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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소서에 담지 못한 진짜 진로

대학이 요구하는 자기소개서에는 진로를 고민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고등학교 3년 동안 겪은 제한된 경험을 진학하고자 하는 학과와 연결해야 하는 어려움에 처한다.

차성준 (포천 일동고등학교 교사) webmaster@sisain.co.kr 2018년 09월 21일 금요일 제5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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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 시즌이다. 이때가 되면 많은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은 자기소개서(자소서) 첨삭을 받으러 찾아온다. 상담을 하다 보면 자소서를 ‘갈아엎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머리를 싸매고 끙끙 앓던 어떤 학생은 “자소서 없는 학교에만 원서 내면 안 되나요?”라고 묻는다. 학생생활기록부에 한 줄이라도 더 적을 수 있는 활동을 닥치는 대로 한 학생도 있다. 모두 자신의 진로와 그동안 해온 활동을 자소서에 어떻게 녹여내야 할지 혼란스러워했다.

“왜 이게 관심 있었는데?” “어떤 공학자가 되고 싶은데?” “이 전공에서 네가 관심 있는 분야는 뭔데?”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아이들의 진짜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서다. 진로 관련 질문에서 선뜻 답을 내놓을 수 있는 학생은 많지 않다. 다들 추상적으로는 대답할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 들어갈수록 대답하기 어려워한다.

ⓒ박혜성 그림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었던가. 필자 또한 여러 직업과 분야에 관심을 가졌다. 대학생 끝자락이 되어서야 교육 봉사 경험을 했다. 그 영향으로 다시 교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사실 교사가 아닌 다른 직업군에서 일하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 정도로 다른 직업군에 흥미가 높았다. 한 직장에서 일을 하다가도 어떤 계기로 진로를 바꾸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하게 되리라고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을 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이런 선택의 과정을 당연하게 여긴다. 

대학이 요구하는 자소서에는 이런 자연스러운 과정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대학이 채택한 대학교육협의회 자기소개서 대학별 공통 문항을 보자. 1번부터 3번까지 ‘고등학교 재학 기간 중’, ‘학교생활 중’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그 기간을 제한하고 있다. 대학별로 차이가 있는 4번 문항에서도 ‘고등학교 재학 기간 중’으로 하는 대학이 여럿 있다. 졸업 이후 받을 수 있는 사교육 활동이 자소서에 반영되는 것을 막는 효과가 분명 있다. 하지만 사교육이 아닌, 고등학교 졸업 이후 경험이 원천적으로 자소서에 반영되지 못하는 역효과도 있다.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이들은 고등학교 3년 동안 겪은 제한된 경험을 진학하고자 하는 학과와 연결해야 하는 어려움에 처한다. 진로에 대한 고민과 다양한 경험을 ‘자연스럽게’가 아니라 고등학교 3년간 ‘어떻게든’ 해내야 하는 것이다. 졸업과 동시에 대학 진학으로 이어지지 않은 사람들은 고등학교 졸업 이후 경험이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자소서에는 반영하기 어렵다.

진로 고민을 억지로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날이 오기를

심지어 자소서 4번 문항에서 어떤 대학의 경우는 ‘대학 졸업 후의 계획’까지 물어본다. 고등학교 1학년 담임을 맡으면서도 학생들의 진로가 수시로 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고등학교 3학년 때도 진로를 고민하는 학생이 수두룩하다. 그런 학생들에게 대학 졸업 후 계획을 세우라니? 이토록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졸업 후의 계획까지 물어보는 것은 과하지 않을까? 마치 사범대학에 진학하려는 학생에게 ‘교사가 되어서 학급 운영을 어떻게 하고 싶은데?’라고 묻는 것과 같다. 차라리 어떤 방향이나 목표를 가지고 대학 생활을 할 것인지 물어보는 게 더 낫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자소서 문항을 바꾼다고 대학 서열화와 입시 지옥으로 대표되는 교육 시스템 자체가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인문계 고등학교가 대학 진학을 위한 과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현실에서 이런 지적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싶다. 그렇지만 적어도 자소서 대상이 아니라고 고등학교 이전과 이후 경험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학생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자소서에 들어갈 수 있는 활동만이 삶에 유익한 경험인 것도 아니다. 진로에 대한 고민을 진학 때문에 억지로 하지 않아도 되는, 대학을 가기 위해 일부러 어떤 경험을 하지 않아도 괜찮은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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