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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와 항상 함께한다는 느낌

반올림 엠티에 다녀왔다. 오랜 농성을 마친 기념으로 농성장을 지켰던 이들과 바닷가에서 2박3일을 보낸 자리였다. 무던한 사람, 철지난 노래, 변치 않는 신념, 짠 눈물 같은 것들을 떠올렸다.

은유 (작가) webmaster@sisain.co.kr 2018년 10월 12일 금요일 제5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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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엠티에 ‘시간이 되면’ 같이 가자는 문자가 ‘콩(공유정옥 활동가)’에게 왔다. 삼성 직업병 문제 해결을 위한 1023일 농성을 마친 기념으로 농성장을 지켰던 이들이랑 강릉 바닷가에서 2박3일 편안하게 쉬다 올 예정이란다. ‘시간이 되나’ 머리를 굴려본다. 시간과 돈을 거래하는 시대. 시간이 화폐다. 이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나도 예외는 아니라서 돈으로 보상되는 일 위주로 시간을 살뜰히 썼구나 싶다. 그건 잘 살았다기보다 초조하게 살았다는 느낌에 가깝다. 이건 다르다. 사적 여행도 아니고 공적 활동도 아니다. 작가 초청 강연 말고 그냥 같이 놀자니까 좋아서 짐을 쌌다.

ⓒ윤성희

“아유, 바쁠 텐데 어떻게 시간이 됐어?” 삼성 직업병 피해자 한혜경씨의 어머니 김시녀씨가 활짝 웃으며 반긴다. 시간이 뭐길래. 왠지 부끄러웠다. 어머니는 몸이 불편한 딸 혜경씨를 휠체어에 태우고 1000일이 넘도록 매주 시간을 내어 춘천에서 서울을 오가며 한뎃잠을 잤다. 고 황유미의 아버지 황상기씨도 속초에서 강남역을 묵묵히 오갔다. 농성장 해단식 날 물었다. “3년을 하루같이 어떻게 다니셨어요? 오기 싫진 않았어요?” 그는 주저 없이 말했다. “힘든 적은 많았지만 가기 싫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위인전에 나오는 어떤 인물보다 커 보였다. 그분들 삶의 자리에 나를 놓아보면 난 그렇게 살 자신이 없다. 구체적으로 승산 없(어 보이)고 기약 없(어 보이)는 싸움에 매일매일 ‘시간을 낼’ 배짱이 없다. 싸운다고 죽은 자식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병이 낫는 것도 아니라는 판단을 뒤로하고 삶을 통으로 내어 싸운다는 건 어떻게 가능한가.

언젠가 광화문 집회에서 혜경씨가 무대에 올라가 발언을 했는데 그걸 지켜보는 이종란 노무사 눈에는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십몇 년 수천 번은 들어서 다 아는 얘기일 텐데 진심으로 마음 아파했다. 엠티에서도 혼자 힘으로 화장실을 가거나 씻을 수 없는 혜경씨를 활동가들이 너도나도 나서 휠체어를 밀었다.

드물고 귀한 관계. 같이 보내는 시간을 물 쓰듯이 써야만 가능한, 무심히 밥을 먹고 곁을 지킨 인연이 갖는 한가함과 안정감이 그들 사이에 있었다. “누군가와 항상 함께한다는 느낌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 주는 가장 값진 선물(211쪽)”이라고 했던가. 아마도 한 사람이 마냥 담대하고 무모해질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을 믿기 때문인 거 같다.

<올 어바웃 러브>
벨 훅스 지음
이영기 옮김
책읽는수요일 펴냄
엠티 첫날 밤, 흰 파도 까불고 별 총총 박힌 바닷가로 ‘민중가요 노래집’과 기타를 들고 우르르 나갔다.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가사가 막힘없고 노래가 자동 재생되는 이종란과 콩과 나는 ‘올드 제너레이션 시스터즈’라는 놀림을 받았다. 30대 농성장 지킴이가 신기한 눈으로 물었다. “대학 때 노래만 했어요?” 콩은 공강 시간마다 과방에서 노래를 불렀다고 했다. 나는 노조 사무실에 한 시간 일찍 출근해 기타 코드 어설프게 잡아가며 시간을 보냈다. 자격증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에 왜 그토록 열심을 다했는지 설명할 순 없지만, 사랑과 신념이 가슴에 출렁대던 시절임은 분명하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근본 원칙과 사랑의 원칙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본주의의 급류에서 부서진 삶을 복구하는 사람들, 그러는 사이 그들은 사랑의 원리를 깨우쳤다. “삶은 상호 의존적이라는 점은 무시되고, 개개인은 고립된 채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것에 최상의 가치를 두(111쪽)”도록 세상이 우리를 길들이고 있기에, 무가치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일에 무모하게 시간을 보낸 것들만 곁에 남아 있다. 무던한 사람, 철지난 노래, 변치 않는 신념, 짠 눈물 같은 것들.

※ 이번 호로 ‘은유 읽다’와 ‘김현 살다’ 연재를 마칩니다. 수고해주신 필자와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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