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그루지야)가 보름달이라면 아르메니아는 초승달이다.” 코카서스 (현지명 캅카스) 3국(조지아·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을 여행한 사람들의 대체적인 평이다. 코카서스 지역은 요즘 가장 핫한 여행지다. 여행 프로그램은 물론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집중 조명되었다. 코카서스에 가기 전에는 보통 조지아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막상 다녀오면 아르메니아 이야기를 가장 많이 한다. 조지아처럼 압도적인 설산 풍경은 없지만 음식이나 문화가 우리와 더 맞기 때문이다.

ⓒ시사IN 고재열아르메니아 전통 악기로 연주하자 즉석에서 춤을 추는 예레반 시민들.

코카서스 전문 여행 가이드인 블라디미르 박(한국명 박종원) 씨는 코카서스 여행 코스를 설계할 때 아제르바이잔-조지아-아르메니아 순서로 스케줄을 잡는다. 그래야 여행하면서 점점 더 좋은 것을 접하게 되기 때문이다(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적성 국가라 바로 못 가고 꼭 조지아를 거쳐야 한다). 패키지여행의 경우 보통 아제르바이잔에서 1~2박을 하고 아르메니아에서 3~4박을 하는 식으로 구성한다.

아제르바이잔이 아르메니아에 비해 국민소득이 두 배 이상인데 왜 이런 차이가 날까? 바로 문화의 힘이다.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는 새로 지어진 유럽풍 건물이 즐비하다. 그런데 여행자들은 이 모습을 보고 ‘테마파크 같다’고 말한다. 반면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에서는 문화를 느낀다. 두 도시의 극명한 차이를 “한쪽은 1억원을 들여 1000만원 효과를 내지만 한쪽은 1000만원을 들여 1억원 효과를 낸다”라고 비교하기도 한다.

8월6일부터 16일까지 9박11일 일정으로 진행한 〈시사IN〉 트래블 ‘코카서스 대자연 기행’ 참가자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참가자들은 다녀온 후 대부분 아르메니아를 다시 가고 싶은 나라로 꼽았다. 문화 수준도 높고 사람들도 좋고 심지어 수박과 멜론도 아르메니아 것이 더 맛있다고 했다. 특히 수도 예레반을 오래 머물고 싶은 매력적인 도시로 꼽았다. 아르메니아는 코카서스의 숨은 보석인 셈이다.

민주화 시위로 정권교체 이룬 아르메니아인

세 나라 모두 인구 1000만명이 안 되는 작은 나라지만 코카서스 3국은 인종·문화·종교적으로 차이가 크다. 한·중·일의 차이만큼이나 선명하다. 인종적으로 조지아는 코카시안 계통, 아제르바이잔은 투르크 계통, 아르메니아는 아리안 계통이다. 조지아는 조지아정교를, 아제르바이잔은 이슬람교를, 아르메니아는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를 주로 믿는다. 이런 인종과 문화 차이가 코카서스 여행을 즐겁게 한다.

ⓒ시사IN 고재열예레반 시의 캐스케이드 조각공원은 아라라트 산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곳에 만들어졌다.
〈시사IN〉 기행팀 뒤로 구름에 둘러싸인 아라라트 산이 보인다.

지금은 인구도 가장 적고 국토도 제일 좁지만 코카서스 3국 중 아르메니아가 가장 ‘잘나갔던’ 나라다. 조지아(고대 이베리아 왕국)와 아제르바이잔이 소국에 머물렀던 것과 달리, 아르메니아는 왼쪽으로는 로마와 오른쪽으로는 페르시아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대국이었다. 세력 싸움에서 밀리며 강대국의 견제를 많이 받았다. 조선 시대 ‘삼전도의 굴욕’처럼 아르메니아 왕 역시 로마 황제 앞에서 검투사와 싸워야 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강대국에 시달린 역사뿐만 아니라 현대사에서도 비슷한 점이 많다. 촛불집회 같은 민주화 시위로 정권교체를 이룬 점도 닮았다. 올해 초 세르지 사르키샨 총리가 장기 집권을 획책하자 아르메니아인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민주주의를 외쳤다. 기행팀의 안내를 맡은 아르미네 함바르주미얀 씨는 “대규모 집회가 있던 날 한국 관광객들을 데리고 세반 호수로 가고 있었는데 시위대에 길이 막혔다. 상황을 알아보려 여기저기 전화를 하던 중 총리가 퇴진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한국 관광객들과 함께 만세를 외쳤다”라고 말했다.

아르메니아의 굴곡진 역사는 현대의 아르메니아 문화에 격조를 남겨놓았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낡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낡음이 아니라 전통이고, 그것이 현재에도 유효할 수 있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펼쳐 보였다. 전통을 현대화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인테리어에 활용했다. 맥락 없이 유럽 문화를 이식한 아제르바이잔과 가장 큰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이런 문화적 자존감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예레반이다.

ⓒ시사IN 고재열아라라트 산이 보이는 예레반 시 외곽의 전망대.

예레반 중심부는 원형으로 되어 있다. 공화국광장을 중심으로 도로가 방사형으로 뻗어 있다. 공화국광장에서 오페라극장을 지나 캐스케이드 조각공원에 이르는 길이 ‘주작대로’처럼 중심가 구실을 한다. 이 중심가를 따라 걸으면 1인당 국민소득 3500달러 국가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문화적 풍요를 접할 수 있다. 도심지의 수준은 유럽 선진국에 육박한다. 공화국광장에서 오후 9시 무렵 시작되는 화려한 분수 쇼를 관람하고 오페라극장 주변의 노천카페에서 차나 커피를 마시며 여행자의 여유를 만끽할 수 있다.

예레반은 시내 어떤 곳에서라도 아르메니아인의 성산(聖山)인 아라라트 산(5137m)을 바라볼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아라라트 산은 노아의 방주가 표착한 곳으로 성경에도 나와 있다. 하지만 소비에트연방 시절 스탈린이 이 산을 터키에 넘겨주면서 아르메니아인들에게는 갈 수 없는 산이 되어버렸다. 터키는 아르메니아인들에게 학살의 가해국이기 때문이다.

터키는 오스만튀르크 왕조 시절이던 1915~1916년 아나톨리아 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을 강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수십만명(터키 측 주장 20만명, 아르메니아 측 주장 200만명)을 집단 학살했다. 아르메니아 이주자가 많은 프랑스는 ‘아르메니아 학살 부인 금지법’을 제정하기도 했다(2011년 12월 프랑스 의회가 통과시킨 이 법은 공개적으로 아르메니아 학살을 부인하는 행위에 대해 1년의 실형과 4만5000유로의 벌금을 부과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2012년 프랑스 헌법재판소가 이 법에 위헌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2016년에는 독일 연방의회가 집단 학살로 규정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이 오스만튀르크의 집중 견제를 당한 것은 과거에 강력한 국가였기 때문이다. 아르메니아인들이 학살을 피해 해외로 이주하면서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가 이뤄졌다. 현재 국내 거주(약 300만명)보다 해외에 사는(약 700만명, 이 중 400만명이 러시아에 거주) 아르메니아인이 더 많아서 ‘제2의 유대인’이라 불리기도 한다. 국내 거주 아르메니아인들도 국토의 대부분을 잃고 산악지역으로 밀려나 아르메니아 국토의 평균 고도는 1800m에 이른다.

ⓒ시사IN 고재열아르메니아 전통 방식으로 빵을 굽는 모습.

왼쪽으로는 로마와 오스만튀르크 (터키), 아래로는 페르시아(이란), 오른쪽으로는 몽골과 티무르제국, 위로는 제정러시아와 옛 소련(공산주의)에 시달리면서도 아르메니아는 기독교를 지켜냈다. 어렵사리 지켜낸 신앙이기에 아르메니아인들의 신앙에는 엄숙함이 있다. 이를 이종원 여행작가협회 회장은 “신앙의 순수함과 절제를 볼 수 있다.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이나 로마에 가는 것보다 더 낫다”라고 평가했다. 아르메니아는 세계 최초(301년)로 기독교(아르메니아 사도교회)를 국교로 삼은 나라인데, 예수의 열두 제자 중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선교를 한 다대오와 바돌로매를 중시한다. 

아라라트 코냑으로 완성된 코카서스 여행

신앙적으로는 순수하지만 술에 대해서는 관대한 편이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술과 여흥을 즐긴다. 조지아와 마찬가지로 ‘술존심’이 센 나라이기도 하다. 아르메니아는 종종 조지아와 와인 종주국 논쟁을 벌인다. 와인 관련 유물 유적을 바탕으로 종주국을 주장하는 조지아인에게 아르메니아인은 “조지아인은 성경을 안 믿는 것인가? 성경에 나와 있지 않나? 노아가 취한 곳이 바로 아라라트 산기슭이다”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말싸움에서는 아르메니아인이 이기지만 와인은 조지아산 크베브리 와인(땅에 묻은 항아리에 숙성하는 전통 방식으로 발효시킨 와인)이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대신 아르메니아에는 아라라트 코냑이 있다. 포도 증류주는 보통 ‘와인 브랜디’로 부르는데 아라라트 코냑은 프랑스 코냑 지방에서 ‘코냑’이라는 말을 붙여도 된다고 허가할 만큼 품질을 인정받았다. 그래서 코카서스 여행은 아라라트 코냑으로 완성된다.

조지아와 아르메니아는 음식에서도 라이벌이다. 사실 옛 소련 지역에서 가장 음식이 맛있기로 소문난 곳은 조지아다. 러시아의 시인 푸시킨도 “그루지야(조지아) 음식은 하나하나가 시다”라고 칭송했을 정도인데, 보통 조지아 음식을 ‘러시아의 전라도식’이라고 소개하곤 한다. 조지아 음식은 KBS 음식 다큐멘터리 〈요리 인류〉에서도 소개되었는데, 서양 음식의 원형을 볼 수 있어서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런데 한국인들에게는 아르메니아 음식이 조지아 음식보다 더 입에 맞는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간이 한국인 입맛에 맞는다. 고기를 익힐 때도 그렇다.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모두 샤슬릭 스타일의 돼지고기 꼬치구이가 유명한데 조지아식은 좀 퍽퍽하다. 반면 아르메니아는 꼬들꼬들한 식감을 살리고 비계 부위를 중시해 한국인에게 친숙하다.

ⓒ시사IN 고재열가르니 아차트 계곡의 주상절리는 트레킹 코스로 인기가 좋다.
이런 술과 음식을 즐기며 여행할 수 있는 아르메니아의 대표적인 관광지는 세반 호수다. 해발 1900m에 위치한 이 호수는 국토의 5%를 차지할 만큼 넓어서 수평선이 보일 정도다. ‘검은 호수’라고도 불리는데 물빛이 검어서가 아니라 호수에 구름의 그늘이 져서 검게 보이기 때문이다. 세반 호수는 송어가 유명해 여기서는 돼지고기 바비큐가 아니라 송어 바비큐를 먹는다.

국토 대부분이 산악지형이라 아르메니아는 산장이 많다. 그중에서도 이제반 지역이 유명하다. 〈시사IN〉 코카서스 기행팀이 묵은 아파카 산장도 그런 곳 가운데 하나인데, 트레킹 코스와 지프라인 등 야외 액티비티 시설이 잘 갖춰져 있었다. 산장에서 바로 연결된 트레킹 코스는 폭포까지 왕복 6㎞ 정도 거리였는데 기암절벽과 마주하고 있어서 풍광이 경이로웠다.

아르메니아는 산이 많아 협곡도 많은데 아차트 계곡 트레킹이 인기가 좋다. 같은 화산지형인 우리나라 한탄강에서도 볼 수 있는 주상절리가 나타나는데 더 웅장하고 절묘하다. 가르니 태양신전에서 이곳 주상절리로 이어지는 트레킹 코스가 여행자들에게 사랑받는다. 다만 도로 사정이 좋지 않고 길이 구불구불해 멀미가 심한 사람은 고생을 할 수 있다.

조지아와 마찬가지로 외침이 많아서 교회가 산악지역에 많다. 우리나라로 치면 암자나 정자가 있을 만한 위치에 교회가 있다. 게그하르트 동굴교회는 우리나라 석굴암을 연상시키는 곳으로 돌을 파 내려가서 만든 교회다. 아르메니아의 교황청이라 할 수 있는 에치미아진에는 아르메니아에 기독교를 전파한 수녀들을 기념하는 교회와 성물을 보관한 중요한 교회들이 있다.

기자명 아르메니아·고재열 기자 다른기사 보기 scoop@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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