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이 세 번 바뀌도록 은폐된 억울한 죽음이 있다. 공식 확인된 사망자만 551명이다. 박정희·전두환 정권 때 발생한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이다.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부산 일대에서 부랑자를 선도한다는 명목으로 불법 감금하고 강제노역을 시키는 과정에서 인권유린이 자행됐다. 1975년 12월 내무부 훈령 410호인 ‘부랑인의 신고·단속·수용·보호와 귀향 및 사후관리에 관한 업무처리지침’이 법적 근거였다.

1986년 기준 전체 수용자 3975명 가운데 경찰을 통해 입소한 인원이 3117명, 구청을 통해 입소한 인원은 253명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시설 운영비를 매년 10억~20억원씩 지원했다.

절대권력을 등에 업은 폭력과 탐욕은 점입가경이었다. 하루 10시간 이상 강제노역과 학대, 성폭행이 다반사였다. 저항하면 맞아 죽었다. 시신은 내부 담벼락 밑에 암매장했다. 일부 시신은 한 구당 300만~500만원을 받고 대학병원에 팔렸다. 그런데도 전두환 정권은 박인근 형제복지원 원장을 청와대로 불러 1981년에는 국민포장, 1984년에는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했다.

ⓒ시사IN 신선영한종선씨는 지난 6월26일 진실의힘 인권재단이 수여하는 제8회 인권상을 수상했다.

1986년 12월 김용원 당시 부산지검 울산지청 검사가 산행 중 우연히 강제노역에 동원된 원생들을 목격했다. 당시 검찰은 박인근 원장에 대해 특수감금 등 혐의로 기소했다. 1989년 7월 대법원은 박 원장의 건축법 위반, 업무상 횡령 혐의만 인정해 징역 2년6개월을 선고했다. 대법원은 정부 훈령에 따른 부랑자 수용이었다며 특수감금 혐의에 대해선 무죄판결을 내렸다. 박인근 원장은 형을 산 뒤 풀려났다. 그사이 1988년 형제복지원은 폐쇄되고 원생들은 흩어졌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잊혀갔다. 박 원장은 이후 형제복지지원재단, 느헤미야 등으로 법인명을 바꾸고 각종 수익사업을 계속 이어갔다. 부랑인 공익사업을 한다는 이유로 헐값에 불하받았던 국유림을  2001년 한 건설사에 팔아 200억원 넘게 시세차익을 남기기도 했다. 박 원장의 일가친척이 보유한 국내외 재산 규모는 1000억원대로 알려졌다. 박인근 원장은 2016년 지병이 악화되어 한 요양원에서 사망했다. 재산은 아들에게 상속됐다.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나선 이가 있다. 입소 당시 아홉 살 소년이었던 한종선씨다. 한씨는 형제복지원 동료 최승우씨와 함께 지난해 11월3일부터 국회 정문 앞에서 노숙 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고 있다.

한종선씨는 초등 2학년이던 아홉 살 때 작은누나(당시 12세)와 함께 형제복지원에 수용됐다. 아버지가 남매를 경찰에 맡기고 어머니를 찾으러 간 사이 경찰이 형제복지원에 넘겼다. 그가 겪은 형제복지원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하루 일과가 군대식으로 365일 똑같았다. 새벽 4시에 기상해서 세면하고, 스피커로 나오는 찬송가를 따라 부르고, 아침 점호를 한다. 그런 다음 4열 종대로 군가 부르며 운동장을 뛰어 새벽 5시40분쯤 식당 옆에 줄 맞춰 선다. 식사 시간은 30분이지만 실제 5분도 안 준다. 우리가 빨리 먹어야 다른 소대가 밥을 먹으니까. 5분이 넘어가면 밥 먹는 중에 몽둥이로 팼다.”

형제복지원에는 아이부터 노인까지 군대식으로 운영했다. 아이는 ‘영유아 소대’ 및 ‘아동 소대’, 여성은 ‘여성 소대’로, 장애인이나 환자는 ‘정박아 소대’ ‘결핵 소대’로 편성했다.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은 진상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다. 위는 형제복지원 내 직업보도 훈련소.

모든 수용자는 아침 식사 후 강제노역에 동원됐다. 일부 어린이는 형제복지원 안에 설치된 분교에 다녔다. 정부로부터 아동수당을 더 타내기 위한 술수였다. 대부분 아동은 종일 봉투 접기나 볼펜 심 채우기 등 노역에 동원됐다. 성인 소대에서는 매주 월요일 ‘공개재판’이 열렸다. 내부 규율을 위반하거나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힌 사람에게 ‘똥복’이라고 불리는 마대자루를 입혔다. 등에는 ‘나는 도망가다 잡혔다’는 글귀가 붙었다. 3000여 명 전원이 모인 단상에 서서 폭행을 당했다. “박인근은 ‘예수 이름으로 너희를 벌한다’고 외치며 매질을 했다. 예배당에서 1차적으로 맞고, 그다음 원장실로 끌려가 맞고, 다시 중대장실, 선도부, 소대 본방에 차례로 끌려가 맞는다. 그러면 거의 죽어 나간다.” 숨진 원생은 복지원 내 화단에 암매장되었다.

“형제복지원 안에서는 박인근 원장이 황제였다. 원장에게 충성만 하면 사람을 때려 죽여도, 여자 원생들을 강간해도 누구 하나 터치하지 못했다.” 한종선씨는 함께 들어간 작은누나도 형제복지원에서 강간을 당하고 정신병동에 갇혔다고 말했다. “누나가 기상 시간에 달려와서 무서워 못 산다고 집에 가자고 몇 번 나를 끌고 나가려 했다. 그때마다 소대장은 누나를 쓰러뜨리고 자근자근 밟았다. 나중에는 누나가 강간당하고 마대자루에 담겨 버려졌다는 얘기를 소대 조장에게 들었다.”

ⓒ시사IN 신선영한종선씨는 2017년 11월부터 국회 앞에서 농성하며 형제복지원 특별법 통과를 요구하고 있다.

“형제복지원은 법의 사각지대였다”

1986년 검찰 수사와 형제복지원생들의 집단탈출 시도로 당시 국회가 나섰다. 전두환 정권 말기 야당인 신민당은 조사단을 형제복지원에 보냈다. “우리 조사단 일행은 한마디로 경악과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왜 이제 왔느냐’ ‘제발 살려달라’ ‘제발 집으로 보내달라’는 호소를 듣고, 그들의 주거 상태, 식생활, 끔찍한 가혹행위 진상들이 생경한 남의 나라 얘기처럼 눈앞에서 전개될 때 그것은 경악이었고 분노였고 인간적 허무였다. 그곳은 법의 사각지대이며, 인간 매립장이었고, 부랑아 복지원이 아니라 양성소였다(〈부산 형제복지원사건 신민당 진상조사보고서〉, 1987).”

형제복지원이 폐쇄된 뒤 한종선씨는 아버지와 누나를 찾아 나섰다.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갈 데가 없던 그는 갱생원 등을 전전했다. 형제복지원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붙었다. 취직을 했지만 월급도 제대로 받을 수 없었다. “한번은 주민등록증이 없어서 사장 이름으로 적금을 3년 넘게 부었다. 돈을 달라고 했더니 사장이 ‘돈이 어디 있냐, 경찰에 말해 형제복지원으로 다시 보내기 전에 일이나 하라’며 던져준 10만원짜리 수표 하나 들고 도망치듯 나왔다.”

한종선씨는 불량 청소년과 어울리며 교도소를 들락거리기도 했다. “아무리 사람들한테 내 이야기를 해도 형제복지원 출신에, 초등학교도 못 나왔다고 안 믿어주더라. 그래서 초등·중등·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졸업했다. 그 뒤부터 나를 대하는 사람들 태도가 달라지더라.”

한종선씨는 2007년 그렇게 찾아 헤매던 아버지와 누나를 각각 다른 정신병원에서 찾았다. 그 뒤 경북 구미에 터를 잡고 같은 정신병원으로 두 사람을 옮긴 후 매일 면회하며 돌봤다. 2008년 겪은 광우병 촛불집회가 그의 인생행로를 바꾼 계기였다. 광우병 집회 때 경찰에 붙잡힌 한씨는 벌금 300만원으로 약식 기소됐다. “전투경찰 폭행 혐의였는데 억울했다. 정식 재판을 받겠다고 청구해 1심부터 3심까지 무죄를 받았다.”

한씨는 이를 계기로 인권과 주권이 무엇인지 눈을 떴다. 1인 시위가 합법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는 형제복지원 사건을 세상에 알리고 싸워야겠다고 결심했다. 문구점에 가서 피켓을 샀다. ‘피해자들을 동물 짐승처럼 만들었으면 다시 사람이 될 수 있게 도와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라고 직접 썼다. 돗자리 하나와 얇은 이불 하나를 들고 2012년 처음으로 국회 앞에 섰다. “전규찬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가 국회 앞을 지나가다 피켓을 든 나를 보고 다가왔다. 전 교수가 책을 쓰면 어떻겠냐고 권했다. 퍼뜩 형제복지원 사건을 알릴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2013년 한씨가 증언하고 전규찬 교수와 인권운동가 박래군씨가 함께 쓴 〈살아남은 아이〉가 출간됐다. 책이 나오고 사연이 알려지자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80여 명이 연락을 해왔다. 한씨를 중심으로 ‘부산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모임’이 꾸려졌다. 방송 프로그램에서도 이 사건을 본격적으로 다뤘다. 27개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도 꾸렸다. 국회에서 진선미 의원(현 여성가족부 장관)이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과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이 특별법은 19대 국회에서 통과하지 못해 자동 폐기됐고, 진 의원 등이 20대 국회 들어 다시 법안을 발의해 계류 중이다.

지난해 11월 시작한 국회 앞 농성은 300일이 넘었다. 한씨는 농성 중이던 지난 6월26일 진실의힘 인권재단이 수여하는 제8회 인권상을 수상했다.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은 이날 시상식장에 참석해 이렇게 약속했다. “부끄러운 인권유린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행안부 차원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 수여한 박인근 형제복지원장의 훈·포장을 취소하는 조처를 취하겠다.” 지난 7월10일 김 장관은 약속을 지켰다.

노숙 농성 311일째를 맞은 9월13일, 기자가 국회 앞으로 찾아가자 한종선씨는 모처럼 환한 미소를 보였다. 이날 대검찰청 검찰개혁위원회(개혁위)는 검찰총장에게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비상상고를 권고했다. 비상상고는 형사사건의 판결이 확정된 후 법령 위반 등을 발견한 때에 검찰총장이 대법원에 신청하는 비상 구제 절차다. “형제복지원 사건 해결의 첫 삽을 뜬 것 같고,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후련하다. 검찰총장이 나서줘야겠지만 비상상고로 과거 잘못된 법의 잣대를 바로잡을 수 있겠다는 기대가 크다.”

9월16일 오거돈 부산시장도 “당시 부산시는 형제복지원에 대한 관리감독 책임을 소홀히 함으로써 시민의 인권을 보호하지 못한 책임이 있다. 부산시를 대표하는 시장으로서 너무나 늦었지만 시민 여러분과 누구보다 피해자와 그 가족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라며 고개를 숙였다. 오 시장은 특별법 제정을 촉구했고 피해자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동안 특별법 초안 마련 등 한씨의 투쟁을 옆에서 도운 조영선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형제복지원은 아우슈비츠였다. 생존자들이 왜 끌려갔고 왜 희생돼야 했는지 진실을 밝히기 위해 특별법이 제정되어야 한다. 생존자들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피폐해져 있다. 이들이 모욕당하고 자유를 핍박받을 이유는 없다. 국회는 판결도 없이 5년에서 10여 년간 감금되었던 수많은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어야 한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