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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비잠], 한여름에 지나간 사랑했던 기억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 다큐멘터리 <말하는 건축가> 등을 연출한 정재은 감독이 신작 <나비잠>을 발표했다. 일본을 배경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기억이 삭제되는 인물을 그렸다.

임지영 기자 toto@sisain.co.kr 2018년 09월 13일 목요일 제5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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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도서관’이라는 게 있다. 책이 작가별·출판사별로 꽂혀 있지 않고 표지 색깔별로 정리된 도서관이다. 그곳에서 독자는 원하는 책을 찾는 대신, 우연히 ‘발견’한다. “우연이라도 누군가에게 이 영화가 보여질 수 있다면 좋겠다.” 정재은 감독이 영화 <나비잠>의 개봉을 앞둔 소감을 밝혔다. 그는 이번 영화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책꽂이에, 내 영화가 어떻게 꽂히기를 바라는가.’ 영화를 만들면 만들수록, 영화 한 편을 제작해 관객에게 다가가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걸 실감한다. 우연이라도 관객과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이번 영화에서 ‘우연의 도서관’을 만나볼 수 있다.

2001년 <고양이를 부탁해>로 데뷔한 이래, 2005년 <태풍태양> 이후 한동안 건축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었다. 공공건축으로 유명한 건축가 정기용의 생애 마지막 1년을 담은 <말하는 건축가>(2011)에 이어 서울시청 신청사 건립을 둘러싼 논란을 다룬 <말하는 건축 시티:홀>(2013) 등이 대표적이다. 12년 만의 극영화는 일본을 배경으로 한다. 일본 자본이 80% 이상 들어가고, 일본어로 된 영화다.
ⓒ시사IN 신선영
정재은 감독(사진)은 “우연이라도 누군가에게 영화 <나비잠>이 보여질 수 있다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데뷔작 <고양이를 부탁해>가 일본에서 개봉할 당시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때의 인정이 정 감독에게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특히 일본을 대표하는 지식인이자 도쿄 대학 총장을 역임한 영화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가 극찬했다. 그게 큰 힘이 되었다. 이번에도 지난 5월 일본에서 먼저 개봉한 영화를 보고 그가 메일을 보내왔다. 일본 문학과 영화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정 감독은 일본이 또 하나의 무대라고 생각한다. “당시 내 영화를 본 젊은 층이 어느 정도 나이를 먹었고 그들이 내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종이에 소설을 쓰는 베스트셀러 작가 료코의 잃어버린 만년필을 작가 지망생인 한국 유학생 찬해가 찾아주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료코는 찬해에게 자신의 마지막 소설을 함께 준비하자고 제안한다. 그가 ‘말로 쓴 소설’을 찬해가 듣고 적어 내려가는 방식이다. 소설이 완성될수록 서로를 향한 감정이 깊어지지만 료코는 기억을 잃어가는 중이다. ‘사랑의 기억’에 관한 영화다. 사랑이 끝난 다음 이런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나는 그 사랑을 잊지 않았는데, 당사자는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사랑의 기억이 어떻게 남는가에 착안했다. ‘기억을 잃어버리는’ 캐릭터는 좀 더 극단적으로 설정했다.

정재은 감독은 사람이 죽을 때 육체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보다,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의식’ 자체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 더 공포심을 갖는다고 생각했다. 그 의식의 많은 부분은 기억으로 구성된다. “인간의 기억이 인간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고 사랑의 기억이라는 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사랑의 기억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된다. 이 거대한 테마로 영화를 만들어보자고 생각했다.” 단지 사랑했던 기억만 잃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기억 자체가 삭제되는 인물을 그려보기로 했다.
ⓒ(주)트리플 픽쳐스
료코의 서재는 작가별·출판사별로 책이 꽂혀 있지 않고 표지 색깔별로 정리되어 있다.

특별히 더 아름다운 현실적인 공간들

료코는 소설가이고 찬해는 작가 지망생이다. 왜 하필 소설가이고 소설일까. 소설을 쓰는 것 자체가 ‘기억의 집’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서다. 사랑의 기억을 남기는 매개체로 소설을 활용했다. 료코 역은 나카야마 미호가 맡았다. 1999년 한국 개봉 당시 신드롬을 일으켰던 <러브레터>의 주인공이다. 감독 스스로가 그 영화의 열성 팬이었고 그 시기에 청춘을 보낸 사람들에게 나카야마 미호는 잊을 수 없는 얼굴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얼굴이라고 여겼다. 어느덧 40대 후반에 접어든 그가 기억을 잃어가는 유명 작가 역을 입체적으로 연기했다.

나카야마 미호가 시나리오를 읽고 결정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정 감독이 그사이 여러 차례 ‘러브레터’를 보냈다. 마음을 돌리기 위해 료코의 캐릭터에 대해 얘기했다. “죽음과 기억의 소멸을 앞두고도 강하고 의연하게 대처하면서 자신이 할 일을 잘 정리하는 강한 여성으로 그렸으면 좋겠다고 설명했다. 의지가 강한 여성이라는 걸 배우도 좋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극중 료코는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한다. 다소 위악적인 면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회와 불화하던 여자가 죽기 전 세상에 자기를 이해시키는 구조를 만들고 싶었다. 여자의 성격이 좀 ‘세다’고 느껴지는 면이 있는데 배우 스스로 그런 면을 즐겼던 것 같다.

배우 김재욱은 일찌감치 캐스팅을 해둔 상태였다. 일본어를 잘하는 한국 배우를 찾다 연이 닿았다. 현장에선 그가 유일한 한국인이어서 감독에게 위로가 되었다. 감독 역시 같이 영화를 만들어나가는 동료라는 생각으로 촬영했다. 김재욱은 가난한 유학생 역할이라 실제로도 매니저 없이 비슷한 방식으로 일상을 유지했다. 일본어에서 발달된 존댓말, 존경어, 존칭어 등을 많이 구사했다.

영화 속 공간을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다. 도시와 건축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 감독이 만든 이번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장소는 집이다. “만일 기억을 다 잃고 지금의 시간과 공간을 등지고 떠나야 한다면 세상이 어떻게 그려질까? 아마 굉장히 아름답게 기억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영화에 나오는 현실적인 공간들이 특별히 더 아름답기를 원했던 것 같다.” 스토리가 있는 집, 시간의 축적을 표현할 수 있는 집을 섭외하는 게 관건이었다. 극중 두 사람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료코의 집은 일본 건축가 아베 쓰토무가 설계한 집이다. 살던 집을 그가 선뜻 빌려주었다. 촬영의 60%가 거기서 이뤄졌다.

액자형으로 설계된 료코의 집은 일본 건축사에서도 중요한 건축물이다. 집 안에 또 하나의 상자(집)가 있는 구조다. “일본의 집을 보면 외부와 접점이 많이 없다. 감춰진 집이 많은데 이 집은 2층을 창으로 전면 배치해 개방감 있게 만들었다. 가옥의 특성 자체가 일본의 현대 건축에서 새로운 요소를 가지고 있다.” 1970년 만들어진 건축물에 실제로 건축가가 살고 있다는 점도 특징이다. 집의 장점을 영화에 가져올 수 있었다. 특히 수많은 책을 표지 색의 채도와 명도에 따라 정리한 료코의 2층 서재가 인상적이다. 일본에는 컬러풀한 책 표지가 많지 않아 애를 먹었지만 서재가 나중에 ‘우연의 도서관’으로 다시 등장할 때도 시각적인 아름다움이 감동을 준다. 아베 쓰토무 역시 본인의 집에서 찍을 수 있는 모든 걸 찍은 것 같다는 평을 남겼다.

촬영은 도쿄와 도쿄 인근에서 이루어졌다. 도쿄 하면 연상되는 복잡함과는 거리가 멀다. 일본과 한국의 도시는 어떻게 달랐을까. 영화를 본 일본 사람들이 배경이 일본 같지 않다고 말하기도 했다. <고양이를 부탁해>의 배경도 인천이고 공간성이 잘 드러난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인천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은 좀 달랐다. 정 감독은 “영화감독의 공간이라는 건 특별하게 프레이밍되고 의식적으로 구성된 어떤 이미지인 것 같고, 실제 공간과는 거의 상관이 없지 않나 싶다. 영화에 나오는 도쿄도 어떻게 보면 비일상적이라고 느껴질 것 같다. 영화적인 공간이다”라고 말했다.

영화를 찍는 데 20여 일 걸렸다. 지하철을 타고 촬영 현장으로 출근하며 일본어를 공부했다. 스태프에게 민폐가 안 될 정도로 일본말을 구사했다. 촬영 현장은 속도감이 있었다. 빠른 시간 안에 영화를 찍는 게 일본 스타일이었다. “일본은 영화로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돈을 번다면 굉장한 우연과 행운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찍는다. 특징은 짧은 기간에 빠르게 찍는다는 거다. 멜로 영화는 20회 미만이다. 웬만한 영화도 한두 달 안에 찍는다.” 한국에선 각 신을 자세히 설명하는 콘티 작업이 사전에 이뤄지는데 일본은 영화를 만들 때도 드라마를 찍을 때처럼 대본만 가지고 진행한다. 직조하지 않은 데서 오는 헐렁함이 있다.

배우 역시 영화 현장에서 능동적이다. 감독과 협의하면서 직접 동선을 결정했다. 역시 콘티가 없어서 배우들의 주도적인 공간 결정이 중요했다. 그런 면에서 정 감독은 나카야마 미호가 프로페셔널하다고 생각했다. 나중엔 제 집처럼 자연스럽게 공간에 적응했다. 촬영에 늦거나 컨디션을 이유로 쉬는 일 같은 건 상상할 수 없었다. 촬영 현장에서도 배우가 모니터링을 하지 않았다. 본인이 어떻게 찍히는가는 감독의 몫이라고 생각해서다. 문화 차이에서 오는 어려움도 있었다. 엔딩 장면을 찍을 때 비가 쏟아져 철수했는데, 현지 관계자는 재촬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마지막 신이고 중요하다는 걸 설득해야 했다.

후속작은 재개발 지역의 고양이 다큐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겠다는 위기감이 들었을 때, <나비잠>을 만났다. 그래도 상관은 없지만 다큐멘터리만 하는 것으로 범위를 한정 짓고 싶지 않았다. 건축 다큐멘터리를 찍을 때는 제작을 겸해 일이 더 많았다. 극영화는 역할이 많이 나뉘는 작업이다. “다큐는 내가 더 중요하지만 극영화는 배우가 더 중요하다. 배우를 통해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다큐를 안 했다면 배우의 존재를 많이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덕분에 그 중요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지난 5월 일본에서 영화가 개봉한 다음 날 신주쿠의 한 영화관에서 관객과 함께 영화를 보았다. 스무 명가량이 이른 아침부터 영화를 관람하기 위해 줄을 서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연령대가 높았다. 의식과 육체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내용이라 나이 든 관객에게 더 설득력이 있는 것 같았다.

정재은 감독의 지난 극영화들은 공통적으로 청춘에 대해 다뤘다. 이번에 등장하는 찬해도 허무함을 안고 살아가는 청춘이다. 과거와 달라진 건 예전엔 청춘의 처지에서 사회에 도움을 요청하는 마음이었다면, 요즘은 다음 세대에게 어떤 것을 줄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는 점이랄까. 그때보다 나이를 먹었고 사회에 무엇을 남길까, 무엇을 건네줄까 더 많이 생각하게 되는 듯하다.

정재은 감독의 트위터 프로필을 보면 ‘고양이, 도시, 건축에 관심 많은 영화감독’으로 소개되어 있다.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그의 눈이 반짝거렸다. “고양이는 정말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피사체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다채로움을 가진 존재다. 고양이에 대해선 본능적인 끌림이 있는데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는 고양이를 화두로 삼고 있다. 도시를 가장 자기다운 방식으로 소유하며 살아가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아파트, 도시의 성장과 함께 버려지고 있는 고양이가 우리 사회에 은유하는 바가 여러 가지다. 후속작도 서울 둔촌동 재개발 지역의 고양이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다.

한국 개봉 전 관객 10만명을 목표로 케이크에 초 열 개를 꽂았다. <고양이를 부탁해>를 개봉할 당시 재개봉 운동이 일었다. 그때보다도 영화계가 더 극단적인 상황에 놓인 것 같다. 이번 영화도 뚜렷한 스토리와 장르, 많은 스타를 거느린 영화는 아니다. <나비잠>은 전국 60개 개봉관에서
막을 올린다. “제 영화를 찾아서 보기 굉장히 어려운 시대가 된 거다. 의외적인 성공을 기대하는 건 불가능해졌고 그보다는 보고 싶은 사람이 와서 볼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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