는 왜 자꾸만 동세대가 아닌 청년들을 대상으로 발화하고 싶어 하는 걸까? 이제 질문을 던지는 위치가 된 기성세대로서, 동세대의 자제와 자성을 촉구하는 칼럼이 더 시급한 것이 아닐까.
현재를 살아가는 청년 세대로서, 대학원생 또한 ‘3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게다가 대학원생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3은’ 외에도 ‘1만’이 있다. 필자처럼 ‘수료 낭인’으로 살아가는 세월이 길어지다 보면 캡틴 아메리카의 비브라늄 방패만큼이나 든든했던 ‘학생 신분’이라는 알리바이조차도 흐물흐물해진다. 그 위로 인피니티 건틀렛을 장착한 타노스의 손가락 튕기기만큼이나 강력한 최강의 필살기, “이제 박사 논문‘만’ 쓰면 교수 되는 거지?”가 발동된다면? 우주의 먼지가 되어 사라질밖에(고모, 삼촌, 이모, 숙모님들, 1400만605개의 미래를 살펴봤지만 제가 교수가 되는 미래는 없었습니다).
대학원(생)의 현실은 지난 10여 년 동안 엄청나게 변화했지만, 그 변화를 정확히 체감하고 있는 이들은 당사자인 대학원생뿐이다. 학과 조교로 일하는 대학원생이나, 실험실에서 매일 12시간씩 근무하는 대학원생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는 격려는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한다. 대학원 또한 계량화된 평가와 실적의 압박에 시달리는 성과 주체들의 투기장이 된 지 오래다. 대학 예산의 30% 이상이 ‘산학협력’ 혹은 ‘대외협력’이라는 형태를 통해 조성되고 있으며, 여기에는 당연히 대학원생들의 노동력이 투입된다. 학문에 대한 열정만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대학원생은 극소수에 불과하며, 대다수는 연구자 정체성과 노동자 정체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 이러한 구조적 문제에 대해 무지한 채 이루어지는 격려와 조언은 공허한 말잔치에 불과하다.
구조적 문제에 무지한 채 이루어지는 격려와 조언은 공허한 말잔치
그렇다 보니 늘 연휴를 앞두고 연구실 책상에 컵라면이며 초코파이 따위의 식사 대용품을 쟁여놓는 대학원생이 많다. 귀향하지 않고 마음 편한 연구실에서 연휴를 보내기 위해서다. 그들이 모두 송편이나 떡국 알레르기 환자는 아니다. 무한경쟁 사회에서 밟히고 치인 개인을 보듬고, 경쟁보다 더 소중한 가치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시켜야 할 가족 공동체, 친족 공동체마저 대부분 ‘등수 확인’의 장소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대입 인구가 감소하고 생산성과 경쟁력을 높인다는 등 이유로 ‘응용학문’만을 중시하고 기초학문 분야를 축소하는 정책 흐름은 영화 〈어벤져스:인피니티 워〉에서 자원 부족을 이유로 전 우주의 인구를 절반으로 줄여버렸던 타노스의 행위를 연상케 한다. 명절 연휴마다 대학 구내를 좀비처럼 어슬렁거리는 대학원생들이여, 한국에서 대학이라는 제도는 이미 ‘최종장(end game)’으로 접어들었다. 정책이 만들어내는 변화에 순응하여 사라져갈 것인지, 대학을 구성하는 주체로서 목소리를 낼 것인지 우리 스스로가 선택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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