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떤 편인가. 세상이 점점 좋아진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망해간다고 여기는가. 나는 본래 생겨먹기를 낙천적인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응원하던 권투선수가 KO패를 하기 직전까지도 역전승을 하리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아 빈축을 사곤 했다. 쇼핑을 할 때마다 눈에 띄는 족족 물건이 다 좋아 보여 결정 장애를 겪곤 한다. 나이가 들어가며 세상의 쓴맛을 많이 보고 증상이 ‘호전’되기는 했으나 본바탕은 역시 대책 없는 낙관주의자라고 생각한다.
ⓒ한성원 그림

하지만 지난겨울과 이번 여름을 겪고 나서는 심상치 않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다. 삼한사온과 같은 여백이 사라진 혹독한 추위와 9월에도 좀처럼 누그러질 줄 모르는 긴 무더위 속에서 자연이 인간을 품는 게 아니라 맹렬히 밀어낸다는 느낌을 받는다. 날씨가 살인적인 게 아니라 실제로 살인을 한다. 우리는 이미 재난 속에 깊숙이 발을 들인 것은 아닐까. 요즘처럼 ‘안전 주의’ 문자와 특보를 많이 접한 기억이 없다. 인류는 당면한 가장 큰 숙제인 기후변화 문제를 스스로 풀지 못하고 결국 대재앙을 불러들이고 만 것일까. 아무리 낙천적인 사람일지라도 겁을 집어먹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다.

종교는 본래 인류의 미래에 비관적이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죄악에 물든 생지옥이거나 생로병사에 갇힌 고통의 바다일 뿐이다. 우리는 신을 통해서만 이 막장의 세계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똑같이 속세에서는 행복을 누릴 수 없다고 가르치지만 기독교와 불교의 입장은 또 다르다.

기독교는 우리가 선악과를 따 먹은 원죄와 이 세상에서 저지른 죄악을 고백하고 신을 따르지 않으면 죽어서 지옥불 속을 헤매게 되리라고 경고한다. 불교 역시 우리가 몇 가지 근본 죄악을 저지르면 극락에 갈 수 없다고 위협하지만 이건 그냥 엄포다. 불교의 가르침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미숙한 단계에 있는 이들에게 편의상 얘기하는 거짓말이다. 우는 아이에게 당장 그치지 않으면 망태 할아버지가 잡아간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불교에서는 이를 방편가설이라고 부른다.

방편가설이 가장 절묘하고 세련되게 전개되는 작품이 바로 〈서유기〉이다. 이 작품에서 진화의 법칙에 묶여 있다고 믿기 힘들 정도로 재주가 많은 원숭이 손오공은 하늘과 땅을 뒤집어엎는다. 천도복숭아를 훔쳐 먹고 불사의 몸이 된 것도 모자라 저승 생사부에서 원숭이 족속의 이름을 모두 지워버리는 행패를 부린다. 하지만 이 원숭이의 왕은 날고 기어봤자 결국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는 걸 깨닫고 불교에 귀의한다. 이 작품은 부처가 전지전능한 신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인간 스스로 결함이 있는 존재라는 점을 절실하게 깨달아야만 비로소 절제와 자비를 바탕으로 하는 불법(佛法)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고 깨우침을 주려는 것이다.

과학자들 간에도 의견 대립이 날카롭다. 미국의 유명 컨설턴트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찰스 C. 만즈에 따르면 이는 ‘마법사’와 ‘예언자’의 싸움이다. 예언자의 대표는 미국의 생태학자인 윌리엄 보그트이다. 1948년 식량 위기가 닥칠 것이라고 경고한 그의 책 〈생존으로 가는 길(Road to Survival)〉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는 인구가 계속 늘어나면 지구가 더 이상 사람들을 먹여 살릴 수 없어 대기근이 닥치리라고 경고했다. 인류가 살아남으려면 소비와 인구 증가를 획기적으로 억제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모기를 박멸하기 위한 습지 말리기를 홀로 반대해 나중에 현대 환경운동의 기본 아이디어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국의 화학자 노먼 볼로그는 마법사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과학과 기술로 식량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고 실천했다. ‘모든 사람이 적당량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게 정의’라는 신념을 가진 그는 품종개량과 화학비료의 사용에 바탕을 둔 이른바 ‘녹색혁명’을 주도했다. 그는 파키스탄과 인도의 식량 자급을 도와 2억4500만명의 목숨을 구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마법사 지지자들은 우리가 신과 닮은 특별한 존재라고 믿는 기독교 쪽에 더 기운 사람들이다. 인간은 지구의 영리한 지배자이다. 성장과 개발은 우리 종이 가진 특권이자 축복이다. 우리가 잠재력을 발휘하기만 한다면 자원을 무한정 확보할 수 있다. 우리는 얼마든지 부처님의 손가락을 강제로 벌리고 우주 저 너머로 날아갈 능력이 있는 존재다. 생명의 신비를 벗겨내 영생불사의 존재가 되면 안 될 이유라도 있는가.

반면 예언자는 지구는 유한하며 우리는 환경에 구속된 존재라고 믿는다. 안정과 보존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자연은 인간이 임의로 바꿀 수 있는 질서가 아니다. 과학이 생명에 깊숙이 개입하려는 것은 위험천만한 오만이다. 우리가 의지하는 기술과 과학이 생각지도 못한 고통을 우리에게 안겨줄 수 있다. 스스로의 한계를 깨닫고 부처님의 ‘불경 셔틀’이 된 손오공을 우리는 본받아야 한다.

1970년 노먼 볼로그가 노벨평화상을 타면서 양측의 대립은 마법사의 완승으로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인류의 미래를 보장할 것 같았던 녹색혁명이 가진 결점이 속속 드러나면서 논쟁은 다시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화학비료의 과도한 살포와 생산 증대만을 목표로 한 품종의 단일화는 들판에 재앙을 불렀다. 전 세계 곡창은 지력과 병충해에 대한 면역력을 잃고 생산성을 상실해가는 중이다.

기후변화를 둘러싼 논쟁에서는 마법사가 예언자에게 현저하게 밀리는 양상이다. 마법사들은 과학과 기술을 동원해 지구를 식히는 한편 새로운 에너지를 개발해 온실가스 농도를 낮출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귀를 기울이는 이들이 점점 줄어간다. 과학자들 가운데는 생물학 실험실의 철칙을 떠올리며 몸서리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박테리아를 배양접시에서 키우면 순식간에 수가 불어난다. 그러고는 주변의 모든 것을 먹어치우고 결국 함께 굶어 죽는다. 그와 같은 일들이 지구에 성공적으로 적응해 번성한 모든 종에게서 일어난다. 세계는 그들의 배양접시이다. ‘개체수가 끔찍하게 불어난다.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게걸스럽게 주변을 먹어치운다. 계속 울타리를 허문다. 어느 순간 스스로 만든 폐기물에 갇힌다. 결국 공멸한다.’

“이게 바로 성공한 생물이 자기들의 존재를 지구상에서 지워버리는 공통된 방법이라오”라고 많은 생물학자들이 찰스 C. 만즈에게 음울하게 말해주었다.

‘나라가 결딴났다’고 외치는 가짜 예언자들

상황이 너무 험악해서일까. 최근에는 이론가라기보다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전도사’와 같은 이도 나타났다. 세계적인 인지과학자 스티븐 핑커는 최근 〈다시 계몽의 시대:이성, 과학, 휴머니즘, 그리고 진보(Enlightenment Now:The Case for Reason, Science, Humanism, and Progress)〉라는 책을
써서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그에 따르면 대다수 국가의 여론조사에서 많은 사람이 자국의 미래가 어두우리라고 답하는데 이는 근거가 희박한 감상일 뿐이다. 그는 다양한 통계수치와 도표를 제시하며 우리 삶이 곳곳에서 개선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전 세계에서 현대적 보건 의료가 유아와 어머니의 사망률을 획기적으로 낮췄으며 어린이들은
예전보다 더 잘 먹고, 교육받고, 덜 착취당한다. 예전보다 살인· 전쟁·강간·인종청소도 줄었다고 핑커는 알려준다.

미국인은 너 나 할 것 없이 바쁘다고 투덜대지만 그의 부모 세대에 비해 일주일에 남자는 10시간, 여자는 6시간 더 여가를 즐긴다. 언론은 인터넷에서의 증오 확산을 연일 문제 삼지만, 실제로 검색 분석에 따르면 인종차별, 성차별, 반(反)동성애 클릭 성향은 퇴조하는 중이다.

그는 “평화를 유지하며 꾸준히 번영을 누리는 지역이 늘어나고 있으며, 곧 지구 전체가 그렇게 될 것이다”라고 장담하지만 트위터나 페이스북에는 그에 대한 조롱과 비난이 산처럼 쌓여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끈질긴 비판자인 〈블랙 스완〉 저자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에 따르면, 핑커는 자신의 논리 전개에 유리한 통계만 골라 뽑고 대재앙을 예고하는 불길한 수치들은 외면하고 말았다.

핑커의 논리에는 허점이 많지만 정치적으로 예언자의 득세를 위험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지적은 귀담아들을 만하다. 그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취임 연설을 인용했다. “엄마와 아이들은 가난이란 덫에 갇혔다. …교육제도는 젊고 아름다운 학생들로부터 지식을 빼앗아간다. 그리고 범죄, 갱, 약물….” 이 모든 얘기가 거짓인데도 비관론에 젖은 사회가 머리에 부정적인 생각만 가득한 검증 안 된 지도자에게 표를 주고 말았다고 핑커는 탄식한다.

영국의 저명한 철학자 존 그레이에 따르면 근대 정치는 종교사의 한 장(chapter)일 뿐이다. 공산주의나 나치즘은 결국 기독교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주워온 종말론을 개조한 데 지나지 않는다. 종교를 부정하는 용어가 뼈대를 이루고 있지만 유토피아란 종교적 신화의 세속 버전이다. 지금 세상은 망했으니 갈아엎고 새로운 천년왕국을 만들자는, 인간보다 신념을 앞세운 구호는 항상 인간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고 비극으로 끝났다. 히틀러나 스탈린 말고도 박정희 아류의 전 세계 올망졸망한 독재자들도 모두 종말론을 기치로 내건 불량한 예언자였다. 세계 곳곳에서, 그리고 다시 우리 사회에서 ‘경제가 폭삭 망했다’ ‘나라가 결딴났다’고 외치는 가짜 예언자들과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은 개탄할 일이다. 사람들은 세상이 좋아졌는지 나빠졌는지 쉽게 묻지만 막상 답하자면 놀랍도록 복잡한 일이다.

참고한 활자:〈추악한 동맹〉(이후), 〈뉴요커〉, 〈워싱턴포스트〉

기자명 문정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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