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4일 쌍용차 해고자 복직 문제가 일단락되었다. 2009년 6월8일 해고 이후 112개월이 지났으며 3385일이 흘렀고 8만1240시간을 보내야 했다. 불가능처럼 긴 시간이었다. 합의서는 두 장. 3385일의 투쟁을 끝내는 데 672자가 쓰였다. 2018년 연말까지 119명 해고자 가운데 60%인 72명을 복직시키고 남은 해고자는 2019년 6월30일까지 복직하도록 하는 데 합의했다.

합의문이 발표되던 순간, 쌍용차 서울 대한문 분향소에는 웃음기 없는 박수와 구멍 난 침묵만 흘렀다. 긴 시간 정적이 휘감았다. 내뱉지 못하는 말들과 내뱉어지는 말들 사이로 어렵사리 숨이 쉬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어색하게 움직였고 분향소 주변 후미진 곳에서 한숨을 내뱉었다. 웃는 얼굴 속에 새카맣게 타버렸던 마음이 하얗게 다시 타들어갔다.

ⓒ시사IN 이명익2009년 8월5일 경찰특공대가 파업·농성 중인 쌍용차 노조원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77일간 옥쇄 파업을 한 2009년 그해 여름, 경찰에 쫓겨 7m 남짓한 공장 옥상에서 추락한 노동자가 ‘퍽’ 하고 바닥에 깨졌다. “숨 쉬어 숨!” “야 거기 허리띠 풀어. 어서!” 팔다리를 주무르며 급하게 허리띠를 풀자 연체동물처럼 육신이 흐물거렸다. 뺨을 때리고 목에 걸린 수건으로 피를 닦아내고서야 신원을 알 수 있었다. 움푹 팬 볼과 깡마른 체구,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추레한 옷. 77일 동안 공장 안에서 사투를 벌인 대가치곤 처참했다. 동료들이 손을 썼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 사달이 날 뻔했다. 척추뼈가 부러진 이 조합원은 결국 살아났지만 이제는 조합 활동을 하지 않는다. 노조 활동을 하지 않아도 괜찮고 욕해도 상관없고 원망해도 좋았다. 건강하게 살아 있는 것만이 최선일 때가 있었으니까. 손쓸 틈 없이 동료들이 죽어갈 때면,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최고의 노조 활동처럼 여겨졌다. 가해자가 손에 닿지 않으면 그 분노는 어디로 향할까. 원망은 누가 들어야 했을까.

명절에도 고향집을 찾지 않는 해고자가 많았다. 이사를 하거나 이웃과 연락을 끊고 사는 경우도 허다했다. 먹고살기도 빠듯한데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쌍용차 소식에 일일이 대꾸하는 것도 버거웠다. 쌍용차 해고자들에게 씌워진 ‘폭도’ 이미지는 오래갔고 강력했다. 맞았지만 맞았다고 말하지 못했다. 억울해도 억울하다고 외치지 못했다. 커가는 아이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두렵기도 했다. 텔레비전에 쇠파이프와 화염병이 등장하는 자료 화면이 나오면 조용히 자리를 피했다. 동료들이 연이어 죽어갈 때도 속울음을 울었을 뿐 장례식장 문턱을 넘기 어려웠다. 떠오르는 모든 기억이 원망스러웠다.

파업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조용히 희망퇴직서 쓰고 제 발로 회사를 나왔으면 달라졌을까. 하루에도 수십 번 생각을 곱씹었다. 불신과 비난으로 가득 찬 희박한 공기 속에서 생각은 구석으로 치우쳐갔다. 내가 문제이고 내 탓이고 내가 선택을 잘못했다고, 나를 갉아먹었다.

‘다른 선택을 했으면 나아졌을까’ ‘그때 저 녀석만 아니었어도….’ 우리를 괴롭혔던 건 해고자 복직 문제보다 떨쳐지지 않는 그 ‘생각’이었다. 동료들 사이가 갈리고 서로를 의심하면서 지칠 대로 지쳐갔다. 부부 사이도 뒤틀리고 금이 갈 대로 갔다. 가해자는 자본이고 국가라 해도, 그들은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고 손에 닿지 않았으니까. 실체를 가늠할 수조차 없는 거니까. 우리 안의 지옥에서 웃다가 울다가 미친놈처럼 지쳐갔다. 아파트가 손해배상 가압류에 잡혀도 모두가 내 탓 같았다. 복직 약속 시한이 지나도 먼저 나서서 바른소리 하기가 어려웠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생각을 파업 이후 줄곧 하고 있었으니까. 공권력에 대들었다가 어떤 꼴을 당하는지 경험으로 너무 잘 알게 되었으니까. 옆에서 말해준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자기 나름의 생존 방식이 한편에선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억울함을 벗는다는 것조차 이제는 피로한 일이 되어버렸다.

 

ⓒ시사IN 신선영9월19일 노조원들이 서울 대한문 앞 쌍용차 해고자·가족 희생자 시민분향소를 거두고 있다.


복직 합의 이후, 이랬으면 좋겠다

복직 합의 이후 남은 과제가 여럿 있다. 복직이 목표인 사람과 남은 과제가 더 중요한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이제는 하나둘 정리해야 할 시기에 진입한 것은 분명하다. 대통령이 공식 사과를 했다. 국가 폭력에 대해 국가 이름으로 사과를 한 것이다. 바닥에 떨어진 명예와 시민으로서의 삶이 온전하게 존중받았다고 생각하자. 억울함에서 벗어나 스스로 피해자 의식에서 해방되어야 할 때다. 피해자로 사는 것은 가해와 피해 구도에 가두어져 상처 안에 머무르는 삶이다. 우리가 정당하다고 인정받았으며 ‘함께 살자’는 주장이 옳다고 받아들여졌다. 피해 의식과 피해 경험에만 얽매일 이유가 없다. 스스로 피해자라는 생각에서 해방될 때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남은 삶도 과제도 자유로워진 노동자들만이 이끌 수 있으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그냥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 남은 과제 따위 신경 쓰지 않고 그저 평범하게 일하며 살아가도 정말 좋겠다. 긴 세월 너무 고된 삶을 살았으니까.

국가 폭력의 상처가 도처에 머물고 있다. 깊숙이 박혀 있다고 하지 않는 이유는 이 상처가 치료 가능하며 또 상흔을 지워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만나고 관계 맺을 때 공포와 의심과 저항과 환멸을 떨치기 힘들다. 생각 속에 불신의 크레바스가 퍼져 있다. 이 균열을 우회하기도 하고 때로는 메우며 가기도 해야 한다. ‘함께 살자’는 외침을 수용하지 않은 사회가 원망스러웠다면 이제부터라도 우리가 실천하자. 특히 쌍용차 해고자인 우리들은 앞으로 삶 속에서 ‘연대’를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더 나은 사람으로, 향기 나는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좋겠다. 지금 딛고 있는 이곳과 지금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음 계단을 밟고 서기 위해서라도 상대가 아닌 우리 안의 변화가 우선이다. ‘함께 살자’와 ‘연대’가 국가 폭력에 맞서 살아남은 우리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테니까.

쌍용차 문제 해결은 복직 합의가 다일 수 없다. 최근 실체가 드러난 쌍용차 파업 폭력 진압의 배후에 국가기관이 총동원됐다. 국정원, 기무사, 검찰, 경찰 그리고 청와대와 대법원 재판 거래까지. 한 사업장의 문제로 보기엔 규모가 압도적이고 탄압의 질도 매우 고약하다. 복직 합의 이후 국가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나가는지 우리는 주목하며 싸울 것이다. 국가 이름으로 자행하는 손해배상 청구 및 가압류를 제도적으로 없애고 정리해고제 또한 엄격히 제한해야 한다. 국가 폭력의 상흔은 피해 당사자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도 같은 깊이로 훼손되었다. 위임된 권력은 정상 범위 안에서만 작동돼야 하고 범위를 벗어나면 권력 작동도 멈춘다는 것을 우리는 지난 이명박·박근혜 시절에 경험했다. 잘못에 대한 수정 기능을 상실한 국가를 국가라 부를 수 없다. 서른 명이 생명을 잃었다. 국가 폭력의 상흔을 어떻게 치유해야 하는지 지난 쌍용차 9년을 통해 배웠으면 좋겠다.

기자명 이창근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전 기획실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